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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08 12:32:37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정유재란 - 6. 명량, 천행
bgm은 이번에도 영화 천군 ost입니다.
VIDEO
천군 엔딩 부분 추가해 놓으니 보세요 ^^ 불멸의 이순신보단 이게 나은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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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측의 규모
조선 수군 13척의 명단 중 확인 가능한 건 다음과 같습니다.
통제사 좌선 - 이순신
경상우도
미조항첨사 김응함 영등포만호 조계종 안골포만호 우수 거제현령 안위 평산포대장 정응두
전라좌도
조방장 배흥립 회령포만호 민정붕 발포만호 소계남 녹도만호 송여종
전라우도
전라우수사 김억추
여기서 김경진님은 전라우도에 가리포첨사 이응표와 해남현감 류형을 추정해서 덧붙이시더군요. 이응표의 경우 명량해전 후에 뜬금 없이 경상우수사에 제수되는데 (선조가 원균을 구하지 못 했는데 뭔 공이냐며 잘라버립니다 -_-) 이것 때문인 듯 하고 류형은 칠천량 이후 이순신을 모셨다고 하는 기록 때문인 듯 합니다. 일단 제 능력으로는 이 이상 찾기는 힘드네요. 류형 같은 경우는 명량해전 이후에도 그 해남에서 벌어진 일인데 정작 다른 장수들을 보내는 경우가 많고 아예 일기에 류형이 언급이 안 되다시피해서 그냥 추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통제사 상선에서 강진현감 이극신이 탔고, 순천감목관 김탁이 전사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순천 부사 우치적도 상선에 탔을 거라고 추측되며, 현감, 부사가 상선에 탔는데 정작 만호부터 대장까지 판옥선을 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칠천량 이후 자기 배를 보존한 장수는 판옥선을 따로 이끌고 나머지 판옥선이 없는 지휘관들은 상선에 일개 사수로 탄 듯 합니다.
휴 -_-; 딱 13척 참전한 것도 이렇게 참전 장수들 찾기 어려운데 칠천량에 참전한 130척이 넘는 장수들을 찾아내고 있는 소설 임진왜란 공저자 분들은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간양록에는 일본의 각 나라와 다이묘들을 설명하면서 주석을 붙이는데 이 중 배로 무안에 간 자들(舟至務安)이라는 주석을 통해 당시 수군 소속이었던 다이묘들, 즉 명량 해전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되었을 다이묘들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구루지마 미치후사(이순신에게 죽은 자로 나옴)가 있고 육군 출신이었던 하치스카 이에마사, 나카가와 히데나리도 포함돼 있죠. 여기에 군감으로 참전한 모리 다카마사, 후쿠하라 나오다카가 있습니다. 재밌는 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 명단에 없네요. 추가로 이케다 히데우시(히데오?)도 간양록에 배로 진도에 갔다가 배 위에서 죽었다고 돼 있습니다. 이게 병사라고 하는데, 그 병력도 해전에 참가했다고 봐야 될지는 모르겠네요.
+) 김경진님이 임진왜란에서 와키자카가 패할 것 같자 아예 퇴각하라고 하는데 그게 여기서 비롯된 듯 합니다.
여기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간 다쓰나가, 하타 노부토키가 포함됩니다. 당시 일본의 수군이 모두 나온 것이고, 거기에 육군인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나카가와 히데나리의 병력까지 충원되었죠.
+) 이들이 직접 참전했는지 병력만 지원했는지는 설이 엇갈리는 모양입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병력의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난중일기 초본에는 이 중 130여척, 이충무공전서본에는 333척,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는 200여척, 난중잡록에는 수백척, 기타 연려실기술이나 이항복의 백사집에는 500~600척이라고 적고 있죠.
행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난중일기에 맨 처음 적혀 있던 게 200척 중 130여척이라고 하는데, 200여척이든 500~600여척이든 많은 수긴 하나 편차가 너무 심하죠. 거기다 강항은 잡혀서 무안으로 갔을 때 600~700여척의 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명량해전 이후에도 이 정도의 배가 남아 있었다면 역시 적 선봉을 조금 꺾었을 뿐이라는 선조와 일본측 시각이 맞는 것일까요?
+) 말이 같은 걸 보면 역시 둘은 같은 편이었나 봐요.
