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상에서 한국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부터인가 꼭 나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유재흥. 그 이름도 유명한 현리 전투에서 희대의 패배를 당함으로써 무수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둘째로, "북한군 명장" 이라고까지 조롱받으며 현리 외에도 여러 행적을 열거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당히 많은 글에서 이런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4.3 사건 당시에 학살했다."
"제주도에서 민간인들 상대로 승리했다."
"제주도 인구의 3분의 1을 죽였다." 등등... "유재흥 4.3사건" 이나 "유재흥 제주도" 정도로만 검색해도 이런 글을 수두룩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무수한 종류의 글에서 하나를 지금 막 검색해서 인용하자면 "유재흥 : 이승만 정권 시절 대령으로 활동하면서 제주도 4.3 사건을 진압한 장본인. 그의 부대는 1949년 2345명의 `유격대` 를 살해했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라는 글이 있군요. 명확한 숫자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것인지?
이승만과 제 1공화국 - 서중석 저
유재흥이 죽였다고 위에 말하는 1,600명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살육은 유재흥이 떠난 뒤에 벌어졌기 때문에 "속았다" 라고 하면 몰라도 "유재흥이 죽였" 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노사이드 - 최호근 저
유재흥이 있던 시기는 오히려 주민들에게 귀순을 권해서 효과를 보고, '진짜 빨치산, 빨갱이' 를 급속도로 와해시킨 시기.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다시 학살이 일어나지만, 한국 전쟁 당시에 유재흥의 고난에 찬 (....) 행보는 모두가 잘 알고 있으니 그 당시 사건에 관련이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런 언급을 보자면, 이런 분위기 입니다.
이날 2연대가 작전을 벌인 후 이웃마을 봉개리에 주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살아 남은 주민들은 더 이상 마을 부근에 은신할 수 없었다. 이후 주민들은 더욱 깊은 산속으로 은신해 들어갔다.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온 것은 1949년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사이였다.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내려왔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하산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이젠 막 죽이진 않는다더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유재흥 대령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이른바 ‘선무공작’을 펼 때이다. 앞서 하산한 사람이 산으로 올라와 이런 사실을 알려주자 비로소 내려온 것이다. 이는 앞서 벌어졌던 집단총살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가를 말해준다.
제주도 4.3사건 진상보고서 中
역시 산으로 도망쳐서 벌벌 떨고 있는 양민들을 하산시킨 인물이 바로 유재흥입니다.
제3자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미군의 시선은 이렇습니다.
미군 비밀문서 『4·3 종합보고서』
* 초기 군 작전
1948년 4월 최초로 한국군 1개 대대가 섬에 파견된다. 다음달에 그 대대는 11연대의 핵심으로 기용되며, 다른 2개 대대가 본토 주둔 연대에서 파견돼 온다. 사실상 11연대에 의해 행해진 좋은 일이라곤 없었다. 그 구성원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거나 좌익에 동조적이었다. 부대원중 일부는 반란군에 합류하기 위해 산으로 도주하기도 했고, 연대장 박대령은 부하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1948년 7월에 11연대는 철수하며 9연대가 이를 대신한다. 9연대는 11연대의 ‘무대응’ 정책을 즉각적으로 테러에 대한 무차별적 진압으로 대치한다. 이러한 9연대 정책은 반란자들과의 전쟁에서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9연대는 이와 동시에 모든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공공연한 가정아래 마을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주민학살의 대부분은 1948년 12월까지의 9연대의 점령기간 동안에 자행됐다. 그러한 계획은 외형상 주효한 듯이 보여 1948년의 최근 2개월 동안 제주도에서의 반도 활동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9연대의 무차별 진압작전은 새로운 형태의 반란으로 전환케 했다. 12월에 9연대가 2연대에 의해 대치됐을때 새로운 흐름의 게릴라 테러가 닻을 올렸다.
