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작업이 끝나자 조나스 소크(Jonas Salk) 박사는 자신이 1947년부터 부임하였던 피츠버그대학 연구소에서 소아마비 백신개발에 집중합니다. 그는 생백신이라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닌 [사백신]이라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과거 독감백신을 연구하면서 사백신도 충분히 효과가 있음을 알았던 겁니다. 게다가 사백신이 가지는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바이러스를 약독화시켜 투여하는 방식인 생백신의 경우 [약독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복용한 사람에게 오히려 [소아마비를 발생시키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러한 소크 박사의 이론에 강하게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알버트 세이빈(Albert Bruce Sabin) 박사였습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감염경로가 밝혀집니다. 환자의 대변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고 이것을 원숭이에게 투여하니 소아마비가 발생했던 겁니다.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입을 통해 들어오고 소화기관을 따라 체내에 침입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이빈박사는 소아마비 [생백신]을 만든다면 입으로 먹어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리고 주사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편하고 편리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약독화된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변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바이러스는 [상하수도 시스템에 의해 사회로 퍼지게] 될 겁니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약독화된 바이러스에 감염 될 것이고, [모든 이들이 소아마비에 대한 항체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본겁니다. 매우 긍정적인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세이빈 박사가 소크 박사의 사백신을 반대한 [학술적] 이유는 주사형 사백신은 의료진에 의해 수차례 접종해야 했고, 접종시 바늘로 인한 문제점이 생길 수 있으며, 광범위하고 대규모 관리가 힘들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은 입으로 단 한번만 먹으면 된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구강형 생백신(OPV ; Oral Polop Vaccine) ]
소크 박사의 주사형 사백신(IPV ; Inactivated Polio Vaccine)과
세이빈 박사의 구강형 생백신(OPV ; Oral Polop Vaccine).
각자 근거와 이유가 있었고 이 둘은 경쟁적으로 개발에 들어갑니다.
세이빈 박사는 이전에 뎅기열과 일본 뇌염 백신을 개발한 경험도 있어 명망이 높았던데다가 연구계 대부분이 세이빈의 약독화 방식을 지지합니다. 오직 생백신만이 항체수준을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것이죠. 대조적으로 소크의 사독화 백신은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세이빈박사는 1953년부터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약독화를 시도하는데 소크박사는 1952년 무렵 이미 개발되어 출시전단계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포름알데하이드로 죽인 뒤 3종류의 바이러스 모두에게 적용되는 백신을 만들었고, 원숭이에게 실험하여 성공합니다.
그는 소아마비와 관련하여 두가지로 유명한데 하나는 39세때 소아마비에 걸렸으나 대통령이 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소아마비 박멸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는 겁니다. D의 의지
1921년 소아마비에 걸렸던 루즈벨트는 적극적인 재활치료 이후 정계에 복귀 합니다.
루즈벨트는1933년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1938년 자신의 법률 파트너인 [바실 오코너(Basil O`connor)]에게 소아마비 박멸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들은 [국립소아마비재단(NFIP ; The National Foundation for Infantile Paralysis)]를 설립했고 ["십센트의 행진(March Of Dimes)"]이라는 모금 운동을 진행하여 성공적인 모금을 이루어냅니다. 그만큼 대중들의 소아마비에 관한 두려움이 팽배했고, 이 위기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결과였을 겁니다.
[ NFIP의 “March Of Dimes” 캠페인 포스터 ]
이후 NFIP는 미국전역에 지부를 건설해 나가며 소아마비 환자들의 병원비와 재활치료에 들어가는 치료비를 부담해주고 소아마비 백신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합니다. 소크 박사와 세이빈 박사도 이곳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NFIP는 당시 저명했던 세이빈 박사를 제외하고 소크 박사에게 연구비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는 소크 박사에게 약간의 행운이 따른 결과였습니다.
[ 대서양 왕복 정기선이었던 퀸 메리호(Queen Mary) ]
1951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었던 국제 소아마비 학술대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소크박사는 퀸 메리호(Queen Mary)에서 NFIP의 재단이사장이었던 오코너를 만나게 됩니다. 오코너도 소아마비 학술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참이었습니다. 이 둘은 배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오코너는 소크 박사의 방식에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이미 대부분의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과, 생백신과 다르게 사백신은 약으로 인한 소아마비가 발병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1952년 3월 26일, 소크 박사는 자신이 만든 백신을 자신에게 처음으로 접종하여 안전함을 확인합니다. 이후 자신의 피츠버그 연구실 주변에 있는 신체장애아동을 관리하던 D.T 왓슨의 집(D.T. Watson Home for Crippled Children)에 있는 소아마비 환자들과 소아마비를 앓지 않은 폴크 주립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합니다. 그 해 말, 두 그룹의 아이들에게서 백신으로 생성된 항체가 여전히 존재하고, 어떠한 부작용도 발견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안전성과 유효성을 모두 확인한 성공적인 결과였습니다.
미국은 소아마비에 대한 두려움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1946년 3만 5천건이었던 감염자 수는 1952년 5만 8천건이었고 이중 3천명이 사망하고 2만1천명이 사지가 마비되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매년 50만명에 달하는 환자의 사지가 마비되거나 사망하였습니다. 대중들은 당장 백신을 원했습니다. 소크 박사의 백신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NFIP는 사백신의 대규모 성능 실험을 하기로 결정하고 1953년 2월 이를 언론에 발표합니다. NFIP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크박사를 언론에 앞장세웠고 소크 박사는 대중들의 영웅이 되어갑니다.