겨우 무안까지 가려고 이 많은 배들을 모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 수군 격파 후 바로 한양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바로 충청도와 경기도를 공략 중인 이들에게 보급하는 목적으로 집결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 중 적 전투선의 규모는 역시 난중일기에 기록된 130+a 입니다. 다른 기록에 있는 것들은 수송선도 전선이라고 포함한 거겠죠.
저번 편 마지막부터 인용하고 있는 사진의 출처는 이글루스 hyjoon님의 블로그입니다. 명량 해전의 위치 등 자세한 것을 보고 싶으시면 다양한 설들을 담고 있으니 괜찮을 듯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보죠.
2. 결전
- 이순신의 몸은 고문과 슬픔으로 인해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배 타기도 힘든 몸이었고 서 있다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죠.
- 그는 수군을 추스리면서 적 점령지 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언제 전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죠.
- 조정은 통제사로 다시 앉히면서 품계를 여전히 정 3품 절충장군으로 해서 명령체계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 배설은 교서에 숙배하지도 않고 반항하고 도망가면서 오히려 분위기를 흐트려 놓았습니다.
- 그 부하 장수들도 도망가고 겁을 내서 단 몇 척이 쳐들어와도 이순신이 직접 막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 경기 수군, 충청 수군은 물론 근처의 임치첨사의 병력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병력은 단 13척이었습니다.
- 전라도의 육지 대부분은 함락되었고, 피난민들이 이순신을 따라다닐 정도로 이겨도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 위에서 저 중 절반 이상이 수송선일 거라고 추측했지만, 과연 그 때 그 사람들에게 "전선은 겨우 백 척 쪼끔 넘네"라고 생각하라고 하는 건 무리입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머리에는 삼백척 이상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실록에 인용된 약간을 빼면 장계는 소실되었고, 현장에 있던 난중일기를 통해 그 자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적선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들어온다고 했다."
+) 명량을 거쳐라는 말에 대한 해석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이렇게 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무리가 부족한 것을 스스로 헤아려 문득 회피할 계책만 강구하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으로 나가 있었다."
+) 원래 작전이 어찌했든 아군은 적을 상대할 생각을 차마 못 했습니다. 특히 김억추는 2마장, 800m 바깥으로 나가 있었죠. 애초에 이것이 상선이 가장 전투력이 강하기에 선봉에 섰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 전후의 기록에서는 그런 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급히] 노를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포, 현자포 등의 총통을 어지럽게 쏘아 대니 탄환은 폭풍우같이 휘몰아치고, 군관들이 삼대처럼 총총 배 이에 늘어서서 화살을 마구 쏘아서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났다 하는 것이었다. 둘러싼 것이 여러 겹이어서 형세를 측정할 수가 없어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대경 실색하는 것이었다."
+) 애초에 이게 작전이었다면 "급히"라는 말이 나올 수 없었겠죠. 적은 이 한 척을 상대하지 못해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적의 수는 많았고, 상선의 병력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으나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테니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 적에게 사격하라고 했다."
+) 결국 상선이 선봉으로, 유일하게 싸우고 계속 적을 막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 하나, 이순신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죠. 혼자서 130척을 막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전 칠천량 편이 생각나실 겁니다. 칠천량에서 김완은 단독으로 적을 막아내다가 끝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번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혼자 있던 장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이었습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리라고 군령을 내리고자 하나 여러 적들이 물러나는 틈을 타고 대어들 것이므로 진퇴유곡이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라고 명령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나의 배에 접근했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도 다가왔다."
+) 잠시 배를 물리기도 힘들 정도로 적이 계속 다가오는 상황, 하지만 상선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군을 부르는 초요기를 세우자 김응함과 안위가 다가옵니다. 먼저 온 것은 안위였죠. 이 때 김억추의 배는 멀리 떨어져서 "가물가물"했다고 합니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느 곳에서 살 것이냐?] 라고 했더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어찌 죄를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고 했다. 두 배가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령을 내리니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므로 안위 및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중략) 거의 힘이 다 하게 되었다."
+) 부끄러움, 혹은 무서움이었겠죠. 하지만 이것은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안위의 배가 단 두 척을 상대하다가 힘이 다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통제사 상선과 안위의 배가 병력 차이가 얼마나 났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판옥선은 단독으로 맞붙는데는 이 정도가 한계였던 듯 합니다. 이 때 격군들 7~8명이 바다에 뛰어들 정도로 안위는 수세에 몰린 것 같습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들어가 빗발치듯이 마구 쏘아 댔더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다 섬멸되었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하나도 몸을 움직이지 못 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중략) 적장 마다시라고 했다.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 자가 마다시라고 말하는 고로, 즉각 명령하여 토막을 내어 자르게 하니 적의 기사게 크게 꺾였다."
