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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0/27 22:51:41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6) 정몽주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꽤나 유명한 시조죠. 맹독충 버로우한 골에 해병아 가지 마라 이런 식으로 변형도 쉽습니다. (...) 이 시의 작가는 정몽주의 어머니인 영천 이씨였습니다. 모전자전일까요.
"동방 (성)이학의 시조"
그 스승이었던 이색이 한 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성리학에 관한 책을 구하기 어려워서 이리저리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몽주는 정말 막힘 없이 그걸 해냈고, 후에 중국의 다른 책들과 비교했더니 딱 들어맞더라... 그런 말이 있죠.
"도덕의 으뜸"
후배 정도전의 평입니다. 스승과 후배가 이 정도로 극찬을 한 사람이 정몽주였죠.
허나... 정몽주의 삶을 보면 그의 어머니의 바램처럼 깨끗하게 살지는 못 한 것 같습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요.
1. 공양왕 이전
어렸을 때 천재였다느니 이런 건 무시하고.
고려 말에 등장한 신진사대부. 이색이 뿌리였다면 정도전은 그것을 실현하려는 강경파 선봉, 정몽주는 이색이 말했듯 고려 말 성리학 그 자체나 다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도전과도 깊은 친교를 맺었고, 이인임 집권 후 반원친명에 가담하죠. 역시 유배 당합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건 단 1년 후, 덕분에 의외의 틈이 생깁니다.
우왕 집권 중 그는 우왕이 총애했던 비의 친척을 -_-; 과거에 합격시켜주는 비리를 저질렀다 하고,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여기에는 이색, 이인임 같은 구세력부터 이성계 등의 신세력까지 다양하게 초대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우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정몽주의 집에 기습 방문해 잔치에 참가했다고 하죠.
이런 점을 통해 정몽주가 사실은 권력을 지향하고 줄을 잘 서는 데 능할 뿐이라는 말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건 맞는 말인 것으로 보이구요. 어쨌든 귀양 가자마자 복귀했고, 우왕의 치세 내내 관직 생활을 했으며, 위화도 회군을 묵인하고 창왕을 축출하는데 가담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시기 동안 그가 했던 일들이 참 특이하네요.
1372년, 공민왕 21년에 그는 명나라에 갔다가 표류됩니다. 겨우 살아나는데 주원장이 준 서찰은 물에 젖지 않게 보존했고, 주원장이 이에 감탄해 고려로 돌아가는 데 힘 썼다고 하죠.
1377년, 우왕 집권기에 그는 일본으로 갑니다. 당시 일본이 어떤 곳이었죠? 왜구가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고려를 침략하던 때였죠. 이전에 보낸 나흥유는 감금됐다가 겨우 살아 돌아올 정도였습니다. 헌데... 이 때 정몽주는 수백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1381년, 이번에는 명나라로 갑니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협박을 계속 하고 있던 상태였고, 이전에 갔던 홍상재를 억류하고 있었습니다. 위에 일본으로 간 것과 함께 이 일을 정몽주를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보내서 골탕먹이려는 권문세족의 속셈이라고 하는데... 정몽주는 무사히 돌아옵니다. 주원장의 생일이 불과 두 달 남은 상황에서 정말 빠른 준비를 하고 간 거죠. 서장관으로 정도전이 픽업됐고, 그들은 무사히 기한 내에 도착합니다. 이 때 억류된 정상재를 데리고 온 것은 물론 5년간 미납된 조공도 면제받았습니다.
1386년에 또 가서 또 5년간 쌓인 거랑 (... 고려 조공 안 바치고 뭐하고 있었던 거죠;) 주원장이 더 달라고 요구한 것들을 모두 면제받고 돌아옵니다. -_-;
전투에서도 심심하면 참가했는데, 특히 이성계 휘하일 때가 많았습니다. 특별한 공은 없어 보이지만, 그 역시 문무 겸전이었던 것이죠.
이러저러한 것들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오죠. 친명 때문에 탄압 받은 신진사대부들, 그들은 정도전처럼 역성 혁명을 꿈꾸기도 했고 아예 재야에 눌러 앉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둘 중 어느 것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인임 등 구세력과도 딱히 사이를 틀지 않았고, 신세력인 이성계와도 정말 각별한 상황이었죠. 그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미친 듯이 발휘한 거죠.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까마귀와 어울리지 않는 백로로 산 게 아니었습니다. 까마귀 사이에 뛰어들어 진흙탕에서 뒹굴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한 거죠.