[Polio Pioneer]
1954년 NFIP는 [Polio Pioneer] 또는 [Francis Field Trial] 이라고 불리는 초대형 이중맹검실험을 실시합니다. 180만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실험에서 사고가 나는데 200여명의 환자에서 소아마비가 발생하여 11명이 사망하고 150여명에 사지마비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재빨리 역학조사가 들어갔고 이 연구에서 백신의 문제보다 해당 백신을 만든 제조소의 문제가 밝혀졌기에 위기는 넘어갑니다. 이후 보다 정교하게 재정비하여 록펠러 연구소의 토머스 프랜시스 주니어(Thomas Francis Jr.)의 관리로 연구는 진행됩니다. 44만명의 어린이에게 예방접종을 하였고, 21만명에게는 위약(Placebo)을, 118만명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1955년 4월 12일] 프랜시스는 대규모 기자회견을 열고 소크 사백신의 효과가 60~90%라고 발표하며 성공적인 백신이라고 발표합니다. 이날은 소아마비 박멸에 앞장섰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거 10주년]인 날이었습니다. 전세계의 언론이 소크 박사를 집중보도 하였고 더욱더 영웅화가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소크 박사는 언론과 접촉하면서 몇 가지 실수를 하게 됩니다. 백신의 성공에 대한 공로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다른 연구자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역학조사를 진행한 자신의 스승 프랜시스가 관리를 잘못하여 효과가 더 적게 나왔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공로를 자신이 혼자 독차지 할려고 했던 것처럼 보였던 것이죠. 게다가 누구도 백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진 않았는데 유일하게 소아마비 사백신만이 개발자의 이름을 따 [소크 백신]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크 박사는 이것을 우려하여 [피츠버그 백신]이라고 불러달라고 언론에 요구 하였으나 소크 박사를 영웅시하는 언론들은 지속적으로 [소크 백신]이라 불렀습니다.
소아마비 백신을 최초로 만들어내는 것에는 실패한 세이빈 박사였으나 자신의 주장과 연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1956년, 그는 소아마비 생백신을 원숭이와 백여명의 지원자에게 실험했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미국내 사용은 허가받지 못합니다. 이미 소크 박사의 사백신이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사장될뻔한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은 뜻밖에 다른 곳에서 성과를 내게 됩니다.
바로 [소비에트 연방, 소련(CCCP)]이었습니다.
소련은 냉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소아마비사태가 워낙 절박했기에 적국이었던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세이빈 박사의 사정과 맞아떨어졌습니다. 이후 세이빈 박사는 1956년부터 1961년 사이 소련과 동유럽을 포함한 전세계를 대상으로 1억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규모 실험을 하게 되었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이후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은 미국에서의 판매가 허용됩니다. 하지만 소크 박사는 생백신은 바이러스가 살아있었기에 약독화가 잘못되면 백신 자체로 소아마비에 걸릴 수 있다는 주장을 지속합니다.
사실 후진국에서는 그런 것보다는 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은 경구로 먹을 수 있어 주사를 사용하는 사백신보다 사용과 보관, 관리가 쉬운데다가, 한번만 복용하였으면 되었고 가격 또한 훨씬 저렴했던 것이죠. 게다가 세이빈 박사가 생각한 [약독화 바이러스의 선순환 구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에서 약독화된 생백신의 검증된 이점으로 더 인정받게됩니다. 결국 1961년 세이빈 박사의 생박신이 세계적으로 인정한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후 대부분의 아동들은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으로 예방접종으로 받게되었죠. 하지만 소크 박사가 우려한 생백신의 부작용은 현실이 됩니다. 생백신 접종이 후 소아마비에 걸리는 경우가 발생한겁니다. 1969년부터 1983년사이 총 210건의 소아마비 감염자가 발생했는데 이중 99건이 세이빈 백신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결국 1999년말 미국정부는 소아마비가 근절되자 추가적인 소아마비 발생을 막기 위해 생백신의 사용을 중단하고, 좀 더 업그레이드 시킨 사백신을 사용할 것임을 결정합니다. 그렇다고 세이빈 백신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소아마비가 돌연 발생하거나, 특별한 이유로 주사를 맞지 못하는 경우에는 세이빈 박사의 경구용 생백신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백신개발 이후 소크 박사와 세이빈박사는 둘 다 노벨상은 타지 못했습니다.
이전부터 명성이 높았던 세이빈 박사는 이후 미주연합과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운영되는 전세계 예방접종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소크박사의 명성은 의학계내에서 여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의학계에 관련된 상은 전혀 타지 못했으나 그대신 1955년 미국 의회금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 1977년 미국대통령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등을 수상하여 대중과 정부로부터 영예를 얻게 됩니다. 그래도 소크 박사는 오코너와 NFIP의 도움을 받아 1962년 [소크 생물학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를 만들어 자신만의 연구를 지속합니다. 소크박사는 이 연구소에서 암, 다발성 경화장, 자가면역질환등을 연구했고 1995년 6월 23일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에이즈를 위한 백신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소크 생물학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현재 소크 생물학 연구소는 세계 최고의 의생물학연구기관 중 하나로 꼽힌다.
소아마비 백신개발을 위한 소크박사와 세이크박사의 경쟁은 의학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소아마비 사백신과 생백신 모두 개발되었고 이는 필요에 따라 달리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크박사는 당시 의학계에서 무시 당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소아마비 정복의 대명사는 소크 백신, 소크 박사입니다.
이번 글로 소아마비 정복을 가능하게 만든 백신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합니다.
누군가는 백신이 부작용을 일으키고, 인체에 해를 가하는 물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을려고 하죠.
하지만 백신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학술적 성과중 하나이고 수많은 생명을 살린 고마운 존재입니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모든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소크 박사님의 명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합니다.
“Who owns the patent on this vaccine?"
“(소아마비)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군가요?”
"The people, I would say. There is no patent. Could you patent the sun?"
“사람들이겠죠.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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