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가을 단풍이 무르익을 무렵,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동네로 산책을 나갔다. 동네를 걷던 중 눈에 들어온 게 있었는데, 바로 난간에 핀 장미꽃이었다. 여름의 상징과도 같은 장미꽃이, 가을 한복판에 서서 붉은 단풍쯤은 자신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외치듯이, 스스로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느낀 바가 많았을까, 집에 들어와서 심정을 끄적인 글이 시가 되었다:
<가을장미>
누구는 이른 늦봄에 가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여름에 갈 때
봉오리 속 묵묵히 제 때를 기다리다
어느새 밖엔 가을이 한창이다
장미는 여름이라지만
늦가을 찬바람 속
뒤늦게 꽃피우는 장미도 있다
내가 늦은걸까
평범한 여름 개화를 바란게
그리 큰 욕심이었을까
그 어떤 걱정도 잠시
옆 자리 단풍보다도 붉고
그 어떤 가을꽃보다도 화사하게
자신의 때에 만개하는 모습을 보니
가을의 주인공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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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 녹아든 것은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은 나이에 군입대를 앞둔 나의 심정일 것이다. 남들이 청첩장을 돌릴 무렵에, 입영 통지서를 받아든 심정; 꽃필 수 있을 것 같은 인연을 마주치고도, 군입대를 위해 부득이하게 접어둔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도 언젠간 나만의 때가 찾아올 희망을 가지자는 심정이었다. 이 가을 장미를 마주친 것에 대해, 난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가을장미 에피소드는 일단락 되는가 싶었다.
이윽고 첫눈이 찾아왔다. 평소보다 이른 시기에 첫눈이 내렸고, 가을 기승을 부리던 단풍의 색채는 새하얀 눈꽃에 뒤덮혔고, 가을의 시대는 종결되고 겨울의 서막이 열렸음을 알리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장미도 이제는 떨어지고 없겠지?"
설마설마 하는 심정으로 눈밭을 헤치고 그 장미가 꽃피우던 곳을 다시 찾았다. 난생 처음 본 광경에 심금이 울렸다. 난 장미를 너무 얕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설마 녀석이 끝내 눈꽃과 마주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다.
<겨울장미>
알록달록한 가을 물감은
어느새 지워지고
새하얀 눈꽃이 뒤덮힌
흰색 세상이 되었다
원래라면
좀처럼 만날 일 없던
눈꽃과 장미꽃
때이른 눈소식에
뒤늦은 꽃소식에
기적처럼 서로를 만났다
눈은 언젠간 녹고
꽃은 언젠간 지겠지만
이 특별한 한 쌍이 이룬 절경은
마음 속 특별한 추억으로
오래오래 간직될 것 같다
-
저 장미가 고작 가을의 불청객 쯤으로 그 전성기를 보여주는가 싶었지만, 그것이 아직은 녀석의 전성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작 내가 뭐라고 이만큼이면 충분히 보여줬다고 단정했을까? 스스로 체념해 버리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인내 속에서의 숭고한 성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난 왜 제멋대로, 난 이제 개화는 틀렸다고, 고작해야 몇년 후 겨우겨우 사람들을 따라잡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지금 이 순간의 웅크림이, 나중에 어떤 절경을 허락할 것인지, 내심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의 전성기는 아직이다. 비록 조금 늦어 보이고, 아직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먼저 체념하지 않는 이상, 나의 전성기는 아직이다.
아직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부디 오래 기다린 만큼, 더 멋진 풍경을 이루기를 바란다.
나도, 이 글을 보는 모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