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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23 16:46
저는 광해군의 심시티를 볼때마다 왕권강화라는 목적을 위해 궁궐공사라는 수단을 쓴 것이 아니라 건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네..건설 덕후의 건설에 관한 열정!!!! 바로 그겁니다. .....죄송합니다. 그럴리는 없겠지요.
11/10/23 17:12
오 이런건 몰랐습니다 전혀.
역시 아무리 외교방향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언행일치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지지받기가 힘들겠죠. 확실히 똑똑한 왕이었는데 이런 부분이 한계인건가요. 근데 또 임란 직후 조선이 얼마나 피폐했을지는 짐작이 가서 무리한 전쟁준비가 힘들지도 몰랐겠네요(근데 목숨이 달린 일이니 힘들더라도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네요) 게다가 이건 말이 안되겠죠. 피폐해서 국방비는 없는데, 궁궐 건축비는 있다면. 결국 광해군 스스로 반정의 빌미를 준건 분명히 있군요. 굳이 명에게서 거리를 두려던 그 모습 뿐이 아니더라도. 근데 이런 생각도 듭니다. 궁궐 무리하게 짓는 걸 안했다고 할지라도.. 과연 왕자리를 지킬수 있었을까 싶네요. 조선사람들 청나라 건국된지 백년이 지나도 은근히 업신여기고 이런게 기록 드러나는거 보면 사대라는게 상상이상으로 강력했던거 같아서요.
11/10/23 18:24
한 사학자(한명기)께서는 광해군의 궁궐 건축에 대한 집착을 광해군의 소심한 성격과 왕권강화에의 의지로 해석하고 계시군요.
임란 와중 소실된 궁궐 때문에 이러지러 거처를 옮겨야 했던 왕의 체면이 많이 깎였던 듯싶고요, 소심한 성격은, 적장자가 아닌 차자의 처지에서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고 이런 불안한 기반 위에 안팎에서 불어닥쳤던 광해군의 왕위에 대한 위협(반란)의 존재와 그 대응책으로 행한 행위(폐모살제)와 이 와중에서의 신료 간의 권력타툼이 왕의 정서상태를 불안정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일찍이 지관 이의신에게 몰래 말하기를 "창덕궁은 두번이나 큰일을 치러서 나는 머물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그것은 대개 노산군과 연산군이 폐위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신은 "고금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란들은 궁전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속히 옮길 곳을 점쳐야 합니다(천도론)"라고 했다. 왕은 이후에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광해군 5년 1월 기미)." 위에 제기된 천도론은 신료들의 강렬 반대에 부딫혀 실행되지 않았지만, 이후 추진된 광해군의 신궁 축성의지까지 신하들이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cf. 광해군의 궁궐 건축에 대한 서술은 논문의 표시된 페이지 기준 pp.185~193에 나옵니다). 이외에도 논문은 광해군에 대한 평가 전환의 연원과 기타 광해군 관련사항을 서술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www.dbpia.co.kr/search/search_total_dbpia.asp?sO=&sF=&sQ=&sP1=&sP1N=&sP2=&sP3=&sP4=&sP5=&sP6=&sP7=&sP8=&f1=&f2=&f3=&f4=&s1=&s2=&s3=&s4=&autoid=tot_all&A=&AA=&tsQ=%EA%B4%91%ED%95%B4%EA%B5%B0+%ED%8F%AD%EA%B5%B0&tsF=v_F0
11/10/23 18:29
글쎄요, 그 당시 상황에서 조선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으면 후금은 그걸 어떻게 볼까요?
수백년동안 명의 속국이었던 나라, 또 임진왜란때 명의 도움을 받은 나라가 병력을 모으고 군비확충하면 후금으로서는 조선이 명과 힘을 합쳐 자신들에게 대항하겠다는 징후로 인식할것 같습니다. 임란전의 대비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죠. 그때는 일본이 쳐들어오면 막아내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광해군으로서는 어떻게해서든 전쟁을 피하겠다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 당시 피폐한 조선의 상황에서 전쟁대비를 한다고 전력이 그다지 나아졌을것 같지도 않습니다. 궁궐공사하는것 못지 않게 백성들의 원성을 샀겠죠. 또한 실록의 부정적 기록은 서인들이 작성한 자료라는 점에서 필터링을 좀 해야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글과는 별개의 얘기지만 오항녕교수가 조선의 힘이라는 책에서 광해군 재평가 운운하며 무리한 궁궐공사를 비롯해 여러가지 실정?들을 묶어 광해군 깎아내리기 작업을 했었죠. 궁궐공사부분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하지만 그 외에 광해군을 평가하는 부분에서는 시각이 너무 편파적이고 비논리적인 내용이어서 짜증을 냈던 기억이 나네요. 마치 당시 쿠테타를 일으켰던 서인측의 대변인이 아닌가 싶더군요.
11/10/23 23:25
저도 경복궁 재건을 왕권강화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간택받아 오른 선조처럼 정통성부분에서 약했으며(적장자는 커녕 서장자도 아닌 차자 였으니깐요), 즉위직전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영창대군에 의해 밀려날 뻔하기도 했으니깐요. 그래서 임란으로 인해 실추된 왕의 위상과 함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군사력을 키울려고 해도 신하들이 극구 반대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누구들처럼 명나라만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 할 것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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