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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29 07:19:34
Name
VKRKO
Subject
[일반]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BGM : H.O.T. - 아이야! Rock Ver. From 99's Live Album
1999년.
IMF 금융 위기로 나라는 휘청거리고 있었고, TV에서는 세기말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 멸망 예언에 관해 떠들어댔던 해였다.
그리고 그 해 6월의 마지막 날.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다.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의 대참사였다.
수많은 사고들은 사고 후 인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뒤늦게 그 원인을 알게 된다.
씨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6년까지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의 부지에는 양어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씨랜드 수련원의 원장이 되는 박재천은 96년 양어장을 임대한 뒤, 용도를 수영장으로 불법 변경한 후 수원시에게 벌금을 납부하고 허가를 받게 된다.
98년 박재천은 1층 콘트리트 건물에 무려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3층짜리 건물을 급조해냈고, 그 해 2월 화성군에서 청소년 수련시설 용도 변경 허가를 받아낸다.
이 건물 구조는 화재 당시 큰 걸림돌이 되었는데, 컨테이너의 가연성 소재로 인해 유독 가스가 발생했고 상층부의 무거운 컨테이너를 견디지 못해 결국 건물이 붕괴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박재천은 화성군수를 비롯한 화성군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어 불법 영업을 무마했고, 지역 언론사에게 뇌물을 줘서 불법 영업이 공론화되는 것을 막았다.
이 와중에 97년 화성군은 불법 영업을 이유로 박재천을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 사건은 2달 뒤에 무혐의 처리되고 만다.
그리하여 99년 3월부터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은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99년 6월 30일, 사건은 일어났다.
화재 당시 씨랜드 수련원에는 모두 544명이 있었다.
서울 소망유치원생 42명, 안양 예그린유치원생 65명, 서울 공릉미술학원생 132명, 부천 열린유치원생 99명, 화성 마도초등학교 학생 42명 등 497명의 어린이와 인솔교사 47명이었다.
불이 처음 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은 오전 12시 반.
학생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무렵, 수련원 2층 C동 301호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301호와 그 옆 방 302호에는 서울 소망유치원에서 온 아이들 19명이 자고 있었다.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인솔 교사 8명은 그 시각 맞은편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이들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만을 챙겨 건물에서 달아났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아이들이 연기에 질식하고, 불에 타 죽는 상황이었는데도.
씨랜드 수련원 사건은 생각보다 많은 의문을 남긴 사건이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화재의 원인이다.
당초 발표 내용에서 나왔던 화재의 원인은 모깃불이 가연성 소재의 수련원 바닥에 엎어지면서 화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여러 실험을 거친 결과 모깃불로 인해서는 화재가 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며 이 가설은 부정되었다.
그로 인해 전기 누전이 화재의 원인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결국 이 사건은 정확한 화재의 원인마저 밝혀지지 않은채 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화재가 난 후에도 의문은 계속 된다.
화재 신고가 처음 접수된 시간은 1시 40분.
화재가 일어나고 나서 무려 1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게다가 화재 현장인 씨랜드 수련원과 화성 소방서의 거리는 70km.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시간은 2시 30분이었고, 건물은 완전히 화염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553명의 소방 인력과 70대가 넘는 소방 차량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사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었다.
씨랜드 수련원에는 화재 경보기와 소화기 9개가 비치되어 있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불량품이었다.
당시 화재 목격자들의 증언과 묘사는 그야말로 생지옥을 뜻하는 것이었다.
건물 밖에서 화재를 목격하고 신고한 이들의 증언은 불에 타면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비명이 고스란히 들려왔다고 전한다.
화재 현장이 전소된 후 시체의 수습이 이루어졌지만, 어린 유치원생들의 골격은 거센 불길에 이겨낼만큼 강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시신은 불에 녹아내린채 몇 개의 뼛조각만을 찾아낸 것이 전부였다.
불이 처음 났던 301호에는 아이들 18명의 시신이 모두 창가에 바짝 붙은 채 발견되었다.
아이들은 문 쪽에서 난 불을 피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한 채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유가족들은 약 2억 2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아이들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유치원생 19명, 대학생 강사 3명, 교사 1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정부는 이 사건 이후에도 내장재를 불연재나 난연재로 바꾸는 법안을 추진하지 않았고, 이는 4년 뒤 대구에서 더욱 끔찍한 참사를 낳게 된다.
사건 발생 후 10년이 지난 2009년에도 청소년 수련원의 8%는 여전히 소방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어린이 사고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3위다.
그리고 그 모든 변하지 않은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씨랜드 수련원의 원장이었던 박재천이었다.
사건 이후 5년간 복역하고 교도소에서 나온 그는 지난 2009년 씨랜드 수련원이 있던 자리에 불법 방갈로촌을 세우고 최근까지 영업을 계속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이 화성군에서 화성시로 바뀐 관할 담당 부서는 관련 민원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
씨랜드 참사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재였고,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아이들이 희생당한 끔찍한 사고였다.
사건 3달 뒤, 당시 최고 인기의 아이돌 H.O.T.는 아이야! 라는 곡을 발표한다.
이 노래의 가사 중 일부를 아래에 남기는 것으로 이 끔찍했던 사고의 기억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그래 우리가 만든 헌장대로 지켜진게 뭐가 있는가?
그들은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보호받지도 못하고
타고난 권리조차 지켜주지 못했고
그래 언제까지 이 따위로 살텐가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며 살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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