+) 한 숨 돌린 상선은 곧바로 돌격해서 안위를 구하고, 적 세 척을 섬멸합니다. 여기에 송여종과 정응두가 마침내 합세했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저 세 척, 혹은 그 직후에 적장의 배가 격침되었고, 적장 마다시가 바다에 떨어졌다는 거죠. 저 마다시가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맞다면 안위와 김응함이 투입되기 전에 이미 휘하 함대가 소수만 남았을 정도로 전멸했다는 것입니다. 상선이 혼자 싸우고 있는 동안에요.
때문에 이순신은 이례적으로 적장의 목을 베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토막내어 돛대에 걸죠.
"여러 척의 배들은 적이 범하지 못할 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가지런히 나아가 각각 지자포, 현자포를 놓으니 그 소리가 산천을 진동시키고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선 31척이 부서지자 적선들은 피하여 퇴각하고 다시 접근하지 못 했다."
+) 이렇게 난중일기 상에서 명량해전은 끝납니다.
3. 다른 기록들에서의 명량 해전
1) 난중잡록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여기서는 내도수,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적장으로 보고 있으며 피난민 백여 척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재밌는 건 이순신이 일부러 적을 끌어들였다는 쪽으로 말 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탈출한 건 겨우 10여 척 뿐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2) 실록
명에 보내는 조선군의 전과에 포함돼 있는데 여기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31척 격침을 20, 11척으로 나누고 있는데, 역시 이순신이 혼자 싸웠다고 하는 것은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다만 김억추, 배흥립, 안위 등과 군세를 정돈한 후 (중간 과정을 건너 뛰고) 힘껏 싸워 20척을 깨뜨리고 정응두, 송여종이 합세해서 11척을 깨뜨렸다고 할 뿐이죠.
한편으로 전풍상이라는 병사가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왜장 산도의 포로가 되었다가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인 진역군리에 갔다가 돌아왔고, 산도가 하동에서 순천, 흥양을 거쳐 우수영 앞바다에서 통제사와 교전 후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 도도 다카토라의 관직이 사도노카미였으니 이게 산도가 아닐까 생각되고, 산도의 고을이라는 진역군리에서 진을 뺄 경우 역군리가 되는데 이게 당시 다카토라의 영지였던 이요 쿠니와 얼추 비슷합니다. (이요쿠니 이욕쿠니 역쿤리 역군리 흐음...) 다만 이게 일본의 국도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이라고 해서 의문이지만요. 이요 쿠니는 시코쿠의 서쪽에 있거든요. 일개 병졸이니 큐슈의 나고야성 등을 일본의 수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충무공전서의 경우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닻을 내려서 물살을 견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징비록과 수정실록의 경우 전장을 벽파정 아래로 잡고 있구요. 연려실기술의 경우 31척을 격파한 후 그 기세를 타고 전진하니 적이 도망갔다고 하고 있죠. 저녁 6시경까지 싸우다가 바람이 잘 불어 해협을 빠져나가 도망갔다고 하죠.
4) 일본 기록
고산공실록에는 5시에 전투를 시작해서 적을 습격하려고 하니 우수영 쪽이 아닌 진도 쪽 벽파진에 정박하고 있었고, 물살 때문에 대형선을 피하고 중형선 세키부네를 돌입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선군은 계속 버티고 있었고, 일본군은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전사했고, 그밖에도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세키부네에서 경비선으로 옮겨 탔는데 조선 수군이 낫을 걸고 활과 조총을 쏘아 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고 하죠. 이 때 도도 다카토라 휘하의 두 장수가 겨우 구했다고 하고 도도 다카토라 역시 손에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4. 장소는 어디인가?
1) 우수영 앞바다?
명량해전의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논란 중입니다. 자세한 얘기 및 추정은 hyjoon님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구요.
대표적으로 전장으로 추측되는 곳은 현재의 진도대교 바로 뒤부분입니다. 혹은 거기서 약간 뒤로 물러선 곳이죠. 진도 대교 바로 뒤로 툭 튀어나온 부분 있죠? 그 해역 부분까지가 현재의 추정입니다. 다만 이게 애매한 것이 난중일기에서 어색한 부분이 있다는 거죠. 거기다 명량 부근의 유속은 9에서 11노트 수준으로 여기서 전투가 정말 가능했을지, 즉 조선 수군이 여기서 버틸 수 있었을지도 의문인 거죠.
