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약속장소는 홍대 은하수 다방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걷다가 자동차 유리에 얼굴을 비춰 보니 초췌한 얼굴에 수염이 삐죽삐죽 나와있었다. 전날 과음으로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었다. 반쯤 걷다가 인혜에게서 카톡을 받았다. 알바가 늦게 끝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카페에 도착하니 인혜의 친구 해원이 먼저 와있었다. 머리에 커다란 하늘색 리본 머리띠를 한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녀와는 몇번 만난 사이지만 아직 말을 놓을 정도로 친숙한 사이는 아니다.
"먼저 와계셨네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약간 놀란 채로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해원의 맞은편에 앉으며 테이블에 재떨이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덮은 책의 제목을 힐끔 봤다. 'Night Flight'.
"생떽쥐빼리를 좋아하시나봐요." "네, 조금......"
"그런데 원서를 다......"
"원서는 프랑스어로 쓰였을 걸요."
"요새 영어공부를 하느라고요." 그녀가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미소가 인상적인 여자다.
나는 담배를 빼어 담배갑에 살짝 두드렸다. 담배를 입에 가져대려는 순간 해원이 찡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습관이 돼서요."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피우셔도 괜찮아요.
"아뇨. 여자친구가 알면 안 됩니다."
"참, 인혜는 알바가 안 끝나서 늦는대요."
"네. 연락 받았습니다."
해원에 대해 여자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는 이렇다. 그녀는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남자친구의 흡연을 하는 사실에 대해 다투다 헤어졌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여자친구가 생각하는 실제 이유는 이렇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사귈 때, 다른 남자와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고백했는데, 그 후에도 남자친구와 몇달 더 사귀다가 결국 헤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멍청한 일을 한다.
"그런데요......" 그녀가 내 생각을 깨우면서 말했다.
"인혜가 알면 안 된다면서 왜 담배를 피우세요?" 다른 여자들이 그렇듯이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다.
"담배를 피우는 대신에 자기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둘이 민주적으로 합의를 이뤘죠."
"민주적이긴 한데 공화적이진 않네요."
공화적이라고? 나는 간신히 그녀가 철학 전공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데요."
"그걸 모르시니까 공화적이지 않다는 거에요."
"피우세요. 비밀로 해드릴게요." 해원이 웃으며 덧붙였다.
"정말 괜찮은 거죠?"
"네. 대신 부탁이 있어요."
인혜가 오고 홍대입구역 7번 출구 앞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맥주 3000cc에 소주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눠마시고 해원과 헤어졌다. 인혜와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신촌역으로 갔다. 밤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인혜가 취해있어서 나는 손을 붙잡고 인파를 헤치며 모텔로 갔다.
어느 모텔에서건 항상 몇 편의 홍상수 영화를 찾을 수 있다. 아마 같은 곳에서 영화를 공급하기 때문일 테다. 나는 모텔에 갈 때마다 홍상수의 영화를 한 편씩 본다. 때문에 나는 익숙한 솜씨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틀었다. 벌써 두 번째 보는 거지만 상관은 없다.
나는 영화를 틀어놓고 인혜의 옷을 벗겼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혜는 언젠가 홍상수의 영화가 싫다고 했다. 나는 공화주의와 해원의 하늘색 머리띠, 그리고 그녀의 부탁에 대해 생각했다.
익숙하지 않은 침대라 그런지 일찍 눈이 떠졌다. 옆을 보니 인혜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인혜를 깨울까 하다가 가방에서 담배와 열쇠고리 대신 가지고 다니는 플래시라이트를 꺼냈다. 냉장고에서는 맥주를 꺼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문을 열어서 아직 어두컴컴한 길거리를 라이트로 비추며 놀았다.
인혜가 일어난 건 9시 쯤이었다. 너 추운지 밤사이 이불을 꽉 쥐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자 인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인혜와 헤어져서 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한양대 앞에 있는 탐앤탐스에서 보기로 했다.
담배를 가르치는 건 수영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 요령도 없고, 가르치고 말 것도 없다. 그냥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아드리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잠깐 생각했다. 어쨌든 사람들은 눈 앞에 있는 것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 빠지고 다른 사람은 채식이나 명상, 운동을 한다. 흡연이나 음주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에서 흡연은 종교나 마찬가지다. 과세가 된다는 측면에서는 그녀가 말한 공화주의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해원은 두 시쯤에 왔다. 어제와 같은 머리띠에 체크무늬 남방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웃었다. 어색한 웃음.
그녀가 핸드백에서 말보로 레드를 꺼냈다. 여자가 피우기엔 독한 담배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녀가 물었다.
"왜 성냥으로 불을 붙여요?"
"솔직히 말해드려요?"
"네."
"드라마에서 김민종이 하는 걸 보니 멋있어 보이더군요."
그녀가 웃었다. 이번엔 자연스러운 웃음. 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그녀의 입에 물렸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그녀의 커진 눈을 쳐다보다가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호흡을 들이마시세요."
이번에는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런데 수영하신다는데 담배 같은 걸 피워도 돼요?"
"인혜가 그런 것도 말했어요?"
"말이 많은 애잖아요."
"승우 씨가 말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나는 할 말이 없어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담배 피우면 키스하기도 불편하실텐데......"
"아, 제가 어째서 눈꼽만치도 그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네요." 가시가 있는 말이다. 그녀가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알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담배가 물려있었던 그녀의 입술을 치과의사가 충치를 보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입술에 뭐가 묻은 건 아닌지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민트맛 캔디를 꺼내 해원에게 건냈다.
"이거 드세요. 흡연자의 필수품입니다."
"전 아직 흡연자가 아닌데요."
"저도 아직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죠."
나는 바람을 좀 쐰다고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종종 멍청한 짓을 한다.
"공화주의 때문이야." 거울 속의 내가 말했다.
어쨌든 말보로 레드는 여자가 피우기에 독한 담배고, 나는 담배를 가르쳐주는 척 할 수 있는 시간이 30분 정도는 있으리라. 나는 화장실을 나왔다. 해원의 하늘색 리본이 달린 머리띠가 멀리서도 보였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리필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