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
<연애담>
<오발탄>
<아수라>
<설리>
<타앙, 경계의 사람들>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나오면서 좀 놀랐다. 엄청 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가 끝나서도 단 한번도 울지 않았으니까.
http://www.beminor.com/detail.php?number=10634&thread=04r03 이 기사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본 탓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영화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주는 진짜로서의 감동은 능가할 수 없다. 그게 아니면 정성일이 늘 언급하는 트네필들이 켄 로치의 영화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쓴 트윗들을 먼저 읽어서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다르헨 형제에는 공감할 수 있어도 직선적이고 어딘가 가르치려 하는 켄 로치의 영화적 어법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경계심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갔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성매매를 과연 타락으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허핑턴 포스트 칼럼의 제목을 눈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모순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죽지 않아야 하는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죽지 않아야 하는 인간을 위해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란 인간을 죽여버린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저항을 다 하고 마침내 정식재판에서 희망을 주워담다가 화장실에 가는 순간, 죽음의 전조는 뚜렷해진다. 그가 화장실에서 널부러져 있는 씬에서 영화는 한없이 차가워진다. 좋은 사람이고, 이것 저것 다 하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받지만, 결국에는 재판 못받고 죽었어. 이 영화는 정녕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인간에 대한 영화일까? 나는 켄 로치가 이 "세계"를 그리기 위해 한 인간을 죽였고,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인간은 결국 그가 주장을 위한 재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켄 로치는 단호하다. 그에게 이 세상이란 결국 불가능이다. 한 인간의 투쟁과 인간다움이 희망에 이를 듯 하면서도 절대 좋은 꼴은 못본다는 이야기를 딱 잘라 말하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시점과 부딪힌다. 이 영화는 "나"를 제목 맨 앞에 세우고 이것이 1인칭이라고 선언한다. 실제로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관객은 다니엘 블레이크의 삶을 여기저기 따라다니며 그에게 보는 "나 자신"을 이입한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관찰자 시점에서 머무른다. 이웃에게 베풀고, 스스로 정부의 규정과 절차와 싸우고, 거기에 때로 맞추고, 마침내 벽에 글자를 휘갈기는 그를 보면서 관객은 다니엘 블레이크를 나처럼 이해한다. 그러나 영화는 어떤 순간에 다니엘로부터 멀어진다. 다니엘이 싸울 때나 휴머니스트로서 강하게 서있을 때는 그를 모두 보여주지만, 그가 무너질 때는 카메라를 방에서 치워버린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가구를 하나씩 팔고 안색이 파리할 정도로 죽어가고 있을 때 카메라는 혼자 있는 그를 비추지 않는다. 관객은 그가 어떻게 사는지 알 도리가 없다. 다니엘이 가장 힘들고 죽어갈 때 관객은 데이지의 시점에서 그의 문을 두드리고 안부를 물으며 생존여부를 확인한다. 이 영화는 1인칭 영화가 아니다. 가장 절박한 사람을 지켜보는 덜 절박한 사람들의 시점이다.
누군가는 내가 바로 다니엘 블레이크이고 다니엘 블레이크가 나라고 하고도 싶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다니엘 블레이크가 될 수 없다. 다니엘은 (성매매를 인생의 실패라고 보는 이 영화의 관점을 온전히 허용한다면) 케이티를 구해내지 못하고 케이티는 다니엘을 구해내지 못한다. 다니엘이 죽은 이후에도 영화는 계속 된다. 영화는 다니엘의 편지를 읽는 케이티를 조문객의 시점에서 바라본다. 다니엘이 벽에 인간선언을 휘갈길 때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할 수는 있어도, 그의 인생은 보고 있는 나의 인생이 아니고 그가 죽는다고 나의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한 인간의 개인주의적 투쟁이라기보다는 매우 사회주의적인, 때에 따라서는 동정과 호혜로 오인받을 수 있는 지점도 있다.
1인칭의 세계를 결국 부정하는 이 영화를 두고 우리는 함부로 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라며 나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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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결국 대리체험에 관한 이야기다. 그게 관찰자건 행위의 주체이건 관객은 영화 속 인물에 이입해 어떻게든 1인칭과 3인칭을 합치려고 시도한다. 거기에는 "인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고, 설령 영화 속 주인공의 상황이 관객은 체험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의 인간적인 반응에서 관객은 그의 감정을 전이받는다.