시작부분에서 이미 "명량을 넘어서"라고 돼 있으며, 흔히 말하는 명량의 좁은 길목은 "적이 아군을 포위했다"고 하기에는 어색합니다. 이것 때문에 임진왜란 해전사에서는 새로 우수영 앞바다가 전장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적이 "해협을 넘어서 아군을 포위한" 게 들어맞으니까요. 덤으로 우수영 포구에는 적을 막기 위한 포구가 설치돼 있으니 이게 실제 쓰였든 아니든 이것을 통해 철쇄설이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구요. 명량이라면 몰라도 우수영 앞바다라면 적이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도 있구요.
문제는 당시 기록들에서 조선 수군이 아예 명량 넘어 벽파진에 주둔하고 있었다느니, 벽파진에서 적을 깼다느니 하는 기록들이 나오고, 이충무공전서 등에는 아예 명량에서 닻을 내리고 있었다느니 하는 기록들이 있다는 거죠. 우수영 앞바다일 경우 적이 코 앞까지 다가 온 상황에서 급히 출격해서 요격했다고 하니 이것은 전날에 이미 전투를 각오하고 회의를 했다는 것과 배치되기도 합니다. 즉 난중일기의 "명량을 넘어서"를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죠. 또한 이렇게 될 경우 난중일기의 다른 부분과는 또 어색해집니다. 우수영이 바로 뒤에 있는데 아군이 물러설 수 있었을지, 특히 먼 바다로 물러선 데다가 김억추는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멀리 도망갈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죠.
결정적으로 우수영 앞바다에서 단독으로 싸웠다면, 일본 수군은 "명량의 유속이고 뭐고" 130척이 상선 한 척을 완벽하게 포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지형이고 뭐고" 유리한 점 하나 없이 그냥 적에게 맞서 싸웠다는 거구요. 만약 적이 이순신의 상선 포위하면서 후퇴한 아군에 한두척만 보내도 칠천량이랑 같은 꼴이 날 수도 있죠. 에... 빠심에서는 이게 맞지 않나 생각하긴 하지만요.
이런 점에서 우수영 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봅니다.
2) 전장은 어디까지일까?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백사집 등에는 공통적으로 해류가 바뀌자 아군이 진격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수영 앞바다 설이 맞다면 이 경우 진격은 명량 근처까지로 제한되겠죠. 하지만 전장이 현 진도대교 근처나 후방 어느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진격은 명량을 넘어서 벽파진 부근까지 갔다고 봐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사료에서 나오는 벽파진에서 진을 쳤다느니 벽파진에서 적을 깨뜨렸다느니 하는 게 들어맞죠.
특히 봐 둬야 할 것이 도도 다카토라와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위험에 빠졌다는 부분입니다. 총대장이 후방에 위치해야 된다는 것은 상식이죠. 또한 군감은 아무리 전장을 감독한다 하더라도 히데요시급으로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물에 빠지고 배를 갈아타야 됐다는 것은 조선군이 진군한 결과여야 가능합니다. 실제 낫을 걸어 배를 끌고 공격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일본이 공격 중이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죠.
즉 처음 전장이 어디였든 조선 수군은 명량을 넘어 최소 벽파진 수준까지 전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5. 전과 - 31척?
거의 한나절에 걸친 전투였는데 전과는 단 31척이죠.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모두 어마어마한 전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신뢰하고 있던 난중일기를 의심해야 되는 상황이죠. -_-;
간양은 적장 내도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여기서 전사했다고 하고 있으며, 간 다쓰나가, 하타 노부도키도 전사했다고 합니다. 이 간 다쓰나가의 병력 중에 간 마타시로가 있는데 이게 적장 마다시가 아닐까 하는 설도 있죠. 고산공실록에는 군감이 세키부네에서 경비선으로 갈아탔고, 위험에 빠져 도도군이 구해줬다는 말이 있죠. 간양록의 경우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선수(수군)과 가로(가신)의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아가 도도 다카토라조차도 부상당했죠. 애초에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간 다쓰나가가 전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 함대 자체가 완전히 궤멸됐다는 걸 뜻합니다.