백로가가 유명한 것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렇게 깨끗한 걸 선호합니다만, 진정 위대한 건 이렇게 정치라는 진흙탕에 뛰어들어서 더러워지더라도 자기가 할 일을 하는 게 아닐까요?
2. 이성계와의 결별
그 역시 최영과 우왕의 요동 정벌 때 이성계의 편을 들었고, 위화도 회군과 최영의 처형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토지 개혁에 대해 별 말이 없었지만 그 흐름을 방해하지도 않았죠. 그리고...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흥국사 9공신에 그 역시 포함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정한 것이죠. 그의 실무 능력, 성리학자로서의 입지, 오랫동안의 친교... 이색이야 노땅이었고, 신진사대부의 큰 축인 정몽주와 정도전이 모두 이성계의 편을 들었다는 것의 의미는 엄청납니다. 창왕 시절에도, 공양왕 즉위 후에도 정몽주는 언제나 높은 벼슬에 있었죠.
공양왕 즉위 후, 이색은 신돈의 아들을 세우고 이인임과 가깝고 토지 개혁에 반대하고 뭐 이런 이유로 마침내 귀양갑니다. 이제 조정은 신진사대부의 세상이었습니다. 정말 빠르게 토지 개혁이 완성되고, 과전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쓸모 없는 옛 토지 문서가 불타던 날, 그것은 고려를 태우는 불길이었죠.
대체 언제부터였을까요. 고려사로는 쉽게 짐작하기 힘듭니다. 이색이 계속 욕 먹는 와중에도 그는 이색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자신의 무력은 없었지만, 이성계와 정도전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3. 공양왕
공손히 왕위를 양보한 공양왕, 하지만 그 역시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드러납니다. 그냥 울면서 알았다 알았다 하던 공양왕이었습니다. 헌데... 이색의 죽음을 주장하는 말에 이렇게 말 했죠.
"대간이 다시 이색ㆍ조민수의 죄를 논핵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정말 길게 길게 이색을 죽이랬는데) "대답이 없었다."
"대간이 논핵한 민수ㆍ권근은 이미 죄를 주었으니, 경등은 마땅히 대간을 타일러서 다시는 논핵을 고집하지 못하게 하라"
공양왕의 반격은 1390년. 그의 재위 2년부터 차차 드러납니다. 이색을 벌 하는 데까지는 막지 못 했던 공양왕, 하지만 저렇게 무시하고 이미 벌을 줬다는 이유로 보호하면서 죽이는 것까지는 막죠. 이에 뭔가를 느꼈는지 이성계가 사직하려 했는데, 급히 그에게 사람을 보내고 공신들에게 상을 더 주며 무마합니다.
그 역시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는 거의 모든 일을 9 공신에게 맡겼고, 이성계의 사직을 계속 눈물로 만류했습니다. 실세인 공신들과 척을 지지 않으면서도 이색 등 구세력을 살리는 것,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계속 추진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이색 등을 국문하다가 홍수가 일어나 감옥에 물이 찬 적도 있는데, 이게 하늘의 뜻이라면서 풀어주자고도 했다는군요. 결국 1390년 11월, 이색, 우현보 등 구세력의 죄를 모두 사면하고 풀어줍니다.
정도전은 직접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며 이색을 죽이려 했고, 정몽주는 맞 상소를 올려서 그것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공민왕 3년, 1391년 그 갈등은 갈 때까지 가죠. 날씨까지 들먹이며 이색을 죽이라는 정도전의 말에 대한 공양왕의 대답입니다.
"이색과 우현보의 일은 정지시킨 지가 이미 오래인데 지금도 소를 올리는 자가 있으니, 반드시 경의 소에 따라 하는 것이다. 경이 요즈음 과인을 보지 않는 것도 또한 이 일 때문이다"
뭐 정도전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지만요. 이성계는 이 흐름을 보고 계속 사직을 요청했지만 그 때마다 공양왕은 맞섭니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였죠.
9월, 공양왕은 온갖 신하들을 불러 이색 등의 처벌에 대해 논 합니다. 이성계파는 당연히 그의 처벌을 주장했죠. 아마 열띤 논쟁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로 허무했습니다.
"민수는 창의 근친이니 창을 세우고자 한 것은 민수의 뜻입니다. 이때를 당해서 이색이 비록 종실을 세우고자 하였을지라도 민수의 뜻을 빼앗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색의 죄는 응당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해야 될 것입니다"
이색은 조민수에게 끌려간 죄밖에 없다는 것, 정몽주의 이 말이 튀어나오자 공양왕은 곧바로 받아들입니다. 이어, 정몽주의 결정적인 한 방이 터집니다.
