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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30 02:17:04
Name nickyo
Subject [일반] 사각 매트 위의 투쟁.

"후욱..후욱.."

-탁 탁 탁

객석의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멀어진다. 일정한 리듬을 타고 위 아래로 통통 튀어오르는 몸은 보통 사람의 둘, 아니 세배는 커 보이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도복의 넓은 깃이 펄럭임에 따라 마치 바람을 타고 순속의 춤사위를 펼칠 듯 유려한 모습이다. 전국체전 태권도 헤비급 대회 4강전. 모든 사람들이 왕좌의 자리에 어울리는 남자라 칭송한 사내는 지금 내 앞에 있다. 그러나 그는 호사가들이 말하듯 잔혹하고 난폭한, 마치 짐승같은 투로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축 늘어진 팔과 낮게 가라앉은 하체, 언제라도 가벼이 움직일 수 있도록 흔들거리는 어깨는 도저히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했다. 그는 커다란 성벽같으며,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전사였다. 그것은 절대 게으른 폭군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하루의 나태도 없이 오로지 나를, 혹은 우리 모두를 자신의 발 아래에 두기 위한 치열한 매일을 보낸 구도자의 것이었다.



-쉬익


정적은 몇 초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는 슬쩍 오른쪽 어깨를 튕기더니 왼발로 옆구리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머리속으로 훈련에서 상상하던 빠르기와는 너무 달랐기에 그만 제대로 막지 못하고 1점을 주고 말았다. 몸통을 가린 호구 아래로 묵직함이 가림없이 전해져왔다. 그때서야 나는 그 매트위의 투사로써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약하디 약한 내가, '승리'라는 것을 위해 저런 강자와 투쟁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4강에 들 수 없는 실력이었다. 그러나 남자라는 것은 결국 멍청하거나, 혹은 그릇 이상의 욕심을 품거나, 그럼에도 지기 싫어하는 것을 마음 속에 담는다. 모두가 이길 수 없다는 말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자 했다. 누구도 예선을 뚫을거라, 본선에 진출할거라, 그리고 여기까지 올라오리라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일생에 단 한번 남들의 비웃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불손한마음에 매일 다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샌드백과 미트를 찼다. 그런 나에게 미트를 대주며 관장님은 언제나 말했다.


"태권도는 무릇 자신의 도를 깨우치기 위한 수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도를 깨우친다 한들 약한 사람의 말은 남들에게 전해지기 어렵다. 그렇기에 태권도는 육체와 정신을 강건히 단련하여 강자로서 약자를 돕고, 강함으로 억압하지 않는 정신을 널리 알리는 무도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단순한 폭력일 뿐이다. 매일 이것을 되새기거라."


-씨잉!

오른발 상단 돌려차기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두 세발걸음 뒤로 물러서며 숨을 몰아쉬는 순간 명치부근에 날카로운 옆차기가 찌르고 들어온다. 간신히 몸을틀었더니 이번엔 다시 왼발 나래차기가 옆구리를 노린다. 도저히 막을수가 없어 앞발로 상대의 중단에 앞차기를 꽂았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그는 한 손으로 앞차기를 흘리며 나래차기를 접음과 동시에 그 회전을 살려 뒷차기를 날렸다. 당했다, 하는 순간 꽝 하는 소리에 가슴팍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심판이 벌리라고 소리치는 동시에 차가운 매트바닥에서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몰아쉬었다. 굉장하다. 정말 강하구나.


숨을 훅 몰아쉬고 일어났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기적같은 일이다만, 그렇다해도 지고싶은 마음이 없다. 이미 몇 번의 공방을 통해 상대가 훨신 세다는 것은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아랫배 언저리에서 울컥 하는것이 머리로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지고 싶지 않다. 지기 싫다. 이기고 싶다. 저 빈틈없이 강한 놈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고 싶다. 내가 승자이고 싶다!


"할 수 있겠나?"

"예"

-붙어!


시작과 동시에 맹렬하게 달려나갔다. 차고, 또 차고, 두번 더 찼다. 앞에 선 다리로 앞차고, 그대로 다시 찍고. 오른다리로 중단 돌려차기, 왼 다리로 중단 돌려차기. 그러나 그는 피하고, 또 피하고, 두번을 막은뒤에 앞차기로 들어왔다. 난 그것을 겨우 막아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을 놀렸다. 왼쪽으로 오는 듯 하더니 오른쪽을, 그리고 다시 왼발이 오나 싶더니 또 다시 오른쪽을. 이번엔 왼발일거라 생각했더니 한번 더 오른쪽을 찼다. 빠르게 접어차는 돌려차기를 팔로 막았다지만, 같은 곳을 세번이나 맞으니 팔이 얼얼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왼발을 차길래 동시에 오른발을 뻗었다. 상대와 나는 1점을 교환하며 뒤엉켜 넘어졌다. 갈려!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고르고 제자리에 돌아왔다. 남은 시간은 1분, 이대로라면 패배는 확정적이다. 그렇지만 저 쪽이 나보다 기술도, 속도도 빠르다. 이기려면, K.O뿐이라고 생각했다.


