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500년을 갔던 나라에, 현대의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이전 가장 가까운 시대에 있었던 왕정 국가였던 만큼 여러모로 인지도도 높은 편이고, 조선의 역대 왕들도 한반도의 다른 왕들에 비해 네임맬류가 높습니다. 게중에서 그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여러 왕들 중에서도 탑클래스의 네임맬류를 자랑합니다.
다만 그 네임맬류와는 별개로, '왕으로서 무엇을 했느냐. 그 이전에 대략적인 왕으로서 스타일이 무엇이었느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식이 크게 대중적이진 않은 편입니다.
왕으로서 이성계에 대한 그나마 꽤 인식되는 이미지 중에 하나는 '바지사장 이성계' 라는 이미지 입니다. 특히 근래에 접어들어 정도전 등의 유명세가 높아지면서 이성계는 일종의 이들에 의해 '선택' 된 사람이고, 실질적으로도 정치에서 앉아만 있었으며 사실상 조선을 좌지우지한 사람들은 이들이라는 인식도 큽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될 법도 합니다. 정치 대부분을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해먹었다면, 이성계는 왕권이 허약한 군주 아니었나? 힘이 없으니까 그냥 호호할배처럼 뒤에 물러나 있고, 힘쎈 신하들이 대신 정치 하고, 거기에 불만을 품고 이방원이 뒤집어 엎어버리고 왕권을 강화하고 등등....
"내가 바지사장의 관상처럼 보이나?"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바지사장, 얼굴마담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실제 권력자가 운영은 아랫사람들 맡겨놓고 자신은 손을 놓고 있는 경우. 일종의 전문 경영인을 쓰는 셈입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바지사장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바지사장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이는건, 정말 말 그대로 '이름' 이나 '얼굴' 만 빌려주고 모든걸 좌지우지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때 더욱 그런 표현이 많이 사용됩니다. 정확히 말해서 실권자가 따로 있는 상황이죠.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성계는 바지사장이었을까. 정답은 이렇습니다. 앞서 말한 '바지사장' 이라는 표현의 사용에 있어 1의 경우로 사용한다면 맞는 이야기지만, 2의 경우라면 전혀 아닙니다.
……개국공신들은 그 출신과 능력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학문, 정치 능력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생략) 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도당임원 가운데서도 극히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도당의 임원이라기보다는 '공신' 으로서 이 시대 국정운영의 중추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개국공신이고 도당의 임원이었지만 '도당의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중신으로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중용된 사람들이었다.
(생략)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도당의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직함을 가진 재신, 공신으로서 정사를 다루고 재결받았다. 이처럼 태조는 소수의 재신을 중용하여 운영했기 때문에, 이들 재신들의 정치, 군사 권력이 과대해져 오히려 왕권을 위협하는 상태까지 이르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도 있으며, 또한 당시에 그러한 혐의를 받기도 했다. (생략)
변중량은 당시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의 부당함을 말했다. (생략) 어쨌든 몇몇 재신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했다고 본 것은 태조가 소수의 재신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변중량의 말은 소수 재신 중심 정치에 대한 종친이나 다수의 개국공신들의 불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새각된다. 이에 대하여 태조는 노하여
"이 몇 사람은 나와 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만약 의심을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는 자인가."
고 하고 변중량 등을 추국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즉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모두 태조의 고굉지신으로서 계속 한마음을 가진 자들이므로 이들을 믿고 정사를 위임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생략)
태조 왕권의 허약설은 일제식민사학의 조작으로 이루어졌다. 이성계의 왕권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어놓은 의도는 조선왕조를 시작부터 암담한 국가로 보이게 하려는 고의가 담긴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태조의 왕권은 결코 도평의사사에서 내린 결의를 재가하는 데 그친 허약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과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만큼 강력하였다. (생략) 태조대 국정운영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도평의사사나 개국공신 등 다수의 관료를 동원하지 않고 소수의 재신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태조의 정치에 밀착한 소수 재신에 속하였다. 태조대의 정치는 그들과 밀착되었기 때문에 당시 정치에서 소외된 종친과 다수의 공신들은 정권과 병권이 그들 소수 재신에게 집중된 데 의혹과 불만을 품기도 했다. (생략)
다시 말하면, 태조의 왕권은 결코 개국공신이나 도평의사사의 정치권력에 눌린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태조는 강력한 왕권으로 정치를 주도해갔으며, 다양한 국정운영으로 적극적인 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태조대 정치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시대는 개국초창기로 정치제도는 미비했고, 국정운영은 미숙했다. 소수 재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는 소외된 다수의 불만을 가져왔다.
