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3/10/26 16:20:41
Name 책닭
Subject [일반] 20대 시인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웨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웨드듸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이상 '오감도 시제2호' 그의 나이 25살.

'이곳에 와서 나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이 집안 걱정을 하여왔다. 울화가 치미는 때는 너에게 불쾌한 편지도 썼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놓겠다. 불민한 형이다. 인자의 도리를 못 밟는 형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정보다도 해야할 일이 있다.' 1937년 동생 김운경에게 보낸 편지.





이상의 시에 '거울'과 같은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자아 분열이 그의 시의 중요한 테마가 되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짦은 삶을 살다 간 그의 내면에는 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문학에 몸을 투신하고 싶어하는' 젊은 시성 이상과, '맏이로써 집안을 지탱해야 할' 김해경의 충돌이 그에게 준 갈등, 혼란, 공포는 그가 남기고 간 어떤 짧은 글귀에서라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내가지각한내꿈에서나는극형을받았다' 그 대신 그의 꿈에서 사는 자신의 파편들을 주우러 방랑했던 것입니다.
동생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서, 그는 '가정보다도 해야할 일이 있다' 면서도 형 노릇을 하려고 들고, 가정을 걱정합니다(손 대는 일마다 귀신같이 망했던 이상은 가정경제에 딱히 보탬이 됬던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정보다도 해야 할 일이란 글 쓰는 일을 의미합니다. 동료 문인 안회남에게 그는'저는 당분간 어떤 고난과도 싸우면서라도 생각하는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말라비틀어져 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지금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도저히 커피 한 잔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라고 썼습니다.



그의 '도망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는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은 늘 김해경보다는 이상에 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이 시는 인습에의 탈출의식의 표출에서 더 나아가 어째서 그가 삶을 정체모를 불안에 쫓기다 사그러지는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까닭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 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 그의 나이 23세





맨 처음에는 미당이 그의 친일행각을 정당화시키는 차원에서 후일에 써 내려간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절묘한 변명으로 읽혔습니다. 뭐랄지, 뭔가 더 따져물을 말이 떠오르지 않고 말문이 팍 하고 막히는, 그런 절묘한 변명 말이죠. 게다가 시적으로도 대단히 완성도가 높습니다.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다' 낭독할 적에 무언가 치밀어올라 허파에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게끔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마치 자그마한 구멍이 뚫린 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해 어떤 고백의 고해를 듣는 듯한, 그런 게 있죠.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이 시는 정말 서정주가 스물 세 살 적에 썼던 시였습니다. 아마 저 같은 범인은 230년을 살아도 써내려가지 못할 생명의 시입니다.

여담으로, 근데 서정주는 그다지 유년기를 가난하게 보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3/10/26 17:46
수정 아이콘
서정주 재능이 깡패라는 거야 세상이 다 알죠... 문학적으로 다가가면 마쓰이 송가나 전두환 축시 같은 쓰레기 같은 것들 빼고는 도저히 흠집 낼 시가 없습니다. 근데 그 재능으로 친일에 친군부... 하.
달콤한삼류인생
13/10/26 18:14
수정 아이콘
콜롬버스가 아메리카에서 맞이한 낯선 종족과의 만남은 종족과 종족과의 만남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의 만남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일제강점기의 청년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사이에서 혼돈의 인생을 보냈을거라 봅니다.
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일제는 현재의 미국과 같은 존재로 보였을 수도 있는 일이고

사회의 조그만 변화들은 충분히 수용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쉽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가 급속도로 변할때는 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세상을 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상이나 미당 또한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지적수준은 현대의 제법 배운 사람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닐껍니다.

현재의 시대는 청년 과보호 시대입니다. 다른 동물들보다 새끼들을 오래동안 보호하며 살아온 종족이 인류입니다.
경제적인 풍요도 한 이유가 될수 있겠지만 현재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사회실험적인 요소도 있다고 봅니다.