"앞으로 다시 이 일을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죄로 논할 것이다"
공양왕은 이를 받아들여 더 이상의 얘기를 꺼내지 못 하게 했습니다. 전혀 예상도 하지 못 했던 한 방이었습니다.
4. 고려의 신하
이성계와 정도전과의 관계, 흥국사 9공신이 됐던 것을 생각하면 정몽주는 친이성계였고, 시기가 언제였든 이성계 세력에 확실히 가담한 것으로 보입니다. 노땅-_-; 이색과 강경파 정도전, 그런 상황에서 정몽주는 신진사대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 직후 정몽주는 태도를 바꿉니다. 너무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그 하나가 이성계를 등진 효과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이성계파로만 이루어졌던 조정이 한순간에 둘로 갈라진 것이죠.
이 때문에 그냥 밥그릇 싸움으로 정도전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좀 따져보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조민수는 이색을 살리는 대신 확실히 나락으로 떨어졌거든요. 병권은 이성계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가 손만 한 번 흔들면 공양왕이고 정몽주 자신이고 살기는 힘들었죠.
하지만, 그는 이성계에 반대했습니다. 그가 믿을 건 단 하나였죠. 이성계가 무력을 쓰진 않을 거라는 것. 공양왕이 자기 손으로 왕위를 양보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민심도, 후대의 명분도 얻을 수 없으니까요. 정몽주가 기댄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대로 이성계 편만 들었으면 정말 쉽게 살 수 있는데도요.
그런 면에서... 삼국지의 이 사람과 비교해 보고 싶네요.
조조의 제 1 모사였던 순욱. 하지만 그는 조조에 반대했고, 숙청당했죠. 빈 찬합이 평생을 이어 온 주종관계의 끝이었습니다.
위 장면처럼 한나라를 고려로 바꿔 보세요 :)
신진사대부의 개혁, 이성계의 집권을 통한 구세력의 청산, 그 모든 것 역시 그가 원했던 것일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달랐죠. 이성계와 정도전의 개혁은 나라를 갈아 엎기 위한 개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몽주가 원한 개혁은 이 나라 고려를 살리기 위한 개혁이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의 개혁에 대해 정몽주는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집중한 건 하나, 이색을 살리는 거였죠. 스승이라서 그랬던 걸까요.
공양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토지 개혁이 이루어졌을 때, 그는 오랫동안의 법이 바뀌었다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죠. 그가 집중했던 것 역시 단 하나, 이색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만이 이성계의 반대편에서, 고려와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세력이었거든요.
상대는 나라의 모든 군권을 쥔 이성계, 그 상황에서 그가 무력을 쓸 수 없다는 단 하나를 믿고 공양왕과 정몽주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5. 총반격
"듣건대, 경의 휘하 인사가 글을 만들어 우현보 등을 논죄하고자 한다 하니, 경도 또한 알고 있는가"
자신의 명으로 더 이상 말을 꺼내면 안 된다고 했던 공양왕, 대담해지기 시작했죠. 이성계는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_-a 그건 이루어지고 있었죠. 누가? 정도전이요.
비밀리에 이루어지던 일이었는데, 정몽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거든요. 다음해 3월, 1392년에 이성계는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집니다. 이 말을 듣고 정몽주는 웃었다고 하죠.
총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그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것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공격해 그를 1차로 집인 봉화로 보냈고, 조준, 남은 등 이성계파를 모두 귀양 보내 버립니다. 정도전 역시 고향에서 잡혀 귀양 갑니다. 자기를 왕으로 앉혀준 공신을 한 방에 보내 버린 거죠. 그 전에 이색 등 구세력은 은근슬쩍 조정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이성계에 반대하는 세력, 정몽주파의 공격은 계속됐죠. 하지만... 공양왕은 이 이상으로 나가지 못 합니다.
"내가 처음에 도전을 베라는 말이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 버린 거죠. 이성계의 세력을 누르려 하긴 했지만... 역시 그가 쥔 병권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정몽주는 포기할 수 없었죠. 대간들을 이용해 뜰에서 시위를 하며 계속 정도전 등의 죽음을 청했고, 국문하러 가는 금부도사들에게 매를 심하게 가해 죽게 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성공만 하면 이성계파는 삽시간에 팔다리를 잃게 될 상황에 처했습니다. 머뭇거리는 공양왕과 달리 정몽주는 끝까지 가 볼 참이었죠. 하지만...