<연애담>은 1인칭의 체험을 과연 언제나 확실시할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굉장히 좋다. 왜 그렇게 듀나가 이 영화가 일반 극장에 개봉되기 전부터 줄기차게 떠들었는지를 이해하고도 남을 구석이 있었다. 이 영화는 딱히 레즈비언들의 사회적 충돌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느닷없이 지수와 섹스를 한 후 막 정체성을 깨달은 윤주가 첫사랑에 정신 못차리고 방황한다. 과제도 뒷전이고, 가까이 사는 친구와는 멀어지고, 처음 느끼는 그 감정에 한없이 휘둘린다. 첫사랑의 열병은 통증보다는 어리석음, 상대를 향한 중독과 다른 모든 요소의 망각이라는 적극적 도취상태를 수반한다. 이는 대학 새내기때의 내 경험과 너무 흡사해서 레즈비언이라는 성정체성이나 주인공들이 여자라는 것을 도무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떤 장면에서는 과거의 나를 보는 듯 해서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나"의 이야기,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머뭇거리게 된다. 나는 레즈비언이 아니다. 윤주의 체험과 나의 체험은 그 결이 매우 비슷하지만, 나는 그가 성정체성으로 룸메이트와 겪는 갈등을 겪을 일이 없다. 윤주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들이 과연 나나 이성애자 혹은 남성 관객들에게 본 것만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치환되는 것일까. 친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는 것, 지수의 부모님에게는 친한 언니라 둘러대야 하는 것, 에라 모르겠다며 친한 친구에게 키스를 퍼붓는 것, 질척대는 남자들을 지수가 정중하고도 싸늘하게 밀쳐내는 것들은 나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여자이며, 여자에게 끌리는 여자이기 때문에 생기는 특수한 지점이다. 작년 <캐롤>을 두고도 같은 논쟁이 벌어졌었다. "동성애자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 사랑"이라는 이해는 결국 지워지거나 규정될 필요가 없는 메이저리티의 또 다른 폭력이다. 많은 이성애자들은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같은 표현을 쓰며 자랑스러워하지만 보편을 강제로 지휘하는 동시에 나눠지고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하는 개성을 지우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언젠가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다시 보고 다시 써야한다)
모든 것을 나의 이야기라 자신할 수는 없다. 어떤 영화는 바라볼 뿐 겪지는 못하는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무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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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그가 영화 바깥의 나와 겹쳐지는 지점은 영화가 모방의 목적과 결과, 즉 현실과 영화의 데칼코마니에 있다. 카메라에 담긴 세계가 현실의 것이고 카메라가 비추는 세계가 지금 나의 세계이기에 관객은 스크린 안의 짜맞춰진 세계에서도 현실의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아무리 영화적으로 과장되어있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영화는 현실의 거울 노릇을 한다.
역대 최고의 한국영화를 꼽으라고 할 때 김기영의 <하녀>와 늘 1,2위를 다투는 작품이 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다. 영상자료원에서 사회적 묘파 리얼리스트라 이름 붙인 이 기획전을 통해 드디어 한국영화의 최고봉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나는 아쉽게도 <하녀>를 봤을 때만큼의 충격은 받지 못했다. (GV에서 정성일은 <하녀>를 한국영화 매니아나 씨네필이라서 봐야 하는 게 아니라 "인간 된 도리"로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과장에 웃었지만 격하게 공감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위대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 영화 속에 담긴 현실의 무게감은 너무나 무겁게 내리깔린다. 