조선초기정치사연구 ─ 최승희 저
사실 태조 시기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권력이 너무 강하지 않았는가, 이러다가 왕권을 위협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은 다름 아닌 '태조 시절' 그 당시에도 나왔던 여론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론은 바로 묵살 되었는데, 그 묵살은 정도전이나 조준의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성계' 의 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즉 정도전이나 조준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힘을 빌려 자신을 보호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태조 시기 정도전이나 조준 등의 신하들이 막강한 힘을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실권의 원천은, 바로 이성계 그 자체였습니다. 오직 이성계가 이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기에 그들이 힘을 가질 수 있었을 뿐입니다. 군주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신? 그런거 없습니다. 이성계가 마음을 바꿔서 이들을 문자 그대로 조지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성계는 최고 경영 책임자 몇몇을 고용한 오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장이 이 책임자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기에 이들은 절대적인 힘을 일선에서 휘두르지만, 그들의 힘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고용한 회장의 손에서 나옵니다. 태조는 권력이 없던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태조의 권력이 강력하기에, 이들 중신들은 그만큼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겁니다.
이성계의 이런 측근 정치는 어떤 스타일이었는가? 일단 태조가 측근들에게 어떤 식으로 힘을 부여했는지는 살펴보면...
'....태상왕이 즉위하던 날 저녁에 조준을 와내로 불러들여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대저에서 들어와서 밤에 송창(宋昌)으로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남북을 진무(鎭撫)하게 한 뜻을 경이 아는가?”
하고, 인하여 도통사(都統使) 은인(銀印)과 화각(畫角)·동궁(彤弓)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한다.” 하고, 드디어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을 제수하고, 1등의 훈작(勳爵)을 봉(封)하여 ‘동덕 분의 좌명 개국 공신(同德奮義佐命開國功臣)’의 호(號)를 주고, 식읍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와 전지(田地)·노비 등을 하사하였다. ─ 조준 졸기
이성계는 자기가 왕으로 즉위한 바로 그 날 저녁, 조준을 불러들이더니 난데없이 "야! 조준이 너 임마, 병권 가져라!" 하면서 전국 5도의 군사 병마권을 내려줬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조선 전체의 절반이 넘는 지역의 군사권을 '재상 한 명' 에게 넘겨준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태조 시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재상의 파워가 강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두 '세력' 도 아닌 한 두 '명' 의 정치인이, 정권, 심지어 '병권' 마저 손아귀에 넣고 있던 시대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도 태조 시기 정도 밖에 없을테니 말입니다. 아이러니한것은, 그러면서도 정작 국왕의 왕권은 허약하기보다는 오히려 강력하고, 이러한 특정 정치 세력을 왕이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한 배가 된 것처럼 여겨 밀어줬다는 점입니다.
"신하가 권력을 너무 많이 가지면 안된다" 고 했다는 이유로 목이 달아날뻔한 변중량.
