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이랬다. 훈련소 과정을 마치고 공익 근무에 들어선 나.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여인의 향기를 맡지 못한 나. 근무지는 심지어 한국 최고 대학인 '샤대'. 어쩐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은 매일이었다. 신입생의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매일 출근을 굳이 봉천사거리 까지 걸어가서 셔틀을 타는 이유란 그런 것이다. 아무 상관도 없지만 왠지 샤대의 설레임이라고 하고싶은, 그래. 톡 까놓고 말해서 서울대 여대생들의 향기가 필요했다. 노골적이다 킁킁.
한달 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여느날보다 아침 잠이 빨리깨서 셔틀을 좀 일찍타게 되었는데, 운이 좋아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앉은 좌석버스 사이 통로로 들어서는 사람들 중에 그 여학생을 보았다. 샤대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뽀얀 볼과, 요새 흔치 않은 화장기 없는 눈에 길지 않은 속눈썹. 오똑하다고 하기에는 모자라지만 날렵해 보이는 콧날과, 슬쩍 벌어져있는 예쁜 홍색의 입술과 그 사이로 슬쩍 슬쩍 보이는 하얀 이. 어딘가 압도적으로 예쁘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참 곱고 귀여운 아가씨였다. 나도 모르게 그 아가씨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는데, 역시 샤대생이라고 해야할지. 빼곡히 무언가가 적힌 A4용지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내 근무지는 박물관인데, 박물관 근처에는 미대, 사회대, 법대, 경영대 정도의 건물이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아침 일찍 오는 학생들은 저 위쪽의 자연대, 농대, 대학원, 중앙도서관, 인문대 등등등으로 빠지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길이 엇갈리고는 한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보다 그 여학생은 한참이나 먼저 내렸기에, 굽이 없는 신발을 신은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과처럼 틀어올린 머리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가 하악하악...은 아니고 흠흠 매력적이었다 이거다. 그래서 더 아쉬울 수 밖에. 사람들이 다 내린뒤에야 기사아저씨께 꾸벅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버스에서 내렸다.
시원한 아침 공기와 높은 하늘 이야 기분좋다. 오늘 예쁜 여자도 보고, 앞 자리 여인의 샴푸향기도 나쁘지 않았고, 아침밥도 잘 먹었고, 왠지 똥도 잘 나올거같은 날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한껏 즐거웠다. 몇 걸음을 옮기며 학생도 아닌 내게 주는 '학생회 투표하세요'전단을 능청스레 받으며 잠깐이나마 샤대느낌을 즐겼다. 어라?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그 여자가 나와 같은 방향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난 나도모르게 걸음을 조금 서둘러 그 여학생을 앞지르고 싶었다. 지나치면서 한 번 쯤 더 보고싶은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느 여학생처럼 그 아이는 옹기종기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걷고있었고, 난 능청스레 그 옆을 지나며 스윽 그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우연인지 딱 돌아보는 순간에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걸음이 조금 엉키고 만 것이다.
"으- 아앗.앗. 앗."
매력적인 목소리로 탄성을 내면서, 자연법칙에 의해 지구와 하나가 되려 엎어지는 몸의 중심을 잡으려 지그재그로 다리를 밟으며 휘청거린뒤에야 겨우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았다. 그때 '풋-'하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슬쩍 두드렸다. 좀 우스웠나?! 귓볼이 따끈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하하; 하고는 멋쩍게 그 아이를 향해 웃었다. 어느새 그 아이는 내 앞쪽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난 재빨리 뭐라도 말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럴땐 남자가 선수를 쳐야지, 근데 길에서 헌팅같은걸 해 본적도 없고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몰랐던 나. 그럴싸한 말을 생각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날씨 좋죠? 아침은 먹었어요? 술 좋아해요? 바람이 기분좋죠? 과가 어디에요? 나이는? 쓰리사이즈는? C컵같은데..가 아니라, 흠흠 커피라도 한잔.. 이런날엔 아라비카 백프로의 맥심 모카골드와 함께 낭만을 즐겨..도 아니고. 아으으으.
"저기요..."
"아,앗 네. 하하.."
열심히 할 말을 생각하는 와중에, 그 아이가 얼굴이 약간 발그레해지고 수줍어하는 느낌으로 먼저 말을 거는 것이다. 으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횡재다! 가까워진 거리에 바람을 탄 그 아이의 비누내음이 슬쩍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설레임의 시작이다. 콩닥 콩닥 쿵기러 쿵덕 쿵쿵 덕 키러 쿵 더러러러 콩 기덕 콩닥.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건가? 일단 최대한 상큼하게 웃자. 상큼하지 않은 얼굴이긴 하지만 상큼하게 웃어보자. 하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볼이 약간 푸르르 떨리는게, 이런! 싶었다. 여학생은 내 눈을 슬쩍 슬쩍 보며 우물쭈물 하는 듯 했다. 좋아, 포문은 내가 여는게 낫겠지? 배에 힘 빡 주고..