어쩌면 그 시간을 초월해 지금의 한국을 예언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발탄>이 관통하지 못한 한국은 그 어느 시대에도 없다. 미래의 세대에게는 이 영화의 무게가 과거의 조각만큼 가벼워지길 바랄 뿐이다. 현재의 우리 세대는 이미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철호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사랑니도 빼지 못한다. 영호는 곰도 멧돼지도 노루도 꿩도 잡지 못하는 대신 토끼를 잡아보려 해도 사냥꾼이 토끼보다 많은 현실에 웃음을 토한다. 명숙은 양공주 노릇으로 돈을 번다. 어머니는 미쳐서 "가자!"를 외친다. 아이들을 빼면 단 한명도 멀쩡한 꿈도 희망도 없이 버티는 이 가족은 폐허같은 집에서 서로를 흡혈하며 숨을 쉰다. 돌아갈 곳은 너무나 멀고 돌아오는 곳은 내일이라는 고문을 다시 이어간다. 관객은 철호와 영호 사이에서 "나"를 한명 택하고 하염없이 방황하거나 정착해서는 연명해야 한다. 은행강도가 되버린 철호를 어느 누가 꾸짖을 수 있을까? 그가 도망치는 지하수로에는 아기를 맨 체 목을 맨 엄마가 대롱거리며 매달려있다. 꿈이 없어 죄를 택한 그가 통과하는 어둠에서도, 이미 더 한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그리고 탈출하지 못한 자는 탈출하려던 자의 절망을 고스란히 넘겨받는다. 강도와 양공주와 광인을 가족으로 둔 철호는 아내를 잃고 아기도 잃는다. 그런데 철호가 경찰서에서 명숙을 데리고 나와 종로를 걷는 그 장면을 두고 정성일 평론가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며 리얼리즘 영화라고 정의할 수 없다고 할 때 우리는 영화적으로 만들어진 진실을 본다. 김진규의 철호가 터덜터덜 걷는 그 장면은 찌들린 자의 목적지 없는 운동은 달리를 깔고 수평으로 이동하는 카메라를 따라 맞춘 움직임이지만, 어깨에 뭔가를 얹고서 한숨을 담은 채 걷을 때의 우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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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진화하지만 현실은 그 속도를 맞춰나가주지 않는다.
한국영화는 여기까지 왔다. 주성철 편집장의 말처럼, <아수라>는 결국 <비트>와 연계되는 작품이다. 꿈없이 발을 끌고 가족을 이고 가던 송철호의 역사는 몇십년 후 <비트>로 와닿았다. 도망치고 싶어하며 더 빨리, 더 아름답게 질주하지만 정우성은 오발탄의 숙명은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정우성은 더 이상 푸르지 못하다. 낡고 삭은 청춘이 욕을 뱉어대며 도시의 죄악에 충성한다. 살아남았더니 추하고 구린내가 난다. 그 동안 한국인이 발닫고 사는 현실은 더 썩었고 더 많이 금이 갔고 더 많이 피를 흘리고 더 많이 신음한다.
<아수라>는 내가 좋아라하고 자주 참조하는 블로거들, Q나 Quixote가 내린 혹평에 전력으로 맞서 변호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를 두고 개연성 운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까. 어떻게 그 비디오가 있고 왜 도경이 그렇게 시시한 협박에 휘둘리는지 등등의 이야기들은 <아수라>가 사람을 휘감는 이유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종종 감독의 타협, 실수, 실패를 한덩어리로 묶어서 평을 하곤 한다) 이동진은 이 영화를 "수컷들의 힘자랑"이라고 했지만, 감히 단언하건대 그는 이 영화를 잘못 봤다. 이 영화는 전혀 힘자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수라>는 한도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부숴져나가는 인간과 그렇게 인간을 부숴버리는 세계를 그린다. 비정규직, 취업실패, 꼰대상사, 교수님 앞의 대학원생 등 이 시대는 반항을 감히 꿈도 꾸지 못한다. 20세기의 엑스 세대들은 현명한 굴종과 비굴한 생존을 배우며 그렇게 나이들었다. <아수라>는 힘자랑하는 강자들 사이에 끼어서 갈팡질팡하다가 제대로 개기지도 못하고 박살나는, 속시원하게 패배라도 해보고픈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느와르라고 해서 영화 속 모든 폭력이 남성성이나 힘자랑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아수라>의 액션은 서로 치고 받는 씬이 별로 없다. 