이런 경향이 가장 잘 들어난 사례 중에 하나가 '변중량 사건' 이었는데, 당시 조정의 신하였던 변중량은 이성계의 동생인 이화를 만나 "아 글쎄, 본래 병권은 왕실 종친들이 가져야 하고 재상은 정권만 담당하면 되는데, 지금 조준하고 정도전, 남은 등이 다 해먹고 있으니 이거 되겠습니까?" 하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화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 말을 이성계에게 전하자, 말을 들은 이성계는 "음, 그렇지! 이러다 내 권력이 위험하니 이런 말이 나오는걸 이용해서 조져놓아야지." 라고 하기는 커녕, 갑자기 벌컥 화를 내며
"그 사람들은 전부 내 팔, 다리 같은 사람들이야! 어떤 놈이 그 사람들을 욕하는거냐? 딴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하면서 바로 잡아서 국문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성계가 반대로 '절대적인 권력' 을 가지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고, 그 사람들이 자신을 거스르지 못할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이들을 견제한다거나 힘을 뺴앗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보호해줬던 겁니다.
윗 사건과 비슷한 사례는 기록에 또 남아 있습니다. 감찰 직을 맡고 있던 김부와 황보전이라는 두 사람이 어느날 조준의 잔뜩 술을 먹고 취해서 조준의 집앞을 지나가다가, 위세가 대단했던 조준의 집을 보고 술에 취해서 "에라, 지금 권력이 아무리 쎄서 집 으리으리 해봐야 이거 얼마나 가겠나? 나중에 가면 다른 사람 집 되겠지!" 하고 껄껄거렸더니, 그 말을 전해 들은 이성계가,
"조준은 개국 공신이며, 이 나라의 기쁨과 걱정을 같이 한 사람인데, 조준이 오래가지 못한다는건 조선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 것과 진배없다!" 며 황보전은 잡아다 빠따를 때렸고, 김부는 아예 목이 달아났습니다.
보면 느낄 수 있지만, '절대적인 권력' 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조준, 정도전 등은 꽤나 공격을 자주 당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대놓고 쑥덕거렸고, 비토하는 말들도 잦았습니다. 이성계의 보호가 없었다면 이들은 버티기 어려웠을 겁니다.
다른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던것도 아니고, '국왕의 총애가 너무 심해' 사람들의 원망을 들은 조준. 이런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조준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식읍과 도통사 관직을 내려놓기도 했으나, 그럴때마다 이성계가 관직 사표 수리서를 안 받아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신하가 제발 자기 권력을 좀 덜어주라고 통사정을 하는데도 왕이 오히려 아니 됬다면서 더 권력을 더해주는 기이한 상황...
대체 어떻게 이런 기묘한 정치적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을 국가 신료들 중에서 일을 맡길만한 '관료' 로 본것이 아니라, 자신과 큰 일을 이루었던 '동지' 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조선초기정치사 연구' 를 부분만 다시 인용하면,
[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도당임원 가운데서도 극히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도당의 임원이라기보다는 '공신' 으로서 이 시대 국정운영의 중추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개국공신이고 도당의 임원이었지만 '도당의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중신으로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중용된 사람들이었다.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도당의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직함을 가진 재신, 공신으로서 정사를 다루고 재결받았다.]
이성계는 자신이 힘을 준 재신들을 정부 조직의 임원으로 본 것이 아니라, 공신으로서 자신과 뜻을 같이한 동지, 파트너로 여겼습니다. 그게 어느정도였느냐면, 심지어 이성계는 왕이 되고 나서도 옛 동지들과 반쯤 야자를 트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소마동(所磨洞)에 이르러 거가(車駕)를 머무르고,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과 더불어 잠저(潛邸) 때의 서로 친숙하던 정(情)과 개국(開國)하느라고 근로(勤勞)하던 일을 담론(談論)하며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
이성계가 거가를 타고 가다가 소마동에서 멈춰 술판을 벌이면서 남은 등과 왕 되기 전에 조선 만드는 일 하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근하기가 옛날과 같았다는 기록입니다. 왕이 된 이성계의 옛날이라고 하면야 당연히 왕이 되기 이전이고, 즉 이성계는 남은 등과 같이 술마시게 되면 왕관 때고 술 마셨다는 소리.