헤드기어를 쓴 사람을 K.O로 눕히려면 상단 차기가 아주 강하게 들어가야한다. 그러나 내 기술로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언가를 내 주면서 일격을 노릴 수 밖에 없다. 난 슬그머니 오른쪽 옆구리를 슬쩍 비웠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왼발을 날렸다. 내가 생각한 것은 첫번째 타격과 두번째 타격 사이의 간격을 노리는 것이었다. 전혀 가드하지 않은 호구 위로 왼발 돌려차기를 꽝 하고 맞는순간 호흡이 억 하고 멎었다. 그럼에도 어금니를 다시 빠드득 물었다. 발은 빠르게 돌아갔고, 그는 다시 왼발이 나오고있었다. 지금이다 라는 생각에 오른발로 상단 돌려차기를 후렸다. 그러나 내 생각보다 그의 왼발이 조금 더 빨랐다. 오른쪽으로 돈 내 명치 아래에 그의 돌려차기가 들어맞으며 나는 다시 앞으로 빙글 돌며 넘어졌다.


-갈려!


"미끄러진겁니다. 괜찮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상태를 보려는 심판을 향해 소리쳤다. 심판은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대련 시작을 선언했다. 포인트는 이미 절망적으로 벌어져있었다. 나는 같은 수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함이 들었다. 살을 내주며 뼈를 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이 정도의 기량차를 극복하려면 나도 같은 것을 걸어야만 했다. 이를 꽉 악물었다. 머리, 내가 저 머리를 노리는 것 처럼 나도 내 머리를 걸어야 한다. 나는 20초가 채 안남은 시점에서 마구잡이로 발을 찼다. 앞차고, 돌려차고, 앞차고, 돌려차고. 그는 여유있게 피했다. 일고여덟번을 내리 차고 숨을 훅 몰아쉬었다. 그 때,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앞발을 높이 들어 찍으려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한 아름다운 곡선이 눈 앞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역전이 가능한 순간이었다. 눈앞에 그의 발 뒷꿈치가 벼락처럼 떨어지는 그 순간 상체를 홱 하고 돌렸다. 그의 발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회전력을 이용해 그의 턱에 뒤후려차기를 꽂았다. 콰-앙! 하는 묵직한 소리와 찌르르 한 느낌이 왼쪽 발 뒷꿈치에 전해져왔다. 그는 그 공격과 동시에 옆으로 나뒹굴어 떨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와-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그는 몇 초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났다. 남은 시간은 3초, 분명히 내 발차기는 들어갔다. 그는 놀란 눈치로 나를 바라보았고,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럼에도 서 있었다. 3초는 금방이었다. 포인트는 무려 4점 차이. 결국 난 패배하고 말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전국체전 우승을 하며 가장 위기였던 적을 나와 대전한 4강전이라고 말해주었다. 의식이 날아가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고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채 마지막까지 서 있었다고 말했다. 그 인터뷰를 전해들은 나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함이라고 해야할지, 후련함이라고 해야할지. 그는 나보다 훨씬 더 커다란 무게를 짊어지고 승부에 나섰던 것일까. 어떤것이 마지막에 그를 서 있게 했던걸까. 나로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나보다 강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겁쟁이였지만, 참 '센 놈'이 되고 싶어했던 나는 맞고만 사는 아이를 졸업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 때 비로소 나의 치기어린 '어린 시절'도 끝이났다.



눈매가 험하고, 인상이 좋지 않다고. 키가 크고 덩치가 크다며 시비가 붙을 때마다 움츠려 맞는 내 자신이 싫어서 시작한 태권도였다.
그러나 그 대회를 계기로, 나는 노력이 가져다 주는 변화가. 땀방울이 승리로 변할때의 환희가. 인내가 소용없는 패배의 아픔이. 그리고 이 모든것을 도전할 열정과 세계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때때로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며 당신이 손가락이 부러짐에도 불구하고 분투한 대회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때가 생각난다. 정강이에 금이 가도, 발 등이 퉁퉁 부어도 싸우려 하는 친구들이 그 곳엔 있었다. 상대와 때리고 맞고 고통을 나누어 승리와 패배를 가른다. 그럼에도 상대를 깊이 미워하지 않게 되는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들을 힘껏 부딫혀, 그 공정한 단 한가지의 기준 아래 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정말 오래 된 이야기로, 발이 허리춤 까지 밖에 올라가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 사각 매트위에서 다시금 춤추고 싶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그런 순수한 승부가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음을 아쉬워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지금 나름대로 삶의 승부처를 다시금 찾아 싸우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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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실화인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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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30 09:47
수정 아이콘
어떤 형태로든 살아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싸우게 되는 것 같아요...결국 그 대상은 늘 자기 자신이고요. [m]
Noam Chomsky
11/08/30 11:1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11/08/30 11:34
수정 아이콘
굉장한 글이로군요. 읽으면서 괜히 제 왼손에 힘이 꽉 들어갔습니다.
멋진 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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