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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17 10:16:36
Name nickyo
Subject [일반] 꽃샘추위와 함께 다시 만난 그 사람.

앞 일을 너무 걱정하면 사람은 현재를 만나지 못한다. 내 성격이 딱 그 모냥이었는데, 앞에 세워둔 계획을 염려하여 현재에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잘 모를때가 많았다. 그것은 그 때가 지나고 나면 꼭 떠오르기 마련이라 처치가 곤혹스러운 감정이기도 하였다. 막상 그 때에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납득하고 지나갔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것을 후회라는 이름을 지어 부른다고 한다. 그래, 난 지금 후회하고 있다.


일본에서 처참한 대 지진이 났다. 이름난 재난영화들보다도 더욱 심각한 지진은 '나'와 같은 사람들의 수많은 마음을 앗아갔다.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는 폭발 직전에 있어,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이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 마음의 무게가 남 일이라는 것에 조금 가볍게 느껴지노라면, 내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고 영악한 사람인가 하고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은, 나도 저 땅에서 불행을 기다려야 했던 사람이 될 뻔 했건만.


이번주 토요일은 겨울 내내 준비했던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날이었다. 마지막 주말에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간 시골의 테레비에서 나오는 뉴스속보만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내일 모래의 출국을 두근거리는 맘으로 기다리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텐데. 그러나 현실은 바뀌었다. 원전 문제만 아니어도 모를까, 원전 문제까지 터지면서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전화와 문자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들 운 좋은 줄 알라고, 고맙게 생각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래, 참 고마운 일이다. 저 난장판 속에서 홀로 외국인으로서 서 있는다는건 내가 극복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 어딘가가 화가나는건 어쩔 수 없다.



다른건 다 괜찮았다. 일본에 가서 열심히 일하고 일본어를 배우고, 나중에 가서 내가 차릴 가게를 위해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메모하고, 외국의 친구들과 가끔은 즐겁게 놀고, 모르는 곳을 여행하기도 하는 그런 생활에 대한 로망도 금세 털어낼 수 있었다. 집 밖으로 떠나는 자유도, 끊임없이 날 괴롭히는 미래에 대한 불안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는 그런것들보다 더 큰, 그러나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곤란한 후회가 하나 있었다.



말이 많은 걸 싫어하진 않을까, 키가 큰 것을 싫어하지는 않을까, 연하는 싫어하는 걸까, 뭐라고 문자를 보내야 할까, 지금 바쁘지 않을까, 전화하면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같은 조심스런 마음을 가지고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 남들의 연애사에는 그렇게 쿨하게 대답해주던 내가 그 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리버리했다. 모든게 작아 보였고, 생각과 말은 따로 놀았다. 애써 쿨한 척을 해봐도 그게 다 티가 날 정도로, 그래서 간혹 귀엽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마음이 들던, 그런 누나가 한 명 있었다.



그녀에게 고백한 다음 날, 일본 워킹홀리데이가 합격했다. 그 때서야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하루만 생각하겠다는 그녀에게 나는 그 사실을 말해버렸다. 하루만 생각해 보겠다던 시간이 며칠이나 늘어나 버렸고, 결국 우리가 일주일이 지나서야 만난 커피숍에서 누나는 눈동자를 동글동글 굴리면서, '사실 근데 그런게 정말 중요한건 아니잖아요..'라고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마주친 두 눈을 나는 애써 피했다. 그녀의 암묵적인 신호들을 모두 무시하고, 그리고 나온 그녀의 작은 거절의 말을 마침내 받아들인 그 날, 난 내가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리고 언제나 처럼 조금씩 침착하게 감정을 죽여나갔다. 죽여나갔다? 아니, 천천히 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땀 한땀 정성어린 이태리 장인의 솜씨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점점 내 안에서 작아져가기 시작했다. 번호를 지우니 문자가 줄어들고, 전화를 하지 않게 되고, 간혹 마주쳐도 한 두마디의 인사치레를 하는 수준이 되자 일본에 갈 날이 한달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을 못가게 되었다. 참 야속한 일이다.



그녀와는 분명히 일본에 가기전에 마지막으로 밥이나 한끼 먹기 위해 만날 약속을 잡았을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일본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간단한 안부, 맛있는 밥을 먹고 안녕- 했을 텐데, 우리는 밥 대신 밀크티를 한잔씩 마셨다. 봄에 찾아오는 동장군의 서리를 피해 들어간 카페의 밀크티는 얼그레이를 진하게 우려낸 맛이 좋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입술에서 몇 마디의 이야기가 오고갔다. 밀크티의 따뜻함때문인지 누그러진 마음에서 솔직함이 털려나왔다. 일본은 갈 수 없을거 같아요. 한국에 있어야죠. 누나는요? 그랬구나. 이제부터요? 귿쎄요, 어떡해야하지..