이 영화의 폭력은 언제나 늘 일방적이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폭력은 짝대기가 증인을 두고 협박하는 씬이다. 짝대기는 곧바로 한도경에게 얼굴을 쥐어터진다. 한도경은 선배에게 처맞는다. 그가 딱 한번 성질머리를 부렸을 뿐인데 선배는 떨어져 죽어버린다. 자존심을 세우거나 자기 의견을 내면 앞일이 아주 더러워진다. 이후 한도경은 씬마다 두들겨맞고 쥐어짜이고 무시당하고 협박당한다. 폭력은 동등한 상대방끼리의 대결,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반항이 되지 못한다. <아수라>는 오로지 위에서 아래를 향해 떨어져내린다. 그리고 이 영화의 폭력에서 주인공은 수동태의 목적어로 존재한다. 그가 영화 초반에 세로로 주먹을 세우고 짝대기를 때렸던 폭력은 후에 검찰 수사관인 도창학의 주먹질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이 영화의 폭력은 도망칠 수 없는 세계로부터의 압력이며 도경은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 이 영화가 <내부자들>처럼 우리 영화는 이렇게 잔인합니다!! 이 세상은 피바다 쇼입니다!! 하고 쓰레기같은 허풍을 치는가? 한도경은 안상구처럼 끄어어억 하면서 폭력의 감각을 전달하며 사도마조쇼로 이끌지 않는다. 그는 <아수라>의 폭력들, 박성배가 담배로 지질 때, 도창학에게 맞을 때, 선모와 엉키고 뒹굴 때, 소리지르며 아파하지 않는다. 성대를 다친 개처럼 낑낑대며 고통을 감내한다. 그는 계속 널부러지고, 인상을 구긴 상대방에게 사과한다. 싫은 소리를 하는 상사 앞의 부하직원처럼, 거래처 사장의 리베이트 압박을 들은 영업사원처럼, 부잣집 일진 친구의 부탁을 듣고 매점으로 발을 끄는 은따처럼, 한도경이 몸담은 안남시와 그 도시의 폭력은 우리가 살고있는 헬조선을 이야기한다. 김성수가 보는 한국은, 이제 승리는 커녕 자폭 심지에 불도 못붙일 정도로 모든 사람이 가늘어져서 매달리고 버티는 것도 힘겨운 세계다.
<아수라>가 뜬금없이 컬트영화로 떠오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홍콩 스타일의 간지나 모든 이의 손쉬운 혹평 속에서 주류에 반하고 싶은 마이너리티 감성, 트네필들의 영화적 감수성, 정말 끝까지 밀고 가버리는 이 영화의 독하고 처절한 혈기 같은 것들. 그러나 이 영화가 미치광이 아수리언들에게 재발굴되고 김성수가 영화의 신이라 불리는 근본에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절망과 자학,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투지로 치환시키려는 발버둥에 있지 않을까. <아수라>는 2016년을 뚫고 나아가는 그 모두의 한탄과 울분을 짊어지고 간다. 이 정도의 폭력, 유리컵을 씹어먹을 정도의 똘기를 내야 말대꾸라도 하는 한도경에게서 우리는 뭉개놓은 패기나 열정을 간신히 조물락거린다. 나도 이제 모르겠고, 까잡아잡숴라 X뻘, 이라며 할복 직전으로 드러누워야 자본의 강자가 인상이라도 찌뿌리는 세계가 과연 우리 세계와 다른가? 정우성이 아수리언들 앞에서 박근혜 나와!! 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과 촛불시위에서 이글거리는 횃불들은 과연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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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실을 은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재현하려고 한다. 그 때, 그 곳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그럼 보는 사람은 다시 묻는다. 왜 굳이 영화로 이를 옮기려 하는가.
영화는 현실을 담는다. 이는 현실을 재료로 쓴다는 뜻만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즉 실화를 영화로 전환한다는 개념이기도 하다. 어떤 현실들은 영화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의 뉴스와 현장의 사진이나 짧막한 영상으로는 진실이 불충분해지니까. 그 때 영화는 서사를 동원해 파편으로만 있던 진실을 복원한다. 우리가 울고 말았던 한 순간이 있기까지 축적된 시간과 경험들, 그리고 휴머니즘의 유무를 결정짓는 한명, 혹은 여러명의 인간들. 현실은 우리에게 늘 결과로 존재하지만 영화는 그 원인을 다 풀어놓을 수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두시간 가량의 러닝타임이 포함된 우리 자신의 길고 긴 현실을 마주한다. 그것은 "진짜" 일어난 일이었다.
