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 리앤드로의 해변가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기숙사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열두 시간이 넘게 비행을 했음에도 아직도 해가 뜨겁게 떠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차의 창문으로 불어오는 데 바닷가인 것을 감안해도 매우 사무치게 추웠습니다. 여름이기에는 너무나도 추웠습니다.
전날 저는 잠을 잘 자지 못했습니다. 여행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기억하시다시피 한국에서는 여름이 엄청나게 더웠었거든요.
기숙사방에서 창가 침대를 얻은 룸메이트는 저녁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히터를 틀고 잤습니다. 덕분에 저도 첫날밤을 아주 잘 잤습니다.
각 방에는 침대가 두 개가 있고, 방 화장실에는 세면대, 샤워박스, 변기가 있습니다. 두 개의 방에 4명이 지내고, 가운데에는 작은 거실이 있습니다. 3명 용이지만 아무튼 4명의 남자를 끼워 넣을 수 있는 소파가 있고, 냉장고, 선반, 싱크대, 그리고 선반인척 하는 전자레인지가 있습니다. 옆에는 쓰레기통이 두개이지만 우리는 정말 참을 수 없어지지 않는 이상 먼저 비닐봉지를 바꿔 끼우지 않고 위에 자꾸 쌓습니다. 이곳의 장점은 분리수거가 착한 권장사항이라는 점입니다.
싱크대 옆 여윳공간에 술병이 많습니다. 이곳은 물가가 많이 비싼 동네라 한국에서 양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한 웃돈을 줘야합니다. 그래도 룸메이트 중 한명이 술김에 스페인어를 하면서 엑스박스와 모니터를 자신의 방에서 가져오더니 넷플릭스로 들어가서 "코코"를 거실에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소파에 구겨진 4명 중에서 위스키에 취해서 눈물 흘린 사람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중간고사 기간입니다.
건넛방에서 기타를 튕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엑스박스를 가진 그 친구는 노트북도 가지고 있습니다. 노트북으로도 기타를 튕기는 소리를 틀고는 합니다. 그것이 그 친구의 전공입니다. 가끔씩 밤 늦게 돌아오면 동아리 친구들과 스튜디오에서 돌아오고는 합니다. 그 밖에는 엑스박스의 컨트롤러를 살살 숙련된 손길로 잡고는 게임 "포트나이트"를 합니다. 제가 놀러가면 여분의 컨트롤러를 내주기에 같이 농구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직 이겨본 적은 없지만요.
그 옆에서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는 다른 룸메이트가 있습니다. 조용한 친구입니다. 자신의 나라에서 축구를 하다온 친구입니다. 운동을 하거나 전공인 경제학 문제를 푸는 것에 시간을 쓰는 친구입니다. 어떤 모드인지는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안경이 있으면 방이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시간입니다. 안경이 없으면 컨텍츠 렌즈를 낀 것이고 축구경기를 나가거나 축구연습을 하거나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저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는 추위를 많이 탑니다. 다행입니다. 저도 그렇거든요. 그 친구도 매번 사각사각 연필소리를 내거나 타다닥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포트나이트"를 합니다. 이 친구는 그러나 경제학이 아니라 회계학을 전공하고, 엑스박스가 아니라 플레이스테이션을 합니다. 한번 "포트나이트"를 키면 하루내내 게임만 합니다. 딱히 방해되진 않습니다. 헤드셋을 쓰면 저는 사실 등을 지는 방향으로 제 책상에서 공부하느라 잘 모르거든요. 하지만 어떤 하루는 내내 연필 긁는 소리나 깔끔한 볼펜소리만 내는 것을 보면 이 친구도 자제력이 대단합니다.
저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게 제 전공이거든요. 제가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사실 남들은 석사과정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뭘하다왔냐고 그 친구들이 처음에 가끔 물어보곤 했습니다. 군대 다녀왔지. 그리고 다리가 부러졌고. 캘리포니아의 저녁은 참 춥네, 한국이랑 인도와는 정말로 다른것 같지않아? 아 그냥 내 발목이 시린건가? 홍천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이 너무나도 싫어지더라. 잠시 삐진 상태야. 나는 언더그래듈레잇(학사) 나부랭이라니까. 너희 마스터(석사)들하고는 뤠벨이 다르지. 하찮아 하찮을 뿐이야.
저는 소포를 뜯어서 육 피트는 쌓인 듯한 쓰레기통 위의 쓰레기 더미에 싸분히 얹어놓습니다. 떨어지는 군요. 다시 주워서 조심스럽게 틈을 찾아 쑤셔 넣습니다. 이번에는 안 떨어지는군요. 아마존 프라임, 2일이내 배송보장. 영어영문학과 수업자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윌리엄 포크너, 윌리엄 세익스피어. 2주마다 새로운 얼굴들. 책에 얼굴을 박습니다. 또는 어떨때는 PDF입니다. 그러면 테블릿에 얼굴을 박습니다. 좁니다. 짜증냅니다. 사전이 필요해서 스마트폰을 키고 두 시간 동안 다른 짓을 합니다. 피지알21의 글은 재미있습니다. 한참을 쓰다가 스마트폰은 불편하다며 덧글을 버립니다. 아무런 증거도 남지않습니다. 세 시간을 딴짓했지만 남기는 것조차 없습니다. 부끄러워집니다. 포크너의 글은 정신이 없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설명도 해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기소개조차도 하지 않고 넋두리를 합니다. 술자리인가봐요. 저는 술자리에서 나름대로 귀엽게 착한 친구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Addie는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아!" 정말로 밑도 끝도 없습니다. 피곤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제 얼굴은 책과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워집니다. 액체를 묻히면 안되겠지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인데.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책을 읽다가 한숨을 쉬고는 등 뒤로 룸메이트를 바라봅니다. 슥슥싹싹, 한 줄 씩 기호가 쌓이더니 숫자가 움직이면서 무언가 창조됩니다. 건넛방에서는 음이 쌓이더니 듣기 좋은 소리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저의 책을 처다봅니다. 정신없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멀미나는 풍경이 자라납니다. 제 머리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더니 반짝임이 아니라 화재인것인지 사그라지고 기억이 나지않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아주 잠깐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아주 잠깐만.
