나는 첫 단추가 꼬이면 '어차피 틀렸는데' 하면서 조기에 포기해 버리려 하는 나쁜 습관이 있는데, 오늘 아침이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아침 여섯 시 기차를 예매해놓고(서울->부산), 다섯 시에는 출발하리라 마음먹고는, 네 시에 일어나도록 알람을 맞춰놓고, 쿨쿨 자다가 다섯 시에 일어났다. 시계를 보자마자 스멀스멀 몰려오는 나쁜 습관의 배설물들!
1. 나는 지금 굉장히 졸리고 일어나기 싫다.
2. 지금 부랴부랴 챙겨서 나가보았자 기차 시간에 맞추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3. 지금이라면 얼마간의 수수료만 지급하면 대부분의 표 값을 건질 수 있다.
4. 내가 지스타를 관람하고 게임기업 채용박람회를 가려는 것은 게임업계의 동향을 살피려는 선이지, 내 인생에 필수적인 일은 아니다.
5. 더군다나 나는 마감을 넘긴 과제가 셋이나 있고 오후에는 수업도 있다.
6. 상황이 이러할진대 인생의 꿈 운운하며 게임쇼에 가는 게 도대체 제정신으로 할 일인가? 일단 잠이나 더 자고, 해 뜨면 일어나서 밥 먹고 숙제하고 학교 가자.
저 악마의 유혹에 마음이 두 바퀴는 휘청거린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늦지 않게 기차를 탔다는 건 예전보다는 조금은 성장한 증거라고 생각된다. 누가 그랬던가, 신체는 항상 자기 자신이 쉬기 위한 거짓말을 뇌에 시킨다고. 사흘에 하루라도 아침운동을 나가려고 매일 아침 이불에서 헤엄쳐 댔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살을 조금도 못 뺀 건 안타깝지만)
따지고 보면 그 후에도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해저드가 있었던가. 나랑은 무관하기만 한 것 같은 부스 행사들. 하데스의 전령 같은 말투의 인사담당자. 수십 년에 걸쳐 준비해 온듯한 옆 사람의 포트폴리오. 오늘 채용회를 위해 호주에서 비행기로 날아왔다던 어느 지원자. 모두가 나에게 "지금 너는 너무 보잘것없어. 어차피 지금 넌 안될 거야. 여기선 일단 전략적 후퇴가 필요해!!" 하고 고래고래 외치게 하는 것들이었으니...
나만 오징어인 거 같고 이룬 게 없는 것 같고 뭔가를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고.. 오, 정녕 스물다섯이란 이리도 힘들고 벅차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면 어김없이 몰려오는 안주의 소리들. "자 어서 눈을 감고 이 부끄러운 곳을 떠나자. 아직 못 가본 부스가 얼마나 많은가. 이 현실적인 장소를 떠나 게임걸들과 신작들 사이에 파묻히면 틀림없이 앞으로 몇 시간은 행복할 수 있다. 여태껏 수없이 그래 왔지 않는가? 안 그래?!"
허나 오늘은 이것들도 모두 이겨냈다. 아침 이후로 탄력이 붙어서였을까. 온갖 도피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 악물고 행동에 나섰다.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오늘 하루 만에 얼마나 값진 전리품들을 얻었는가. 전시회장의 화려한 에너지는 이 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다시금 심어 주었다. 인사담당자와의 상담은 좀 더 명확한 비전을 갖게 해 주었다. 온갖 걸작들은 내게 성공하는 게임의 비결을 알려주었으며, 온각 졸작들은 내 자신감의 양분이 되어주었다. 몸도 머리도 지치고 지쳐 기진맥진했지만, 심장 가까이서 느껴지는 이 두근거림은 오늘 하루 땡땡이친 수업과 비싼 차비를 보상하고도 남으리라.
행사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 부산역에서 오늘의 첫 식사를 한 술 넘기고 있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나는 짧은 시간 동안 꽤나 감정의 격변을 일으켰는데, 처음에는 녹초 중에 별 기대 없이 시킨 역사식당 밥이 너무나 푸짐하고 맛있는대서 오는 감동, 그다음은 하루하루 오늘 같은 자신과의 전쟁을 치러야 할 미래에 대한 공포, 그리고는 오늘 도망치지 않고 이루어낸 성과에 대한 뿌듯함,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것이 어우러져 오늘 하루 참 보람찼구나 하는 충실함으로 마무리되었고, 동시에 눈물도 잦아들었다.
오늘 하루 참 즐겁고 보람찼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오,, 이 얼마나 행복한 하루였는가!
문득 생각난 건데, 일기라는 건 그날 하루에 대한 헌정 같은 게 아닐까.
2011년 11월 11일.
이날은 내게 글로서 남길 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