이성계와 남은 등이 어찌나 친근한지, 둘이 술 마실때면 둘만 마시는게 아니라 남은의 아버지인 남을번도 같이 껴서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남을번은 검교 시중이긴 했지만 그게 조정의 관료였다는 의미가 있다기보단 남은이 개국공신이라 검교 시중직을 받은것에 가까웠는데....
이렇게 모여서 술이 마시다가 술이 취하자, 당시 나이가 74살이었던 남을번이 갑자기 일어나 꼬부랑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74살이면 그렇게 적은 나이는 아닌데 당시 기준으로라면야 말할 것도 없구요.
체통이고 뭐고 말 귀도 잘 못알아먹는 늙은 아버지를 껴서 같이 술을 마시고, 급기야 노인이 반쯤 인사불성으로 춤을 춰대는데, 이성계는 그걸 보고 오히려 남은을 보고는,
"야, 내가 왕이 되면 뭐하냐! 우리 부모님 진작에 돌아가신지 오래인데. 넌 벼슬로는 재상이고 부모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저렇게 춤을 추고 있는데, 내가 왕이라고 해봐야 너보다 나을게 뭐가 있냐?"
하면서 갑자기 중년의 감수성이 폭발하며 눈물을 줄줄줄 흘리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런 꼴을 서로 보일 정도로 친근했던 사이.
기록을 찾아보면 이성계가 정도전, 남은 등과 같이 술을 마실때면 "임금이 술에 취해 건국했던 일을 같이 이야기하며..." 라는 기록이 꽤 자주 보입니다.
왕이고 재상이고 간에, 같이 하루하루 배 나오며 늙어가는 아저씨들인데 술 마시면 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잘나갔던 옛날 이야기들이죠. "캬, 그때는 내가 조정에서 하마터면 털릴 뻔 했는데..." "그때는 제가 쨘하고 나서서 다 산거 아닙니까?" 등등...
그런 술자리 기록 중에 또 다른 하나. 드라마 등에서 정도전 곱사춤의 유래가 된걸로 유명한 기록입니다. 노래가 연주되자 이성계가 정도전보고 "야, 이 노래는 네가 주문한 노래니 춤춰!" 하니까 정도전이 뭔 기다렸다는듯이 즉시 벌떡 일어나 "자, 추겠습니다!" 하고 춤을 추고, 이성계가 그걸 보고 "윗통 벗고 춤춰!" 하니 정도전이 진짜로 윗통벗고 춤춘 기록.
앞서도 봤지만 이성계는 이들을 자신의 "팔과 다리" 로 비유하며, 단순히 왕이 쓸만한 신하에게 보내는 신뢰 이상의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습니다. 기록을 보면서 느껴지는 인상을 보면 정도전, 남은과는 거의 사석에선 형님 동생 하는 수준 아닌가 싶을 정도의 느낌이고, 조준에 대해서는 "아이고, 선생님" 하며 호들갑스럽게 손 싹싹 만져주는 그런 느낌입니다. 아끼기는 다들 아꼈구요. 정도전 - 조준의 틈이 요동 문제로 벌어지던 당시에는 남은이 조준의 험담을 늘어놓자 이성계가 남은에게 성질 내면서 "내 앞에서 그런 소리 하려면 아예 하덜 말어라." 라는 식으로 한 적도 있고.
태조 시기의 국정운영은 완비되지 않은 시스템 대신, 이런 몇몇 절대적인 힘을, 정확히 말해 신뢰를 가진 신하들의 손에 의해 굴러갔습니다. 다만 이런 방식은 몇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행정을 담당하는 인물들이 사실상 국왕급의 권력을 행사하며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니 시원시원하게 국정 운영이 되는 점은 좋았습니다. 해당 실무자 입장에서 보자면, 일하기에는 '완벽' 그 자체였습니다. 다만 상당히 많은 대상에게 불만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불만을 가질 사람들은 '왕족' 들. 조선이 세워지며 이씨 세상이 되었으니 자연히 떵떵거리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이씨들이었는데, 왠 정씨니 남씨나 조씨니 하는 몇몇 사람들이 머리 꼿꼿이 세우고 다니면서 자기들 제끼고 국왕 곁에 붙어서 쑥쑥 거리며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공신은 공신인되 이런 상황에서 배제된 공신들. 자기들 딴에는 자신들도 나라 세우는 과정에 공이 있다고 여기는데 권력은 천지차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특히 공신들 중 '무인 세력' 의 불만이 극심했습니다.