하루 하루가 지나고 나면 주말이 됩니다. 교회에서는 밥을 줍니다. 군대에서부터 열혈하게 챙기고 있는 습관이지요. 일요일 점심은 교회에서. 세상에 회의감이 든다면 일요일은 교회를 위해서 비워둘 것. 어느 날은 같은 학교 교수님의 차를 타고 기숙사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분이셨지요. "영문과라니... 영어권 애들하고 경쟁하는 것은... 국문과에 외국인으로 성공하자는 거지... 석사는 아무래도 비즈니스로... 여기 실리콘밸리도 있는데 기업체 인턴쉽도 많이 열고..." 집중이 안됩니다. 원래 어떤 소리는 귓등으로만 들리는 법이지요. 카카오톡이 울리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왓츠앱도 아니고 스냅챗도 아닙니다. 카카오톡입니다. 까톡까톡. 신경질적인 소리. "너 이새끼 근데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했어? 오해를 하게 말하잖아. 너 그따구로 살면 안 돼." 누구였지? 아 그래. 여기서 만난 한국인들 중에서 가장 맏형. 그를 알게 된 지는 한 달이 이제 막 넘었습니다.
찍찍 찍찍. 거대한 하수구. 육천 마일은 떨어져있는 지뢰밭 밑에 남쪽으로 쌓인 거대한 시궁창. 정답을 아는 깨우친 짐승들. 찍찍! 나는 공부하고 결혼하고 일한다. 세계라는 체계의 공략법을 안다. 실패를 할 수가 없다! 나머지 180개의 국가들은 도대체 뭘하고 있는 것이지!? 복잡한 경외감. 이 나라는 정답을 압니다. 나는 정답을 모르고 헤매는 것을 즐기기에 두려워서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가장 그리운 냄새가 나는 곳. 모든 불만이 시작되지만 하소연 역시 자리를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곳. 아마도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겠지요.
다시 방에 틀어박힌 평일. 버거킹 와퍼, 웬디 데이빗스 더블, 소닉 오레오밀크세이크의 냄새가 모두 나는 그곳. 뭐 거창한 것도 아니고 과제, 수업 중 과제로 저널을 읽던 중 갑자기 보이지 않던 점들이 머리 속에서 떠오르더니 하나로 이어집니다. 소설과 소설 사이. 의미와 의미사이. 작가와 작가사이!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남에게는 귀하지 않은 것! 어떤 거대한 체계의 한 갈래를 본 듯한,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짜릿함! 마치 별자리를 잇고 기뻐하던 고대의 점성술사처럼. 아니 현대의 천문학자말고, 너무나도 거대한 세계, 위대한 신성, 아름다운 조화를 봤던 점성술사처럼... 단어에 밑줄을 긋고 따옴표""를 적고 이름과 함께 페이지를 한 귀퉁이에 적습니다. "but not so dear" (Rossetti 23). 쓰지 못하면 불덩이가 되어 나를 태워버릴 것 같은 것을 글로 적어보는 쾌감! 저는 이야기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쓸 줄 모릅니다. 아주 잠깐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아주 잠깐만. 그리고는 피지알에 글을 씁니다. 나중을 위하여. 나중에 이것이 벌이가 될 수 있기를. 쌀에서 내 품위를, 내 자존을 허락하면 좋겠기에. 문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언젠간 쥐들이 나를 찾을 거야. 뼈조차 으깨서 씹어먹고. 나는 죽고 말겠지 오대양처럼 한심하게. 가장 큰 바다를 건너 도망쳐봤자 아주 조금도 수명을 연장하지 못할걸? 나는 정답을 찾아온 것이 아니잖아. 나는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했어. 그들이 공장에서 흘리는 땀에게 거짓말을 했어. 아아 부디 비참하게 죽는다면. 나에게 경외를 허락하소서. 나에게 영화 "판의 미로"와 같은 달콤한 신성을 허락해주소서. 나에게 파라켈수스가 잘랄 웃딘 루미가 전봉래가 본 것을 허락해주소서. 사람의 글에서 전율을 느끼는 학자로서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 영겁의 시간이 드리워지고 사람의 마음에서 경외가 사라진 시대, 회색 도시가 어두운 하늘로 흉측하고 컴컴한 탑을 솟아 올려 아무도 그 그림자 속에서 태양도 봄날의 화창한 초원조차도 꿈꾸지 못하는 시대, 앎이 땅의 아름다움을 긁어서 버려버리고 노래하는 시인들이 흐릿하고 자폐적인 허깨비만을 뱉는 시대, 이 모든 것이 일어났기에 유치한 희망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시대에, 삶의 밖으로 나가 세상의 꿈이 도망친 우주로 떠났던 사람이 있었다." - 미완성 원고 "아자토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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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우연인지 오늘 저도 예전에 읽던 소설을 들추다가 그때는 미쳐 몰랐던 문장에 전율했네요.
He knew that when he kissed this girl,
and forever wed his unutterable visions to her perishable breath,
his mind would never romp again like the mind of God.
그리고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을 넉넉하게 용서할 수 있는 시절이 오기까지는, 다시는 이 책을 펼쳐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