지식의 양이 늘어가는 것과 부모의 경제적 능력 이런 것들이 주된 이유로 과보호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과보호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술발달로 인한 일자리가 줄어든 요즘 어쩔수 없는 추세가 아닐까요?
청년들의 문제가 아니고 시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ridewitme
13/10/26 19:59
수정 아이콘
요새도 황병승 김경주같은 시인들의 이십대도 엄청났죠. 물론 앞으로가 더 촉망되지만.
13/10/27 00:32
수정 아이콘
여장남자 시코쿠는 정말 대단하죠ㅣ.
王天君
13/10/26 20:58
수정 아이콘
아. 너무 대단합니다. 역사에 남는 이들의 글이란 정말 뭔가가 있어요
여기똥포장되나요
13/10/26 21:39
수정 아이콘
나보다 어린나이구나....
sprezzatura
13/10/26 22:18
수정 아이콘
이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난해함 내지 갑갑함이고, 거기서 퍼먹을 꺼리만 해도 끝이 없지만
가볍게 쓴 산문들에선 생각도 못한 익살, 재치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팔색조같은 작가죠.
스물 일곱에 꺾인 재주가 너무 아깝습니다.
13/10/27 00:42
수정 아이콘
서정주의 자화상은 정말 시의 교과서 같은 느낌입니다. 뭐랄까 구조적으로 정말 완벽해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그런 느낌이에요. 김수영과 이성복의 정말 좋은 작품만이 서정주의 자화상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게 23살의 시라니..
사랑한순간의Fire
13/10/27 01:40
수정 아이콘
"시는 삘이야!"를 외치며 일필휘지로 달린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시어 하나하나를 밤새고 고민하면서 뜯어고치는 시인들도 있었죠...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때문에 흥분해서 모의고사를 망치고(이게 지문에 나와서;;)
서정주의 '화사' 중 '스며라, 배암!'을 보고는 한밤중에 만세를 불르며 환호했던
기억들이 스쳐가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7329 [일반] 돈을 줏었습니다... [46] 라뱅7632 13/10/27 7632 4
47328 [일반] 오늘 밤, 개신교인으로서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85] jjohny=쿠마8639 13/10/27 8639 18
47327 [일반] [해축] 엘클라시코로본 축구 기본 지식 [27] cs5431 13/10/27 5431 10
47326 [일반] 답정너식의 대전시의 도시철도 2호선 추진. [20] 하나5110 13/10/27 5110 0
47325 [일반] 일요일의 bbc 가십 [16] All Zero4138 13/10/27 4138 0
47324 [일반] [해축] 리버풀은 어떻게 3위팀이 되었나? 간단 리뷰 [48] 삭제됨4709 13/10/27 4709 0
47323 [일반] [KBL] 이번주 KBL 프로농구 현재순위 + 다음주 경기 + 잡설.. [53] G.G4059 13/10/27 4059 0
47321 [일반] 현직 애기아빠가 써보는 임산부의 포스.txt (퍼온글) [34] 바자다가사마11717 13/10/27 11717 16
47320 [일반] 고문은 필요악인가? [43] 니킄네임6177 13/10/27 6177 1
47319 [일반] 하후돈의 군사적 전공 [66] Duvet9054 13/10/27 9054 1
47318 [일반] 정부, 전교조 "노조 아님" 공식통보. 옳은 일일까요? [108] 삭제됨6643 13/10/27 6643 4
47317 [일반] 내년 3월에 나오는 게임 - J 스타즈 빅토리 버서스 [9] 김치찌개4266 13/10/27 4266 0
47316 [일반] 히든싱어 조성모편 결과(스포많음) [48] 민민투11992 13/10/27 11992 1
47315 [일반] 마산 어시장/가고파 국화 축제 여행기 [5] 무무반자르반10162 13/10/26 10162 1
47314 [일반] 한 미쿡 장군이 남북전쟁 동안 동족에게 한 일 [22] 요정 칼괴기7924 13/10/26 7924 3
47313 [일반] 운명을 지배하는 인간, 운명 앞에 쓰러지다 - 워털루 1815 (9) 힘과 의지 [5] 신불해4332 13/10/26 4332 8
47312 [일반] 아이폰5S의 사진기능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리뷰해보았습니다. [25] 포포탄7313 13/10/26 7313 2
47311 [일반] 20대 시인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9] 책닭3588 13/10/26 3588 0
47310 [일반] 이 달에 본 책, 영화, 웹툰, 그리고 음악. 최고는 영화 <그래비티> [20] 쌈등마잉5688 13/10/26 5688 2
47309 [일반] 아이폰5S를 질렀습니다! [21] 글라소에너지6238 13/10/26 6238 0
47307 [일반] 가슴에 내려앉는 시 모음22 [5] 김치찌개9993 13/10/26 9993 2
47306 [일반] 내 십대가 그립다.jpg [14] 김치찌개5205 13/10/26 5205 0
47304 [일반] 홍대 유명한 빵집들 & 홍대 유니크한 까페들.jpg [42] 김치찌개8847 13/10/26 884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