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가 시작을 하려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정확한 개전 시각에 대해서는 확신 할 수 없다. 곧 벌어질 세기의 격전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은 후세를 위해 시계를 점검하는 일 외에 달리 바쁜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그 첫번째 공격이 대포의 맹렬한 포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이 시간은 일반적으로 11시 25분에서 30분 경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서전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이변이 나타났다. 프랑스 군 기병은 적의 하사 한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다름 아닌 프로이센군 소속이었던 것이다. 2슐레지엔 경기병연대의 하사였던 이 포로는 자신은 그저 앞서 나간 군사 중 한명일 뿐이며, 곧 블뤼허가 이끄는 3만 이상의 대군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나폴레옹이 선택 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 있었을까? 그 시점에서 물러나는 방안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적의 대군이 눈 앞에 있으니 위험한 퇴각 작전을 선택하는 것은 무리였다. 혹은 나폴레옹이 그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그도 아니라면 하상 과소평가 해온 영국군을 블뤼허가 오기 전에 격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정 속에 포병대가 공세를 계속 하고 있을 때, 좌익을 구성하던 일단의 프랑스군은 레이유의 지휘에 따라 전장 좌측, 영국군의 입장에서는 우측에 있던 농가 우구몽(Hougoumont)에 대해 공세를 시작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구몽에 영국군이 배치되어 프랑스군의 머리를 노리는 한, 프랑스군은 이 좁은 전장에서 영연합군의 우익에 대해 창조적인 공세를 취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압도적인 전력을 기울여 우구몽을 제압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나폴레옹에게는 다른 계산도 있었다. 그는 웰링턴이 우구몽을 잃지 않을까 안절부절하며 자신의 예비대를 계속해서 이 농가로 파견할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숫자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프랑스군으로서는 웰링턴의 주력을 보다 손쉽게 깨부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양동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전략가의 계산은 완전히 틀어졌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오히려 상황은 정 반대가 되었다. 우구몽을 둘러싼 싸움에서 계속해서 병력을 충원해야 했던 것은 영연합군이 아닌 프랑스군이었으며, 전투 초반의 양동작전이었던 이 싸움은 그날 전투가 끝나갈 무렵까지 하루 종일 지속되었던 것이다. 만일 대포를 사용하여 담장을 날려버렸다면 싸움은 조기에 끝났을 수 있지만 몇 가지 문제로 이는 시행되지 않았다.
'전투 속의 전투' 인 이 우구몽의 사투야 말로 나폴레옹 전쟁을 통틀어 영국 육군이 보인 가장 영웅적인 무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콜드스트림 근위연대, 3근위보병연대, 900명의 나사우 군, 브라운슈바이크 군 1개 대대, 두 개 중대의 1근위보병연대 등은 그야말로 '영웅적' 으로 싸웠다. 이 2,600명의 영연합군은 그날 하루동안 무려 10배가 넘는 1만 2,700명 가량의 프랑스군에 이 곳에 묶어버렸던 것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나폴레옹이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선 지휘관들에게 보병들의 세부적인 움직임을 맡겨놓은 그는 비교적 정적인 행동을 취했기에 앞선의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만일 그가 우구몽을 향해 말을 달렸다면 그 즉시 제롬과 레이유 등의 만행을 알아차렸을 것이며, 우구몽에 묶인 엄청난 숫자의 병력에 기겁하며 재빨리 상황을 끝낼 조치를 명령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1805년의 나폴레옹이라면 분명히 취했을 행동이었다. 압도적인 활동력으로 모든 전선을 총괄하던 초인 나폴레옹은 이제 사라져 버렸고, 이에 비하여 웰링턴은 비교적 활발하게 전선을 돌아다니며 지시를 내리느라 바빴다.
한 때는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거의 성공하는 듯 했다. 도끼를 든 프랑스군의 1경보병연대는 서른 명의 분견대를 농지 안쪽으로 밀어넣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맥도넬 대령은 동료 그레이엄 상병등과 함께 힘을 합하여 찰나의 순간에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고립된 프랑스 병력은 소년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살해되었다. 훗날 어떤 목사는 생을 마치며 "워털루에서 가장 용감했던 병사" 에게 유산을 상속했고, 그 병사를 선발하게 된 웰링턴은 그레이엄 상병을 찾아내 돈을 전달했다. 이 우구몽의 사투는 숱한 전설을 나았는데, 그러한 일대기의 하나는 이렇다. 그레이엄은 맥도넬 대령에게 "잠깐 자리를 이탈하겠다." 고 양해를 구하고는, 불에 타고 있는 건물로 들어가 부상당한 형제를 구출한 후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이렇게 우구몽에서 치열한 혈전이 펼쳐지는 동안, 웰링턴은 프랑스 군이 나타나기 시작한 숲을 향해 곡사포를 쏟아부었다. 이로써 우구몽의 수비대는 어느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른 뒤 프랑스군도 곡사포를 요새에 쏟아붇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 펼쳐졌지만, "영국군이 아니라면, 게중에서도 최고의 병사들이 아니라면 결코 이 요새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웰링턴의 찬사처럼 수비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결코 달아나지 않았다. 한때는 어찌나 위험해보였는지, 멀리서 구경을 하는 입장이었던 웰링턴은 "불이 지붕으로 옮겨 붙은 듯 하다. 적군이 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는 지시를 보내기도 했다.
우구몽은 그렇게 하루 종일 프랑스군의 병력을 수렁처럼 빨아들였다. 전투 후에 벌어진 청문회에서, 우구몽의 과수원을 지켰던 1근위보병연대 지휘관 솔턴은 이러한 찬사를 받았다.
