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엔 그렇듯이 학교를 가기 위한 버스를 탄다. 언제나 그렇듯이 빈자리에 앉아서 마저 이루지 못한 잠을 청한다. 그 날도 그렇게 벽면에 기댄다. 뒤에 여고생이 있다. 그 날도 그렇게 여고생임을 증명하듯 시끄럽다
'나 사랑니 뺐어. 사랑니 빼서 이제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사랑니를 빼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는 익숙한 말이다. 하지만 잠이 깬다.
'오빠 사랑니 뺐는데 이제 사랑 못하면 어떡해요'
'그런 삼류 유머 좀 하지마 어디서 배웠니'
'진짜 걱정되서 그런데'
생각을 한다. 도대체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칠지 난감하다. 농담도 진담도 아닌 그 애매한 선에 있는 말. 니가 노력하면 언제든지 사랑할 수 있잖아라고 답해주려다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해 입을 다문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하지만 그녀는 답을 요구하듯이 쳐다본다.
'사랑 안 하면 되지'
'사랑 안 하면 어떡해요. 앞으로 인생도 긴데'
'안 해도 다 살 수 있어'
각자 생각에 잠긴다. 한 사람은 사랑을 안 해도 진짜 인생을 살 수 있는지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을 꼭 해야 인생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리지 못하는 결론을 내리고 다른 한 사람은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쳐다본다. 표정을 보니 모르겠다.
'괜찮아 난 사랑할 사람이 있으니깐'
'그래? 좋겠다. 나는 없는데'
낯익다. 그전에도 사랑니를 뺐다면서 이런 대화를 한듯 싶다. 두번이나 반복하는 걸 보니 사랑 못할까봐 진짜 걱정이 되는 건가. 아니면 무슨 다른 힘든 일이 있나라고 잠깐 생각해본다. 글쎄 사랑니가 그런 존잰가.
'야, 나 사랑니 뽑았어. 이제 사랑 못하면 어떡하지?'
'누구나 빼는 사랑니 뽑았다고 사랑 못하면 누가 사랑하냐'
'사랑하고 뽑으면 사랑할 수 있지. 난 사랑 못하고 뽑았잖아'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잖아'
'그건 사랑과 달라'
학원에서 물리 2 교과서를 펴들고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말을 건다. 어차피 눈에 들어도 오지 않는 교과서를 억지로 보고 있는 중이라 차라리 잘됐다면서 응수한다.
'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사랑할 사람이나 찾으시고 그러시지'
'그러니깐 사랑니 빼서 못 찾을까봐 걱정되서 그렇지'
'사랑니 안 빼도 넌 못찾..'
말을 하는 중간에 책으로 때리기 시작해 말을 잇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말뿐이다. 그 아이는 정말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만큼 매력적이니깐. 그리고 그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 수도 충분하고.
가끔 우린 떡볶이를 먹는다. 7번 출구에 있었던 트럭 떡볶이집. 그 학원 근처에 수많은 떡볶이 트럭 가게가 있었지만 1년간의 세월을 거치면서 모든 가게를 몇번이나 먹어본 결과 7번 출구 떡볶이집이 가장 맛있다고 모두가 결론 내렸다. 그날 따라 자습한답시고 늦게까지 공부해 남은 사람은 둘 뿐이었고 늦게까지 공부한 댓가로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내가 데려다 줄게'
'니가 왜 데려다 줘 차라리 데려다주어야 하면 내가 데려다줄게'
'배불러서 그래 소화시키게 좀 걸을겸'
'괜찮아 됐어'
' 학생 여자가 데려다준다고 하면 감사해야하기는 커녕 튕기기는 왜 튕겨 이렇게 이쁜 여학생이 말하는데'
'그렇죠 아저씨 이 녀석이 건방져요 잘 들었지 가자'
평소에 그렇게 돌아가는 걸 싫어하면서 왠일까라고 생각한다. 수능이 얼마 안 남으니 그냥 힘들어서 걷고 싶은 걸까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라고 생각한다. 절반 이상 왔다. 하지만 말이 없다. 나도 말이 없다.
'여기까지 왔으면 됐지 너치고 멀리 왔으니깐 충분해 돌아가'
'좋아해'
갑자기 타이슨에게 어퍼컷을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면 평소에 누구나 볼 수 있었던 함정에 멍청하게 걸어가다가 빠지면 이런 기분일 걸까라고 생각한다. 어딘가에 몰래카메라가 있는거 같다. 사랑스럽게 날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이 표정에 혹해서 순간적으로 말을 잘못했다가는 왠지 이 아이의 장난에 넘어가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조심스레 감정을 추스른다. 내가 흔들린 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장난이지?'
'장난이야'
딴청 피우듯 아무렇지 않은듯 그냥 그렇듯 되물은 말 한마디에 그렇게 답변이 온다. 예상했다. 난 넘어가지 않았다. 다시 본 표정은 사랑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원래 평소에 보아왔던 장난스러운 표정이다.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가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면서 뿌듯해 한다. 그런데 왠지 씁쓸하다. 왜 씁쓸하지.
'잘가'
'잘가 잊어버려'
그리고 수능 날까지 학원이 끝나도 그 아이는 자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간간히 있는 자습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었고 그 아이는 다시는 내 방향으로 같이 가지 않았다. 떡볶이를 같이 먹을 기회도 거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척 연락해보지만 괜시리 연락만 안되는 것 같았지만 괜시리 혼자만의 느낌으로 앞서가는 것일 것이다. 수능이 끝났지만 연락하기 힘든 것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연락이 아예 안되는 것 아니였으니깐 단지 보기 힘든 것일뿐. 물론 그 후론 이상스레 볼 수 없었지만 어쩌면 연락할때는 아무렇지 않는걸 보면 내가 속아 넘어가지 않은게 다행일지 모른다. 난 속지 않았다. 그 사랑스러운 표정과 평소 생각했던 매력에 넘어가지 않은게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제대로 된 결론도 안내려주고 사랑니가 빠졌다는데 오빠는 같이 걱정해주질 못할 망정'
'난 사랑니 뺀지 몇년이 흘렀는데 그래서 그런건가 사랑이 없나 뭐 어때'
'나는 일본 간단 말이에요. 사랑니가 빠진 채로 오빠는 내가 가는지도 몰랐죠?'
'나 사랑니 빼서 사랑 못하면 어떡하지'
'나도 좀 있다 사랑니 빼면 그럼 사랑 못하는 건가'
여고생들이 내린다. 이제는 다시 잠을 잘 수 있겠구나라고 기뻐하면서 그리고는 난 언제 사랑니를 뺐는지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본다 고1과 고 2사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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