그렇게 끊임없이 흘러나온 이야기는 결국 지난 이야기 몇 가지를 들추며, 또는 그간 멀어져있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나누게 하였다. 우린 장소를 몇 번이나 바꾸어 가며 끊임없이 대화했고, 결국 새벽녘의 해가 뜰 때쯤에는 둘 다 빈 술잔앞에서 얼굴이 붉게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첫 차를 타고 가겠노라며 지하철 역으로 향했고, 난 아무말 없이 좋은 동생이 되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개찰구 앞에서 그 누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때였다.


나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가기전에 한번만 안아주면 안되요?

그래요. 뭐 나 비싼사람도 아니고.

꽈악.

우와 폭 하고 안기네.. 크긴 크구나.

근데 누나 머리에서 술냄새나.

죽을래요?

하하.

잘가요.

응. 누나도.


아침은 쌀쌀했다. 세상은 약간 붕 떠있었고, 눈은 감길듯 말듯 했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에 자꾸 누나 생각이 났다. 괜히 안았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고 큰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것을 참기는 어려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 일본에 못 가게 되서 유일하게 기쁜일이 있다면 그 사람을 데리고 같은 거리를 쏘다닐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집에 오자마자 비행기를 캔슬했다. 환불까지는 30일에서 50일이 걸린다고 했다.


이제부터 어떡해야하지. 공익도 신청기간이 지났고, 일본도 못가고, 학기도 시작해 버렸고..

에라이, 하고 벌렁 드러누워서 익숙한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했다. 행여 다음에 핸드폰을 봤을때 번호도 저장 안해놨냐고 혼날까봐..


한땀 한땀 장인의 솜씨로 막아둔 줄 알았더니
중학생 가정기술 실습만도 못하게 막아뒀나보다.


한동안 마음고생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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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소 상황은 계속 악화 일변도에,
열심히 준비했던 워킹홀리데이를 이제야 포기하게 되었네요.


뉴스를 보며 전전긍긍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불안해 하는게 아니라, 오늘 할 수 있는것을, 오늘 하고 싶은 것을 충실히 마주하는 것이라는걸 느꼈습니다.


상황이 좀 좋아지면 좋겠네요.

도쿄에 있는 외국 친구들도 걱정이 되고...

자연재해와 인재가 겹쳐서
많이 불안불안한 요즘입니다만..

다들 조금씩 힘내시길 바랍니다.

요런 글을 한창 쓸 때에는
제 글을 좋아해 주시는 몇몇 분들이 꾸준히 댓글을 달아주셔서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요새는 다들 하시는 일들이 잘 되셨는지 피지알에서 뵙기가 힘들더군요.
다들 잘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날씨가 빨리 풀리고, 문제도 잘 좀 해결되고 그랬으면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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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11/03/17 10:36
수정 아이콘
향후 몇 년은 일본 가시지 않는 것이 현명할 듯 싶습니다.
어서 빨리 다른 일을 찾으시는 것이 좋으실 듯 하네요.
11/03/17 11:46
수정 아이콘
흐흐 안아달라구 하다니 응큼해요. 기왕 뽀뽀까지...질러보시지! 이 급격한 변화에 어안이벙벙하시겠지만 좋은 기회의 시작이 되시길 바랍니다 [m]
11/03/17 13:51
수정 아이콘
댓글은 한번도 단 적이 없지만, 항상 nickyo님 글을 즐겁게 보고있습니다. 참 좋으신 분 같아요 :)
분홍돌고래
11/03/17 18:12
수정 아이콘
일본에 가신다는 이야기는 지난 글로 알고 있었는데, 결국 없던 일이 되었네요. 많은 설렘과 기대감을 안고 계셨을텐테...
허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참 복잡한 마음이실 것 같아요. 마음 추스르시고, 잠시 nickyo님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시는건 어떠실까 하네요.
평상시 글을 볼 때마다 쉼 없이 무척 바쁘게 사시는구나.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물론. 그 점을 대단하다, 부럽다 생각하고는 있었지만요.
nickyo님의 일상에 찾아온 큰 변화. 슬기롭게 받아들이시길!
지니쏠
11/03/17 19:13
수정 아이콘
저도 nickyo님 글 좋아해요. 그동안 눈팅만 하다 아이디를 기억해준다는 말에 감동받아서 댓글을.. 얍얍!
11/03/18 13:01
수정 아이콘
글 너무 잘쓰시는게 부럽네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수식.. 너무 느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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