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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5/19 00:34:50
Name
깐딩
Subject
[일반] 동물의 고백(21)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생각해 볼게요' 라는 시간벌기용 대답이 아니라
거절의 의미가 담긴 의사 표현이 맞는가?
나랑 지금의 이 어중간한 관계가 좋다고 말한 게 맞는가?
나는 그 자리에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적어도 부정적인 대답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피규어는 어쩌죠?"
"그거는 그냥 선물이에요. 가지세요."
그렇게 말하고 회사로 들어왔다.
'버리던지 불살라버리던지 알아서 해.'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내 성질을 건드리면 참지 못하고 폭발할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도 이상한 기운을 알아차렸는지
그날은 누구 하나 내 주위로 오지 않았다.
-야, 오늘 술 먹자.
입사 동기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술 먹으면서 얘기해줄 테니까, 그냥 술 먹으러 가자 제발.
-알겠어요. 퇴근하고 회사 입구에서 봐요.
그렇게 나보다 세 살 어린 여자 입사 동기와 술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퇴근 30분 전, 여자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늘 일이 잘 안되네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카톡을 보내는 게 짜증 났다.
-그래요? 그런 날이 있을 수도 있죠 뭐.
라고 대답했다.
천성이 모진 성격이 아니라 단방에 연락을 끊거나 막대하거나 그러지 못했다.
-XX씨 그래도 롯데월드는 같이 가요. 크크. 오늘도 운동가세요?
라고 실없이 말하길래 순간 스팀이 확 올라서
-회사 직원들한테 술 사 달라고 해서 오늘은 술 마시고 죽으러 갑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오늘은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다. 까딱하면 폭파할 것 같고 툭 치면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날은 그런 기분이었다.
입사 동기와 칼퇴를 하고 맥주를 마시러 갔다.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듯이 터놓았다.
물론 오늘 있었던 일도 다 말했다.
그 동기조차 의아해했다.
"아니 평일에 휴가 쓰고 놀러 가기로 했으면서 그게 안됐다고요?"
"내 말이! X 바 진짜 인생 X 같아서 못 해먹겠네. 전생에 나라 두세 개쯤 팔아먹었나 봐 X 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마음이 있으면 그런 대답은 안 했을 거 같은데..."
"아 몰라. 빨리 나 소개팅이나 시켜줘 네 친구들 있잖아 아 진짜 뒤질 것 같아."
난 그렇게 엄한 사람 붙잡고 진상이나 부리며 밤새도록 맥주를 퍼마셨다.
새벽 한시가 돼서야 동기를 보내고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산책로에 앉아 술을 퍼마셨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살을 빼고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다녔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아니 모든 것을 내려놓은 줄 알았다.
새벽 두시쯤에나 집으로 돌아와 배치기의 눈물 샤워를 수십 번 반복하여 들으며
베개에 눈물자국을 내며 지쳐 잠에 들었다.
다음날 부은 눈으로 출근을 하여 친구들에게 카톡을 했다.
-개XX들아 어제 고백했다가 차였다.
-어제 고백했나? 언제?
-점심에 산책로같이 꽃구경하면서 들이댔다가 대차게 까였다.
-이 새끼 아가리 터는 거 아니가? 니 휴가 쓰고 롯데월드 가기로 했다며?
-맞다.
-근데 뭘 까여. 미친 새낀가?
-진짜 까였다고 X바 X같은 새끼들아. 인생 X바 개병신 같아서 못 해먹겠다.
내가 카톡으로 진상을 떨자 그제야 친구들이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자기들끼리 상황 파악을 시작한다.
-니 뭔데? 호구 잡힌 거가?
-데이트 비용 어떻게 했는데? 니가 다 냈나?
-아니 비율로 보면 6.5 : 3.5 정도 했다.
-이상한데, 그 정도면 일반적인 건데.
친구들이 다른 곳에서 문제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고백 멘트가 X구렸던 건 아니가?
-아님 니 얼굴이 핵폭망이라 거절했을 수도 있지 새끼야.
-아닌데... 내가 봤을 땐 저 새끼 잘 됐는데 괜히 지금 아가리 터는 거 같은데.
역시 친구란 놈들이 더 도움이 안 된다.
-닥치라 10새끼들아. 아 진짜 한강물 온도 체크하고 싶으니까 조용히 좀 해라.
-지가 먼저 씨부려놓고 괜히 지랄이고.
-여자한테서 연락 없나? 니 벌써 휴가 쓴 거 아니가?
-휴가는 벌써 썼지. 어제 고백하고 까이고 나서 나중에 카톡으로 롯데월드는 같이 가자고 왔더라. 개 화나서 휴대폰 껐다.
내 대답에 친구들이 혼란에 빠졌다.
-와 이건 진짜 모르겠는데.
-데이트 호구 잡힌 거도 아니고 영업당한 거도 아니고 여자가 먼저 저랬는데 이게 안될 수가 있나?
-이거 롯데월드같이 가봐야 아는 거 아니가? 이거 연장전인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저 새끼 지금 이빨 까는 거라니까. 벌써 1일째라고 10새들아.
자기들끼리 헛소리를 주고받는다.
아, 조퇴하고 싶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바쁘세요?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쯤 여자에게서 카톡이 왔다.
-네, 오늘은 좀 일이 많네요.
라고 답변했다.
-점심시간에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여자가 잠시 보자는 말에 잘 됐다 싶었다.
만나서 롯데월드 약속 취소하고 휴가도 취소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럼 12시에 맥도날드 앞에서 잠깐 보시죠.
그렇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여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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