그 외에 새롭게 들어오는 신하들도 자기들이 뭐 할 수 있는건 없고 상감 마마와 술자리 같이 하는 몇몇 대감들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 입이 삐죽 튀어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고.... 다시 복기해서 보면 변중량이 "몇몇 사람들이 권력이 너무 많다." 고 푸념한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닌 이성계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실종친인 이화라는 점도, 제법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왕자의 난 한참 전부터 신료들이 왕족들과 같이 사석에서 태조의 측근들에 대한 불평을 서로 늘어놓고 다녔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특수한 재상 정치, 즉 왕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지탱되는 재상의 힘은 그 힘의 원천인 이성계가 물러난 후 자연스레 사라지게 됩니다.
정도전, 남은이야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그렇다쳐도, 이방원의 난에 소극적 협조를 했던 조준은 협력에도 불구하고 정종 시기엔 밑에서부터 사정없이 공격을 받아 "음란하고 방자하며 사치스럽고 남의 노비를 빼앗는 난신 적자이니 마땅히 주살해야 한다" 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위상이 한없이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느정도냐면 이런 정치적 공격과 인신모욕의 수준이 하도 심하자 조준이 분해서 부들부들 떨며 항변하며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로.
아버지인 태조를 따라 오랫동안 '아버지의 친구였던 아저씨들'을 곁에서 봐온 정종이 얼마 되지도 않은 힘으로 조준을 적극 보호한탓에 겨우 목숨줄을 유지했고, 태종이 즉위하며 새삼스레 신정권의 대통합 분위기 이런게 조성되자 끝없는 공격세례에서 겨우 벗어나 원로로서 얼굴마담으로 정승이 되었지만, 기록에서 대놓고 "뭐 할려고만 하면 태클이 들어와서 암것도 못하고 자리나 지켰다." 고 할 정도의 신세로 추락하고 맙니다.
물론 이방원의 난으로 한번 판이 갈리긴 했지만, 전대에 정권과 병권을 모두 휘둘렀던 조선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파워의 정치가가 눈깜짝할 사이에 뒷방 늙은이로 추락한다는건, 그만큼 그들의 힘이 태조의 절대적인 지지과 도움에서 비롯 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 이성계는 개국 공신 세력 측근들 중에서 이렇게 문인들은 종종 터무니 없어 보일 정도로 배포도 보이며 대단히 아낀 편이었는데(이 세명 외에도 가령 권근은 정몽주 일파 출신에다 정도전 등에게 공격 받는 입장이었는데 이성계 덕분에 목숨을 건짐), 반대로 무인들에 대해선 얄짤 없었습니다. 앞에서 다룬 것처럼, 측근 문인들이 병권까지 가져가는 와중에서도 비교적 소외되어 입이 삐죽 튀어나온 무인 세력들의 경우도 있고...
그나마 여기는 이성계 개인의 부하들이었던 무인 세력이라 그 정도지, 여말 무렵에 부하가 아니라 '협력자' 였던, 즉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던 다른 무인세력들은 이런저런 옥사에 말려드는 등 숙청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 주요 인물로 위화도 회군에도 협력했던 정지가 있구요.
협력도 아니고 아예 대항하려고 했던 무인 세력의 말로야 뭐...
이렇게 자신의 체격만큼이나 흡사 곰을 보는듯한 우직함, 단순명료함과 무인적 호방함 -천진함으로까지 보이는 - 더불어, 흡사 여우를 보는듯한 지혜와 교활함을 갖춘 타고난 정치가의 감을 모두 갖춘 양면성을 가진게 이성계라는 인물이다, 라고 개인적으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