"그대들이 부대를 구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보다 더 용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들은 모두 진급 감 입니다."
이 싸움은 여덞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그 동안, 다른 전선에서도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한동안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프랑스군의 대포들이 연신 불을 뿜어내었다. 포탄은 파괴력은 대단했고, 당시의 군사전술 상 밀집해 있어야만 했던 보병들은 포탄이 날아오면 무력하고 참혹하게 당해야만 했다. 포탄을 직격으로 맞는 것은 물론이고, 땅에 튀기고 날아오는 포탄 역시 뼈를 박살내고 사람을 죽일 힘은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힘이 빠진 듯 천천히 굴러오는 포탄들 마저, 무심코 발을 내밀어 막으려던 병사들의 다리를 으스러 뜨렸다.
그러나 충분히 젖어있던 1815년 6월 18일의 워털루에서는 이러한 포탄의 도탄 효과가 영 시원치 않았다. 더구나, 웰링턴은 교묘하게 병사들을 능선의 마루에 배치하고 때에 따라 업드리게 함으로써 프로이센군이 리니에서 당한 참혹한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겪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포탄이 영국군에 맞는다면 그 이후에는 잔혹한 참상이 펼쳐졌다. 95연대의 장교였던 존 킨케이드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뒤쪽으로 몇 야드 떨어진 곳에서 방진을 치고 있던 27연대 병사들은 말 그대로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부대 저원이 전사한 전투에 관하여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예외인 것 같다. 부대원 전원이 몰살당한 듯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1시 30분 무렵, 어느덧 전장의 동쪽 숲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정체 불명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길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그들이 블뤼허를 쫓던 그루시 군단이길 바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정체는 폰 뷜로우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으로 밝혀졌다.
이제 나폴레옹으로서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시간이라면 충분히 지체한 그 였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프로이센군이 위협적으로 변할 만큼 더 집결하기 전에 서둘러 웰링턴을 격파하는 것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예비 기병대 일부를 파견하여 프로이센군의 동태를 주시하게 하고는, 거대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루시의 부관이었던 제라르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의 접근을 보며 침을 삼키고 있을 동안, 그가 기다리던 그루시는 어디에 있었을까?
전투가 시작된 11시 30분 경, 그루시의 부대는 태평하게 때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워털루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포성 소리가 하늘을 찢을 들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식사를 하고 있던 그루시의 병력에도 똑똑히 전해졌다. 워털루 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했다. 이에 앞서 행군하던 부관 제라르 장군은 말을 달려 돌아와 "서둘러 황제에게 합류해야 한다." 는 제안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였다. 엑셀망(Remi Joseph Isidore Exelmans) 장군 등도 황급히 달려와 "즉시 황제 폐하와 합류하는 것이 좋겠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루시는 주저하며 머뭇거렸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충성스러웠던 만큼, 황제가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 정점의 한 순간으로 틸지트 조약(Treaties of Tilsit) 당시를 꼽았다.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킨 그는 이후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을 참패시켰고, 아일라우에서 고전했지만 프리틀란트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며 틸지트 조약을 체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모조리 무릎 꿇렸던 것이다. 그러나 위대함의 정점에 한번 오르게 되자 황제의 오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807년 10월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에게서 다음과 같은 면모를 발견했다.
"최근 그의 스타일은 완전히 변했다. 그는 이제 중용이란 불필요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폴레옹을 오랫동안 섬긴 마르몽 역시 틸지트 조약을 경계로 황제의 일생을 나누었다. 전자가 깡마르면서도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이라면, 후자는 간혹 그 위대한 영민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둔중하고 육중하며 관능을 추구할 뿐인 존재라는 것이다. 스탕달은 나폴레옹 정권 후기의 장관들에 대해 "유능한 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이 그런 사람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고 말했다.
정치가들이 그러하다면, 장군들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당대부터 여러 사람들은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들이 명령을 들을 때는 유능하지만, 스스로 행동해야 할 때는 갈팡질팡 한다는 평가를 내렸다. 너무나 압도적인 한 사람의 존재가 여타 인물들의 창조성을 빼앗았다는 식이다.
그루시의 마음을 붙잡은 것이 무엇 때문이었던 간에, 그는 '황제의 명령을' '자신의 의지로' 거역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더구나, 그는 이미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붉은 머리의 원수 네이가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그루시는 포성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하는 일을 거부했다.
만일 부관인 제라르가 요령과 언변에 능숙했다면 그루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라르는 그루시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한 나머지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 당장 최고사령관직을 사임하는 것이 옳다." 는 등 폭언을 퍼부어 댔다. 이에 욱한 그루시는 더욱더 거세게 반발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는 결국 프로이센군을 쫒겠다는 당초의 명령에 더욱 열성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1808년.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군주들을 무릎 꿇린 황제 나폴레옹은, 위대함과 영광을 모두 손아귀에 쥔 그에게 있어선 미물이나 다름없는 마드리드의 주민들에게 오만하게 선언했다.
"나는 명령을 내렸고, 정복했고, 그리고 말했노라. 나의 독수리들(군대), 나의 왕관, 나의 피, 나의 가족, 나의 신민들이여. 신은 내게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을 주셨다."
그러나 이 하찮은 미물들은 반도전쟁에서 '신에게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을 받은' 사나이를 무너뜨리는데 큰 축을 담당했다. 워털루에서, 그는 모든 장애무를 극복하는 대신 오히려 더욱 깊숙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