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입힌 사람은, 상처를 입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찌꺼기가 남는다. 라고 얼굴이 시뻘개진 친구가 소주잔을 눈 앞에서 흔들흔들 거리며 말했다. 난 그러냐며 다 식어빠진 해물파전을 뜯는다.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그리움을 허공에서 술잔으로 쫒는 친구 앞에서는 그저 끄덕여 줄 뿐이었지만, 두 번 생각해도 그럴리 없다- 고 생각했다.
많은 이야기들을 잃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 없는 나날들. 큰 자극도 기복도 없지만 조금씩 무언가 쌓아가는 날들은 여러가지 마음들로부터 평화를 찾아다 주었다. 커피를 싫어하는 내가 바리스타가 된 것도 좀 우습고, 아직 하고싶은 다른 것들도 많고, 둔해져 가는 현실감각과 다르게 찾아오는 빠른 시간이 지난 사람들을 차분히 잊혀지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나날들에, 처음 만났던 여자아이에게 뜬금없는 연락이 왔다.
설레거나, 당황스럽거나 보다도 참 반가웠다. 10대를 함께 보낸 사람의 사는 소식이란 좋든 나쁘든 아련하다. 뭐하고 사냐길래, 법관을 준비하는 그 애 에게 커피를 내린다고 했더니 좋겠단다. 부럽단다. 미래의 변호사님이 왜그러냐며 능청을 떨자, 놀러가도 되냐고 했다. 커피 한잔 팔아주면 고맙다는 말에 금세 가게를 찾아오더라. 같은 서울 안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행동이 빠른 아이였나 싶었다.
가게가 끝날 늦저녁에 방문한 손님은 몇 년만에 만난게 어색하지도 않은듯 시시콜콜한 많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만난 남자들이라거나, 이제는 질려버린 연애라거나. 공부가 힘들다는 푸념이나 가난해 죽겠다는 울상. 그리고 그때는 너무 아파 건드리지 못했던 숨긴 이야기들을 조금씩 꺼내어, 그땐 그랬지 하며 웃었다. 머리속 한 켠에 정말로 이 친구는 내 안에서 화석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런 돌덩이같은 그 애의 눈빛은 그럼에도 시시각각 변했다. 때로는 그렁이다가, 반짝이다가, 멍하다가, 마주치다가.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눈과 함께 그녀는 네가 계속 좋은 사람이라서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몇 년이나 지난 일들에 대해 사과하고, 또 다시 고마워하고, 또 사과하였다. 나는 괜시리 무안해져서 그러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가 기억도 못할 많은 일들에 대해 사과했다. 미안해. 거짓말 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어렸어서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서 미안해. 그렇게 떠나버려서 미안해. 아직도 너한테 찾아와서 미안해. 자꾸 널 기억해서 미안해.
조금 더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친구에게, 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려주었다. 솔솔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 사이로 그녀는 차라리 지금 널 처음 만나는 거였더라면...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화석이 되어버린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흘러넘기며 몇 가지 바보같은 이야길 했다. 그녀보다 한참 적은 양의 연애이야기나, 최근 일어난 술자리의 진상짓이나 혹은 가게 손님의 흠집같은것을 투덜대며. 우리는 다시 킥킥대며 웃었고, 그녀는 약간의 커피를 잔에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갔다. 늦었으니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 준다는 내 말에, 이제는 안그래도 된다며 활짝 웃었다. 지금 따라오면 안된다고 했다. 이제까지 너무 하찮게만 여겨진 싸구려 사랑들때문에 널 친구로 내버려 두기가 힘들다면서. 나는 돌아서지 않는 그 아이에게, 넌 예전에도 그랬지만 꼭 한마디가 많아. 하고 웃었다. 그거 나쁜습관이라고 쏘아붙이는 내게 그 아이는 예전같았으면 어어어어 하며 넘어올 자식이 능글능글 징그러워 졌다며 재수없다는 가운데 손가락을 번쩍 치켜들고는 총총거리며 돌아갔다.
몇년이 지났음에도 익숙한 그 뒷 모습에, 문득 몇 년전에 나는 그 애에게 대체 무엇이었냐며 오열하던 내가 떠올랐다.
참 커다랗게 마음을 찢었던 그 아픔은 두려웠던 것 만큼 길게 남지 않았고, 꾹꾹 웃어낸 나는 그 애 앞에서 끝까지 좋은 사람이 되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만났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후에야, 내가 잊어버린 많은 것들에 미안해했다.
남겨진 찻잔을 덜그럭 거리며 씻는 동안, 우리는 타이밍이 좀 안맞는구나 하고 피식 웃었다.
아파하지 않았을 거라고 미워했던 일을 사과했다면, 넌 조금 가벼워졌을까.
좋은 사람으로 남은 것에 대해, 처음으로 잘 한 일이라고 마음 속 깊이 다행이라고 느꼈다. 슬픔도 미움도, 침묵을 지난 자리에 사람을 잃지 않았음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