도도 다카토라와 모리 다카마사의 병력이 130여척에 포함돼 있고, 이들이 전투선의 전부일 경우 전투 후반 이순신의 공격은 적의 수송선에 대해서도 가해졌을 것입니다. 아마 이 때문에 퇴각한 거겠죠. 반대로 이 130여척이 선봉 부대이고 다카도라의 본진이 따로 있을 경우 참전한 일본 수군은 130여척 이상이며, 200척이 넘을 수도 있죠. 후반의 공격은 이들에 대한 공격이었을 겁니다.
어떤 쪽으로 보나 조선 수군의 공격이 교전한 상대가 이 130여척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난중일기 및 장계에 나온 31척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제까지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임진왜란 해전사 편에서 자세히 설명했지만, 이순신은 장계에 확실하게 깨뜨리고 아예 불태운 것만 보고하고 있죠. 옥포해전의 경우 다른 기록 및 일본에서도 피해를 50척 수준이라고 하고 있지만 장계에서는 겨우 26척입니다.
한산도 대첩의 장계에서 보면 장수 하나가 한 척씩 맡아서 아예 묵사발을 내서 가라앉히던가 나포하는 경우만 전공으로 치고, 나머지는 "헤아릴 수 없는 적이 죽었다"는 식으로 적고 있죠. 명량해전도 마찬가집니다. 20척을 깨뜨렸는데 사살이 매우 많았다느니 하고 이러면서 수급을 "8급이나 베었다"는 것은 전형적인 이순신의 방식입니다.
즉 이 31척은 확실하게 깨뜨리고 침몰시킨 수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이전 편에서 적었듯 당시 목선을 가라앉히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겨우 13척밖에 없는데다 단독으로 적과 맞서 싸우고 있는데 한 척 한 척 침몰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죠. 전투원 없이 바다에 떠다니거나 격군과 소수의 병력만 남은 채로 도주하거나 해류에 밀려난 것들은 모두 제외했다는 겁니다. 이후의 추격 과정에서도 눈 앞에 여전히 적선이 수백 척이 있는데 한 척씩 한 척씩 정성들여서 잡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였죠. 더욱이 전투 후 조선 수군은 무안 쪽으로 후퇴합니다. 전장에 남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어느 정도 피해를 줬든 아예 반파에서 전투불능에 이르렀듯 확실히 잡지 않으면 계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순신의 방식이었죠.
어쩌면 장계에 나오는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것은 많다는 것을 뜻하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 셀 수가 없어서 숫자를 안 적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_-; 명량의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하나하나 세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김경진님은 전과를 일부러 축소하고 난중일기에서도 일부러 이렇게 그렇게 적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하시지만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나온 난중일기에서는 아군이 모두 모여서 진격할 때 31척을 깼다고 해서 130여척을 정리한 후의 전과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록에 인용된 장계나 초고 난중일기에서는 "아군을 포위한"과 정응두, 송여종이 온 후의 전과라고 해서 130여척과 싸우는 상황에서 나온 전과로 보입니다.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죠.
6. 여러 가지 속설들
대표적으로 나오는 것이 역시 철쇄설이죠.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도 나오고 명량에서도 나오고 거의 진짜 있었던 일처럼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나오는 것은 택리지와 김억추의 기록인 현무공일기 뿐으로 택리지의 경우 "임진년"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명량으로 가다가 일어난 거라고 하고 있습니다. 현무공일기의 경우 김억추가 그 엄청난 용력으로 철쇄를 걸었다고 하죠.
어느 쪽이든 확실한 근거가 없고, 전설 수준입니다. 당시 상황만 생각해도 이순신이 회령포에 도착해서 명량해전이 벌어진 건 겨우 한 달로 이 기간 동안 철쇄를 걸 시간은 없다시피합니다. 그 전에 건 거라면 이순신은 그 엄청난 예지력으로 경상도 바다에서 싸우는 동안 전라도의 끝 울돌목에 철쇄를 걸었다는 게 되겠죠. 그 거센 물살을 이기고 철쇄를 설치하는 인력과 시간, 실제 전쟁 중에 철쇄를 움직이는 인력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오죠.
당시 포구에는 철쇄나 돌에 구멍을 뚫어 밧줄을 넣어서 바다에 가라앉혀 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비교적 좁은 군사 목적의 포구니까 건 것이죠. 그것도 여유 있을 때 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과 명량이라는 해협을 비교하기는 힘들죠. 아마 여기서 나온 전설이 아닐까 합니다.