2016 사사로운 리스트에서 <설리>는 다섯표를 얻었다. 한국의 평론가들중 다섯명은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 확신했다는 뜻이다. 이상하지 않다.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2016년 연말 까이에 뒤 시네마 같은 해외의 영화 매체들은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순위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사이트 앤 사운드는 30위까지 뽑았는데도 이 영화를 뽑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리>는 한국의 평론가들에게, 한국의 관객들에게만 특별히 작동하는 지점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우리 모두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결국 <설리>는 역설적으로 영화가 어떻게 현실과 결부될 수 밖에 없는지, 왜 관객은 극장 속 스크린의 세계에서도 현실을 떠날 수 없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다. <설리>는 아름다운만큼 잔인하고, 듣고 싶은 대답으로 현실에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는 영화다. 나는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의 세계를 영화와 만나고 말았다. (고맙게도, 장영업 평론가와 허문영 평론가는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촛불시위를 나갈 때마다 수도 없이 소환되어 몇번이나 비극이 되풀이되는 광경에 지쳐있었다.)
2016년 평론계에서 이슈가 됐던 사건 중 하나는 허문영 평론가의 고백이었다.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광팬인 그가 그리 말한 까닭은, 이스트우드 감독이 트럼프를 지지한다면 그가 만든 영화의 아름다움을 회의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설리>의 GV에서 허문영 평론가는 그 땐 좀 성급했다고 하며 멋적어했고, <설리>를 본지 10분만에 항복했다는 표현으로 여전한 애정을 인증했다. 누군가는 쉽게 말할 것이다. 영화는 영화고 사람은 사람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케이시 애플렉의 남우주연상 수상 결과에 역겨워한다. 현실과 영화는 결부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관객이자 수용자로서 우리는 이를 단절시킬 수 있는지, 혹은 그래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윤리에서 미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그는 추한데 그가 만든 것은 아름다울 수 있는가? 그러나 관객으로서 우리는 물을 수 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는 과연 어메리칸 히어로로서 온전히 구분되는가. 트럼프, 클린트 이스트우드, 설리, 이 세명의 인물은 한국인으로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영화의 특별함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가. 그의 영화는 그에게서 자유로운가? 한국인인 내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를 내가 바라는 영웅으로 겹쳐놓을 수 있는가.
영화는 현실 속에 존재하고 영화 바깥의 현실에서 현실에 대한 질문은 영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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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소재로 한다 해도 결국 만들어진 것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다. 그보다 더 영화가 현실이 되려고 할 때, 경계선을 흐리기 위해 다큐멘터리라는 문법을 빌린다. 배우도 각본도 현장에서의 디렉션도 없이 담긴 장면들에서 관객은 아주 진짜 같은 무엇을 본다. 물론 그것은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정성일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하나의 감정을 위해 자르고 뭉개고 몰래몰래 목소리를 도둑질하는 다큐멘터리들은 이기적이고 잔인한 거짓말들이기도 하다. 과거가 되어 죽은 현실을 이런 저런 재료로 조리한 것이 픽션이라면, 다큐멘터리는 살아있는 채의 현실을 가지고 회를 뜨는 작업이다.
<타앙, 경계의 사람들>은 중국 내전으로 난민이 되어 피난을 가는 타앙 족을 담는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하고 먹을 것도 넉넉치 않은 상황에서 카메라가 담고 싶은 것들은 아주 많았을 것이다. 영화 초반에는 여자한테 발길질을 하는 남자가 보인다. 전쟁이라면 어김없이 나올 폭력들, 관객들이 잔인한 호기심을 투영하고 싶은 장면이다. 이제 울부짖거나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사람들이 나올 차례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런 장면들이 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카메라가 쫓아다닌 난민촌에서 그런 폭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왕삥은 경계했을 것이다. 진실을 담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자로서, 보는 자로서의 가학을 건드릴 것을. 비인간적이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굳이 카메라에 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모든 수식어는 결국 인간 아닌 다른 주어를 향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그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사건에, FACT에 별 관심이 없다고. 왕삥은 난민이 된 "인간"을 본다. 인간다움이 흔들리는 행위나 공간이 아닌, 그 곳을 함께 하는 인간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니까 일상과 동떨어진 다른 무엇 대신 다른 형태로 반복되는 일상을 담는다. 밤이 되면 타앙 족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피난 오기 전을 이야기하고 고구마를 구워먹는다.