함병선대령이 지휘하는 2연대는 처음에 해변의 부락에 숙소를 정했다. 함대령은 섬사람들에 대한 계도 선전계획과 함께 반도들의 하산을 호소했다. 재산(在山) 무장반도에 대한 공격행위의 중단은 그러한 계획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며 이에 고무받은 게릴라들은 방어부대의 코밑에 있는 해안부락까지 공격, 식량을 구해가기도 했다. 그러자 2연대는 다소 공격적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주로 반란군을 도와준 혐의를 받고 있는 해안부락민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됐으며 종종 부락민들을 재판의 혜택도 없이 즉석에서 대규모로 처형하기도 했다.
* 유 대령의 도착
반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유대령은 일본군 장교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2차대전중 일본 제2방어사단의 박격포 대대장을 지냈다. 제주도 파견 전까지는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이었다. 그는 두루 유능한 장교이며 미 고문단에 매우 협력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해변에서 밀어올려 게릴라들과 대치중인 산으로 보냈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요구했다.
현재의 정책은 작전중 잡혔든 자발적으로 항복했든 간에 산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을 구금하는 것이다. 여자·어린이·노인은 대부분 피난민으로 분류되고 있는 반면, 전투가능 연령의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에 철저히 검색되고 교육되어진다.
유대령 도착이후 300명의 반도들과 그 동조자가 사살당했고 1,500명이 수감됐으며, 소총 22정과 권총 1정이 회수됐다. 무장반도들은 은신처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느라 고통받고 있다. 3월 9일에는 軍 1개 소대의 매복을 피해가기도 했는데 이제는 정면공격이나 마을 기습 역시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기서 보면 미군 측에서는 '민간인 죽이고 하는 삽질이 아니라 진짜로 반도들을 소탕하는 성과' 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유재흥이 오고 나서부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간인 상대로 한 군인들의 범죄가 일어나는것은 군인들이 빨치산을 잡으러 안 가고 마을에서 기웃거리고 있기도 할 텐데, 유재흥은 군인들을 산으로 보내 이런 일을 막았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진상보고서는 2003년 10월 당시 노무현 정부 시절에 확정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물이 됩니다. 여기서 당시 유재흥에 대한 언급을 보겠습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작전을 함병선 2연대장이 주도한 제1기(3월 2일~3월 마지막 주)와 유재흥 사령관이 비로소 제주에 도착해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한 제2기(3월 마지막 주~5월 15일)로 나눌 수 있다. 실제 상황에 들어가면 1기와 2기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함병선 2연대장은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된 첫 달의 작전 방침에 대해 “온건 완화 작전을 취하여 오던 국군은 최후적 결의를 갖고 제3단계인 무력소탕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3월 1일부터 동월 말일까지의 일대 섬멸전이 그것이다”고 밝혔다.1)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보도대는 사령부 설치 초기의 작전(3월 9일~15일)에 대해 이렇게 발표했다.
(종략)
사살‧포로자 숫자에 비해 노획한 무기가 너무 적다는 점은 함병선 연대장이 주도한 3월 한 달 동안의 이른바 ‘섬멸전’의 성격을 말해 준다. 사살‧포로자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숨어 지내던 비무장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한 미군 보고서는 한국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토벌대의 전과를 ‘반도(rebel) 사살 1,075명, 반도 체포 3,509명, 반도 투항 2,065명’이라고 보고하면서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반도(rebel)’는 토벌대가 섬 안쪽 산악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자동적으로 반도(rebel)라고 분류할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는 논평을 했다.6) 중산간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일단 ‘반도’라고 전제해 놓고 사살‧체포한 후 이를 ‘전과’로 보고한 것이다.