비슷하게 나온 것이 바로 강강수월래 설이죠. -_-; 역시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왔죠. 글쎄요. 명량해전은 낮에 벌어졌습니다. 적의 병력이 많다고 오해하기도 힘든 상황이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바다가 아닌 이상 병력도 남아도는데 가서 치는 게 낫죠. 실제 명량해전 전후로 광주, 나주 등은 물론 우수영도 함락당합니다.
난중잡록에서부터 피난선 백 척이 뒤에서 허장성세를 했다고 하지만 난중일기에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을지는 의문입니다. 적은 이미 아군의 병력을 알고 있었죠.
이 모든 것들은 명량 해전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전투였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겠죠. 거기다 행주대첩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이렇게 군인과 백성들이 함께 싸우기에 이겼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는 정말 자주 쓰이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순신 장군과 그것을 돕는 백성들, 이런 점에서 강조되었을 것입니다.
7. 정리
이후 조선 수군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서해로 진입해서 북상하고, 일본군은 무안에 이릅니다. 일본에서는 명량해전의 의의를 축소하는데 보통 선봉만을 꺾었을 뿐이고 이후 일본군의 철수는 애초에 한양이 목표가 아니었고 겨울이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하죠.
정말 선봉만 꺾인 수준이라면 충청도로 올라간 조선 수군과 다시 전투를 벌일 만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오히려 한 달도 안 돼서 철수하죠. 일본군의 점령지에는 분명 나주 등 전라도 서남해가 있었습니다만 이후 순천까지 극도로 축소됩니다. 그리고 정유재란에서 더 이상 수군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계속 공격받는 동안에도 일본 수군 장수들의 이름은 없죠. 노량해전에서 볼 수 있듯 아예 육군의 다이묘들이 직접 수군으로 바꿔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이라는 조직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 이상 이를 설명하기 힘듭니다.
또한 후퇴가 애초에 계획된 것이었고 서해로 진입하는 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면 애초에 600~700척의 대함대가 무안으로 간 이유도 찾기 어렵습니다. 영산강을 통한 보급을 원했다고 하기에는 일본군은 영산강도 포기한 채 후퇴하죠. 그렇다면 이 600척은 명량 해전을 구경하고 서해 바다를 관광하기 위해 온 걸까요? 오히려 수군이 패했는데도 굳이 서해를 넘은 것은 그만큼 일본군이 서해를 통한 보급에 그만큼 목을 멨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몇 척 안 되는 조선 수군에 도전하기 겁 날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컸다는 거구요. 결국 이 단 한 번의 전투, 단 한 척의 배, 단 한 명의 인간이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고 정유재란의 판도를, 나아가서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얼마나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30여척의 적을 이겨 냈고" "이 과정에서 적의 수뇌부가 타격을 입을 수준이었으며"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 세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흔히 영웅사관을 경계하면서 이순신을 과도하게 띄운다면서 "거기서 함께 싸운 장수들과 병사들, 격군들, 응원한 백성들은 뭐냐"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함께 싸운 장수들은 칠천량에서 도망갔고, 명량해전을 할 때도 대장을 버리고 도망간 장수들입니다. 병사들 역시 같이 도망갔고 왜군이 무서워서 떨고 있엇죠. 백성들이라고 덜 했을까요.
명량 해전의 승리 요인 중에 해류와 지형을 이용한 것이 크다고 하지만, 이순신 단 한 사람의 영향보다 못 합니다. 이순신이 없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전투가 바로 명량 해전인 것이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전투를 마치면서 이순신은 그 소감을 아주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
此實天幸 이것은 실로 천행이었다.
칠천량 해전 직후, 선조는 하늘이 시켰다고 했습니다. 명량 해전 직후, 이순신 역시 하늘이 도운 거라고 하고 있죠. 하지만 이 둘은 모두 사람이 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일까요. 아무튼, 이걸 보면 이순신 자신도 이 승리를 믿지 못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 뭔가 제대로 썼을지 궁금하네요. 여기서 끊겠습니다. 명량해전 이후 정유재란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 편으로 넘기겠습니다. 다음 편은 "호랑이 사냥"입니다. 1차 울산성 전투까지 나가보고는 싶은데... 될까 모르겠네요.
이상 명량 해전 편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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