그 자신이 이성계가 예상하지 못 한 복병이었듯, 이성계에게도 아직 무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자신조차도 몰랐던 무기였죠.
6. 다섯째 아들
"우리 태조가 해주로부터 벽란도에 이르러 유숙하려 하니, 태종이 달려가서 고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해칠 것입니다." 하였으나, 태조는 답하지 않았다. 또, “이곳에 유숙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태조는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청한 뒤에야 병든 몸을 억지로 참고 드디어 견여를 타고 밤에 사저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삼년상을 하고 있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 그는 급히 요양 중이던 이성계를 찾아갑니다. 그간의 일을 말해 주며 급히 돌아가자고 하는 이방원, 이성계는 그의 뜻을 따라 돌아옵니다.
정몽주의 작전은 모두 이성계의 부재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일을 물릴 순 없었죠. 양쪽은 모두 총력전을 벌입니다. 정몽주파는 정도전과 조준 등을 죽이라, 이성계파는 살리라는 거였죠. 공양왕은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정도전을 죽인 효과는 크겠지만, 모든 것은 이성계가 무력을 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오른팔을 베어버리면 이성계가 무슨 짓을 할 것인가... 그게 두려움이었을 겁니다.
그가 결정적인 실수를 한 걸지, 아니면 그의 우려가 맞았을지는 뭐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일을 꾸민 것은 이성계가 아니었습니다만...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속히 여막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삼년상) 를 마치게 하라"
이성계의 반대. 하지만 이방원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합격하는 등의 재능으로 나름 돋보인 이방원, 하지만 날고 기는 장수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흔한 아들 5일 뿐이었습니다. 그랬던 아들이, 이성계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 한 큰 일을 꾸미려 했던 것이죠.
그는 그의 형제들과 이두란(퉁두란) 등을 불러 일을 의논합니다. 목표는 정몽주의 목숨. 퉁두란은 이성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거부하였고, 다른 이들 역시 딱히 동참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신 그는 부하들을 부릅니다. 조영규를 비롯한 이들이었죠. 이제 기회만 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이 일이 너무 쉽게 누설됩니다. 이성계파였던 변중량, 하지만 그는 정몽주의 제자였죠. 그는 곧바로 정몽주에게 알립니다.
7. 단말마
이 때 정몽주의 행동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상황에서 홀로 이성계의 집을 찾은 것이죠. 실록에서는 이를 염탐이라고 하지만, -_-; 차라리 부하를 보내지 혼자 염탐을 왜 할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마음 먹은 게 무엇일지는요. 하지만 이방원에게는 최고의 기회였죠. 그는 "오늘밖에 없다" 고 마음 먹으며 조영규 등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 동안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죠. 한 때는 동지였던, 서로가 없어야 존재할 수 있는 적들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천년 만년 누리리라
+) 여러 버전이 있는 모양입니다. 만수산 역시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라는 버전도 있다는군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 유명한 단심가가 나온 때가 이 때라고 합니다. 다만 고려사와 실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후에 사림이 발견했거나 추가한 것으로 보이네요.
그 날 밤, 고려 왕조의 단말마가 나옵니다. 장소는 선죽교였습니다.
박시백 화백은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상대는 고려의 군권을 한 손에 틀어쥔 최강의 실력자. 그럼 이성계를 상대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그건 결코 무리수를 둘 리 없다는 판단을 믿어서였다."
"그렇지 않다면 애당초 이성계랑 맞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무리수든 뭐든 쓰겠다는 결심이라면,"
"그깟 경호원 몇 명이 그걸 어찌 막을손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어디 어떻게 흘러가나 한 번 보자.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1392년 4월, 고려 최후의 보루는 무너졌습니다. 향년 56세, 개혁을 위해 왕을 버렸던 자, 하지만 고려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일어섰던 정몽주, 그는 이렇게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이제 최후를 향해 달려가게 되었죠.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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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이 마지막이 되겠군요.
뭐... 씁쓸하네요.
근데 진짜 이번 시리즈 주인공 누구인 거죠?-_-;
박시백 화백 얘기를 해서 말인데, 그렇게 안 까이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까인 게 이 부분입니다. 정몽주에게 알려준 변중량을 정치 철새로 묘사했거든요. 그것도 이리저리 계산을 다 하고 정몽주가 이길 거다고 하고 이성계를 배신했는데 정작 정몽주는 게임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갔으니... 지금 유통되는 건 수정본 (후손 분의 지적 받고 고친 거) 인데 원본 보니 제가 봐도 심하긴 했습니다. 뭐 그 이후로 거의 안 까이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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