이 영화의 엔딩을 설명하며 정성일 평론가는 울컥했다. 포격이 시작되고, 소리는 점점 사람들을 향해 가까워진다. 카메라도 진동한다. 아이를 업고, 조그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소들을 묶어놓고 사람들은 분주히 걷는다. 왜 카메라는 이들을 담고 있는가. 대포는 타앙족과 왕삥을 구분하지 않을텐데도 왜 왕삥은 카메라를 들고 "버티고" 있는가. 정성일 평론가는 이를 "언제"로 설명했다. "이들이 몸을 누일 집을 발견할 때까지" 그러니까 왕삥은 카메라에 담긴 인간들이 그래도 최소한 그날 밤을 버틸 수 있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 안의 존재와 카메라 바깥의 존재는 구분되지 않는다. 왕삥에게 다큐멘터리란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다. 이것이 정말 객관적이라면 촬영하는 이는 그 위험을 버틸 이유가 없다. 영화에 담긴 타앙족은 촬영이 위급해지면 카메라를 끄고 지울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왕삥은 자신이 이들의 안전을 기어이 보고, 그것을 기록해야 했다. 보여지는 이들의 인간다움은 보여주는 이의 인간다움과 만난다. 현실과 영화가 함께 찾는 목적이 화면에서 만나는 순간, 관객은 영화를 통해 현실을 희망한다.
정성일은 GV를 현실에 대한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토요일날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영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면 한국영화는 적어도 2016년에 죽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매주 토요일 촛불집회에 나가서 묻는다.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타앙, 경계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촛불집회로 끝났다. 영화와 현실이 제일 훼손이 적은 상태로 만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두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이 영화를 찍은 왕삥, 왕삥이 다큐멘터리로 담은 인간, 인간과 인간이 떨어질 수 없는 마지막,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영화를 만나는 관객들 우리 자신과 우리 모두의 영화적 순간이었다. 촛불의 순간을 영화는 담을 수 있을까. 반대로 영화에 담길 촛불의 순간을 우리는 만나고 있는가. 영화가 끝나면, 영화를 끝내면 영화적인 순간에서 아주 멀어져도 어쩔 수 없는가. 보고 기억하는 것 외에도 한명의 관객으로서 우리는 영화를 실천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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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처음의 이야기를 마무리해보자. 영화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보는 사람은 1인칭인 "나"로서 있거나 "나"는 아니라는 거리를 체험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회의하면서도 확실한 지점들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이 영화는 우리들에게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아도,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며 응원하는 거리의 사람들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허락한 1인칭일 것이다.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살고 있지도, 살 수 있지도 않지만 적어도 그를 "바라보는" 삶에서 저마다의 1인칭을 실천할 수는 있다. 누군가가 벽에 락카칠을 하며 자기선언을 할 때 "나"는 무엇을 봐야 하며 무슨 결정을 해야 하는가. 아름답지 못한 누군가의 울분에서 "나"로서 찾아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의무로 주어진 질문에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할 답은 결국 "인간"이 아닐지. "나"의 영화는 아니어도 "우리의 세계"로 적용할 수는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세계는 규정과 절차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이 다니엘 블레이크가 맞서 싸우는 세계다. 그는 심장질환에 대한 복지를 클레임하러 간 시청에서, 규정과 절차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지원을 못받고 쩔쩔매는 케이트를 본다. 그는 참지 않는다. 그도 기다리고, 다른 사람도 기다리지만 그는 굳이 그 차례를 지연시켜가면서 케이티의 편을 든다. 심지어 그는 옆사람에게 양보를 부탁한다. 케이티를 위해 차례를 조금만 미뤄달라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한다. 비록 패배로 끝나고 말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싶은, 영화라서 생생히 목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이를 보며 그 누구도 다니엘이 다른 사람들을 저버렸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현실에서 외면하거나 침묵하겠지만, 혹은 기다리는 다른 이들을 근거로 누군가를 힐난하겠지만 이 영화는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규칙이라는 것을 잠시 멈춰놓고서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일지, 단 한명을 위해서 많은 이들 앞에서도 단호해질 수 있을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필요한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 때 영화에 받은 감동을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는 상영이 끝난 후 시체로 끝난다. 그 절호의 기회에 나는 "나"로서, 세상 속 "영화"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영화의 아름다움을 현실에서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