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것도 없는데 쓸데 없이 바쁘네요. 덕분에 시간관리,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몸소 깨닫고 있는 요즘입니다. 덕분에 소일거리로 쓰던 영화 감상도 하나도 못쓰고, 나머지 글들도 하나도 못쓰고 있네요. 좀 늦었지만 지금은 완결된 네이버 웹툰 ‘전설의 고향’ 감상을 여러분과 나눠볼까 합니다.
2011년 납량특집으로 네이버 웹툰에서 나온 ‘미스테리 단편’은 꽤나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호랑 작가의 봉천동 귀신과 옥수역 귀신을 필두로 웹툰으로도 공포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냈죠. 그리고 올해는 다소 레트로 풍이라 느껴질법한 ‘전설의 고향’을 테마로 여러 작가들의 단편을 한 편씩 실었습니다.
‘전설의 고향’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공포시리즈를 기획한다는 것은 장단점이 존재합니다. 일단 독자들이 다가가기 쉽다는 ‘익숙함’이 있고, 그나마 이야기의 틀을 잡아줘 중구난방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는 옴니버스 구성의 통일성을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것은 ‘식상하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구미호나 외다리 귀신 등 이미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제약이 생깁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체적인 만족도는 썩 높지 않습니다. 문둥병, 그리고 고려장이라는 소재가 너무 많이 남발되었고, 귀신들의 형태도 사다코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 배경에서 기인하는 고풍스러움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몇 작품만이 기획의도에 충실한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작품들을 평가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설과 고향의 컨셉에 맞는가? 한국의 전통적인 무엇 (그 시대만의 특별한 사상, 문화, 정서)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담았는가?
혹은 소재를 얼마나 현대적으로 변주했는가? 전통적인 소재로 현대의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공감대를 얼마나 이끌어냈는가?
소재나 주제가 얼마나 새로운가?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마이너한 버젼이 아닌, 참신하고도 독창적인 이야기를 담았는가?
1. 삼 – 임진국 작가
전설의 고향 첫 작품으로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조금은 거칠고 투박하게 그린 그림이 사실감을 더해줍니다. 과감한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의 감정 묘사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군요. 그만큼 정교한 얼굴 묘사에 대한 작가의 자신감도 엿보입니다. 귀신의 비쥬얼도 상당히 흉측합니다. 시체에 가까운 형상을 가진 귀신들을 갑자기, 근거리에서 보여주는 전통적인 연출을 하고 있는데, 이게 이 웹툰 시리즈의 방향을 제시하고 동명의 드라마가 가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효력을 발휘합니다.
다만 스토리 자체가 모호한 부분이 걸립니다. 가난한 형제의 불운과 우연만 가지고 공포를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뜬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사건, 그 공간 자체에 더 설명을 해줬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군요. 또한 반전 부분에 해당하는 결말을 미리 전개 부분에 배치시키고 노인의 시체를 마지막 장면으로 했으면 이야기가 더 깔끔하고 여운이 깊게 남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컷 중간중간 어둠 속에 숨어있는 귀신들은 깨알같지만 그게 오히려 클라이맥스의 공포를 반감시키기도 합니다. ‘음산함’과 ‘깜짝 놀래킴’은 많이 다른 종류의 감정이라서 복선으로 쓰기에는 적절치 않고, 이렇게 본격적으로 공포의 주체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면 마지막 한방을 위해서 가만히 숨겨두는 편이 낫습니다.
2. 시척살 –윤인환/김선희 작가
스크린톤을 거의 쓰지 않고 펜선으로만 처리한 연출이 옛스러움을 살려줍니다. 깡마르고 악바리 기질이 있는 주인공의 묘사도 잘 되어있군요. 조선시대에 트랩을 가지고 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신선한 소재 발굴도 칭찬받을만 합니다. 지극히 단순한 상황, 사느냐 죽느냐의 막다른 골목에 주인공을 가둬놓고 한 인물의 심리를 깊게 파고 들어가는 플롯도 깔끔하기 그지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점층적으로 공포감을 확대시키고 있는 이야기 구조에 있습니다. 첫째컷에서는 땅에 파묻혀 있는 주인공의 부자유를, 그 다음에는 날카로운 말뚝들이 수십개가 달려있는 트랩을 보여주며 고통에 대한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는 트랩을 지탱하는 줄이 점점 약해지면서 점점 내려오는 트랩을 통해 본격적인 공포를 진행합니다.(이후 귀신을 일종의 타임어택 게임의 적처럼 활용하는 이 재치란!!) 제한된 환경, 내재된 위협, 그리고 그 위협이 실체를 갖추는 과정을 능숙하게 보여주는 처음의 몇 컷만 봐도 이 작품이 보통이 아니다는 게 답이 나옵니다. 배가되는 긴장감을 탁 터트리고서도 인간의 죄책감에 공포의 본질을 돌리는 마무리 또한 깊이가 있고 충격이 있습니다.
3. 귀동 – 손규호 작가
시리즈 내에서 수묵화 스타일로 ‘전설의 고향’ 컨셉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작가의 정성과 고민이 그림에 잘 묻어있네요. 또 얼굴을 그릴 때의 특징, 눈매와 눈동자 처리가 공포 장르에 딱 들어맞습니다. 표면적인 감정은 보이되, 정작 깊은 속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의뭉스러움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요.
깜짝 놀래키는 전통적인 공포보다는, 인간 자체, 그리고 일상에 숨어있는 공포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각색이 된 이야기라 볼 수 있겠네요. 사이코패스, 혹은 도덕적 마비라는 상태는 현대에 들어와서야 쓰이기 시작한 소재니까요. 약간 시대와 맞지 않는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은근히 무섭습니다. 처음의 복선을 거두어들이는 이야기도 탄탄하고, 결말이 제법 소름끼치는군요.