"젝 쿨럭 커흠 흠."
아 망할 너무 긴장했나 목에 사례가..
"크흠..음 으음. 제가 좀 꼴이 우스꽝스러웠죠? 하하; 초면에 못볼꼴을... 오늘 날씨 좋죠? 하늘도 높고."
"아 ..아뇨..네..날씨 좋네요.."
웃었다! 그녀는 아까보다는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난 자신감을 얻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피지알에서도 정공법이 좋은거라고 했으니까. 나는 연애를 글로배운 사람이기때문에 완벽한 이론을 머리에 담아두고 있었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난 남자답게 용기있게 그녀에게 물었다. 애인있어요?!
"그런데 저는 왜.. 무슨 할 말 있으셨어요?"
아.. 망할 내 입. 생각과 다른 예의바른 말이 나오다니.. 역시 조기교육과 가정교육이 참 중요한거 같다. 언제 어느때라도 예의를 갖추는 내 모습... 으음, 어쨌거나 자아. 최대한 편안한 표정을 유지하자. 심박수는 80전후가 되도록. 침착하고, 내가 이야기 하는 것 보다 받아주는 자세도 괜찮지 괜찮아. 오빠 저 사실.. 으음 그래.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 세상일은 모르는 거고 내 인생에 볕들날이 올 때도 됐지 인생이 매번 겨울만 있으면 쓰나. 첫눈에 반했어요 뭐 이러면 으헤헤헤헤헤 아냐 좋아하지 말자. 도도하게, 태연하게, 남자는 못생겨도 자신감. 잘생기면 남친감. 돈많으면 남편감. 뭐 이런거니까 난 자신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좋아 괜찮아. 난 준비됐어.
"그게..."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 말해! 가을남자를 구원할 천사같은 당신이여! 오오오! 그대 나와 커피 한잔 어떤가요? 애인은 있으신가요? 빨리 내게 말해주오. 심장소리가 커져만 가잖아. 혹시 바로 반했다고 하는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에이.. 근데 말을 걸겠어 이야 상상이 경부고속국도마냥 빠르게 펼쳐지네 헤헤헤헤헤헤헤 내 여자친구 하시면 되요 지금 바로 라잇 나우. 대놓고 탁! 말씀하시라고!'
"혹시..."
우와, 설마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는건가? 어떡하지. 없다고 하기엔 너무 좀 그렇고, 있다고 하는건 뻥인데. 급한 티 내면 안되는데. 으음, 어떡하지? 일단 없다고 하는게 맞겠지? 만나는 사람은 있다고 할까? 아냐, 아예 외롭다고 칭얼거릴까? 아니면 굉장히 쿨시크하게 맘에 드는 여자가 없어서요. 하고 웃어볼까? 아니면 제 남자친구가 되어달라고 한다? 에이 아냐 이건 아니야 아니지 에이 이게 무슨 아냐 조바심 내지 말자. 어떤게 나을까 음... 역시 나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에 근거한다면, 초면이니까 커피 한잔 어떠냐고 물어볼 거 같아. 그래, 이렇게 수줍어 하는애가 한방에 스트레이트를 던지려구! 여자 자존심이 있지! 뭐, 그래. 자존심도 살려줄 겸 커피 한잔 하자고 하면 맛있는 카페에 가서 디저트 하나 놓고 천천히 대화의 장을 펼치지 뭐. 음~ 좋아 좋아. 만족스러워. 난 지금 행↘뽀옥↗~.
"교회 다니세요?"
"커피 좋죠 어디가서 마실까요 커피 교회에서 마실까요? 교회에서..교...네? 교회다니냐고요? 커피마시는게 아니고요?"
"네? 무슨 커피...요?"
"...아.. 어 네.. 네! 교회, 교회 다녀요! 교회 다니죠 열심히.. "
"아...네.. 안녕히 계세요."
"네..네..........."
..........너클볼 투수였네.
아침부터 예수님이 장난을 치나보다. 간밤에 많이 심심하셨나 보다. 주의 종을 아침부터 이런데 힘 쓰게 하고......후..
욱 하는 바람에(라고 읽고 부끄러워서) 교회다닌다고 뻥 쳤는데 천벌받지는 않겠지?
재밌다고 낄낄대실 것 같으니 이젠 심심하지 않으시게 티비랑 팟캐스트라도 놔드려야겠다.. 제기랄...
정말 간만에 찾아온 설레임이었는데...............................
아아 인생 그것은 외로움 아아 인생 그것은 서글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