4. 이이 – 허니비 작가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들을 섭외할 때, 연기력 뿐 아니라 그 배우가 가진 이미지, 그리고 외모가 시대나 그 인물에 적합한지를 따집니다. 소위 싱크로율이라는 것이죠. 사극의 주인공을 강남 스타일의 처자에게 맡긴다면, 아무래도 보는 사람이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작화의 문제는 이제 ‘전설의 고향’ 시리즈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잡을테니 이 작품부터 마땅히 적응하고 가는 게 편합니다. 이게 작가들의 게으름인지 능력미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이 작품 한해서는 못그린다..로 보는 게 맞겠네요)
죄다 서구형 이목구비를 지닌 인물들 때문에 심하게 감상이 거슬립니다. 부모의 만행을 자식이 거스르게끔 오지랍을 떠는 남자 주인공의 행동도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군요. 무엇보다도 ‘왜’ 라는 부분에서 납득이 잘 가질 않습니다. 그냥 그런 귀신이 있고, 무고한 피해자들은 재수가 없었지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도식을 단순화하려면 인물들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통해 ‘어떻게’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자를 집중시킬 수 있어야죠. 싸이코패스마냥 여자를 타인의 생명에 무관심한 인물로 대충 그리는 것도 별로네요. 벌레와 귀신의 결합은 신선했지만, 그 매음새가 심히 허술했습니다.
5. 우렁각시 – 김우준 작가
익히 알려진 소재를 호러로 변주시킨 작품입니다. 전 일단 김우준 작가의 수채화 스타일의 그림이 참 마음에 드는군요.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배경의 색채들을 보세요. 조선시대의 황혼을 감히 연보라 진보라로 나타낼 줄 아는 작가만의 감각이 있습니다. 이 독특한 그림체 덕에 조선시대라는 오래전 배경은 전형적이지 않고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이런 부분은 우렁각시의 생김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푸른 눈동자에 넓고 가늘게 찢어진 눈, 크고 곧은 코, 두툼한 입술을 지닌 얼굴, 그리고 여자치고는 꽤나 다부진 체격, 조선시대에 녹아들기에는 어색한 설정임에도 우렁에서 나왔다는 설정에 이국적인 요소들을 결합시켜 신비감을 증폭시키는 재주가 있습니다.
비록 채색과 선은 현대적이되, 인물들은 조선시대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남편, 그 남편에 순종하려 하는 아내, 그리고 남편의 옆에서 자꾸 헛바람을 불어넣는 이웃 사내까지, 이들의 성격은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의 사람들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전설의 고향’의 한 에피소드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는 말이죠.
비극으로서도 이 작품은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데, 거기에 기여를 하는 것은 사소한 불씨가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비극을 심화시키는 데 있어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 게으르지 않습니다. 파편화 된 사건들을 나열하는 형식이 아니라, 인물들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그 감정 때문에 어떻게 갈등이 깊어지는지를 매끄럽게 보여주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크롤을 내리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도 ‘저러면 안되는데!’ 하고 불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인물들의 감정묘사에 충실함으로써 이야기의 흡입력을 한층 더 높인 것이죠.
이 작품이 남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아내의 복수로 끝이 났다면, 그것은 그림체와 이야기의 전체적인 호흡, 공포의 완급조절에 있어 용두사미로 끝난 작품이 되버렸을 겁니다. 남편이 우렁을 깨부수는 순간 그 광기와 파괴행위를 통해 이미 이야기는 절정에 도달해있었고, 그 절정을 한번 더 유도했다면 우렁이 깨부숴지는 장면에서 느끼는 충격을 잃어버리거나 극적인 결말이 이 전의 절정에 못미칠 확률이 높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건 공포가 아닙니다. 여성주체의 장렬한 통속극으로 변질될 공산이 크죠.
그렇기에 전 이 작품의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거기에는 충격적인 반전이나 파괴적인 고통은 없습니다. 그저 머리가 부숴진 채로 쌀을 씻고 있는 우렁각시가 있을 뿐이죠. 그러나 서걱서걱하며 규칙적인 쌀 씻는 소리가 어쩐지 상당히 거슬립니다. 그리고 한번도 감정을 크게 드러낸 적이 없는 우렁각시는 어찌된 일인지 아주 활짝 웃고 있습니다. 안와가 무너져 희번덕거리는 비대칭의 둥근 한쪽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말이죠. 뒤에서는 보일 리 없는 곁눈질로 남편에게 시선을 걸어놓은 채 말입니다. 뭔가가 달라졌는데, 그럴 리 없는데, 여전히 의무를 다 하는 우렁각시를 저 남편이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왜? 아직도 그녀는 나의 아내를 자처하고 있는 것일까? 머리가 깨진채로!!
이 모호함 속에 공포의 본질이 있습니다. 공포는 단지 깜짝 놀라는 것이 다가 아니죠. 정말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에 대한 확실한 위험이 아니라 ‘ 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함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남편은 무사히 도망을 갔을 지도 모르죠. 그러나 우리가 대개 상상하는 것은 미쳐 그려지지 않은 ‘막연한’ 그 무언가입니다. 달리 말해 부엌에서 식칼을 슥슥 가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을 우렁각시는 가지고 있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분명히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거라는 확신을 들게끔 하는 불길함을 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조장하는 공포, 그 실체를 다 드러내지 않고 감추며 끝나는 이 작품은 ‘여백의 미’가 있습니다.
원래 40 작품을 한번에 다 할려 그랬는데 쓰다보니 할 말도 많아지고 분량도 늘어나는군요. 내일 2편을 올리겠습니다. 아마 후반으로 갈 수록 작품들의 질이 안 좋아져서 많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