이같은 작전은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한 미군 보고서는 1949년 3월말까지의 제주 상황에 대해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고 기록했다.7)
한편 3월 마지막 주에야 비로소 제주에 도착한 유재흥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은 선무공작을 실시하는 한편 지금까지 해안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산악지역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연대본부와 작전 병력만 제주읍에 남고, 제1대대는 현재의 제1횡단도로 수악교(水岳橋) 부근, 제2대대는 관음사, 제3대대는 조천면 교래리, 그리고 특수부대는 노루오름에 주둔하는 등 산악지역으로 전진 배치한 것이다.8) 여기서 특수부대란 2연대 전 작전참모 김명 대위가 지휘하는 50명 규모의 부대로서 산악지역을 배회하다 무장대를 만나면 제주사투리를 구사해가며 정보를 수집하는 조직이었다.9) 해변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상공에 정찰기를 날게 하거나 로켓트포 시범사격을 보여줌으로써 위세를 과시하는 등 진압‧선무 병용작전을 폈다.10) 이 때의 작전에 대해 유재흥은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에 가보니까 산중에 피난민 2만 명 정도가 있었어. 그리고 바닷가에는 경찰‧군인이, 산쪽에는 공비하고 피난민이 있는 등 서로 갈라져 있으면서 밤이 되면 욕하고 싸우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나는 ‘군인은 무조건 산으로 올라가라, 공비토벌 해야 한다’며 3개 대대와 1개의 유격대대 등 4개 대대를 한라산 중복지역으로 이동시켰어. 처음에는 각기 전투지역이 있으니까 각 대대가 다니면서 소탕을 했고, 마지막에는 내가 4개 대대를 기동시키면서 작전을 했지.11)
유재흥 사령관은 남아 있는 무장대 체포와 특히 ‘2만 명 가량의 피난민’을 하산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1949년 4월 1일자 미군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논평(comment)’을 통해 향후 작전방침을 시사했다.
(중략)
이상 군과 경찰의 전과를 종합하면 포로‧귀순자가 7,641명, 사살이 1,612명이다. 그런데도 정부 당국이 밝힌 무장대 수는 많은 진압작전의 전과에도 불구하고 늘 ‘250명 가량’이었다. 이는 9연대와 2연대 초기의 진압작전 때만큼 주민희생이 컸던 것은 아니지만,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설치 초기인 1949년 3월 말까지는 함병선 2연대장의 소위 ‘섬멸전’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말해준다.
(중략)
그런데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작전은 함병선 2연대장이 진압작전을 주도한 제1기와 3월 마지막주 유재흥 사령관이 도착한 이후인 제2기로 나뉜다. 선무공작은 제2기 때부터 비로소 시작됐다. 한 미군 비밀문서는 제1기 ‘가혹한 작전(severe tactics)’과 제2기 ‘사면계획(program of amnesty)’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지휘권을 잡은 즉시 유(재흥) 대령은 전임자 함병선의 가혹한 작전(이 작전은 신분이나 무기의 소지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것을 포함한다)을 바꾸어 즉각적으로 사면계획을 시작하였다. 가능한 한 포로들을 붙잡아서 유 대령 자신이 직접 심문하였다. 포로들은 양심의 가책을 나타냈으며 만일 그들이 게릴라 전투요원으로 가담한 자가 아니면 음식과 담배 등을 주어서 석방하였다. 현재까지 이러한 방법의 결과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석방된 포로들은 유 대령의 부대를 무기 은닉처로 안내할 것이며 그들의 동료들에게 항복하면 모두 사살 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유 대령은 자신의 사면계획 하에서 석방된 포로들마다 최소한 6명씩을 데리고 왔다고 추산하고 있다.25)
이와 관련 유재흥은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고 증언했다.26)
이같은 ‘귀순자’ 증가에 관해 4월 7일부터 13일까지 제주를 시찰하고 온 이윤영 사회부장관은 “요즘 귀순자가 늘어가고 있는데 내가 갔다온 1주일간만 하더라도 898명이나 귀순자가 있었고 4월 13일 현재 합계 3,500명이 돌아왔었다. 제주도 5개 수용소에 있는 자가 3,174명이 있다”고 말했다.27) 귀순자는 점점 늘어 5월 11일 현재 6,000여 명에 달했다.28)
(중략)
한편 유재흥 대령은 5‧10재선거가 무사히 실시되자 5월 13일 제주를 떠났다.32)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5월 15일자로 그 임무를 2연대에게 맡기고 공식 폐지되었다.33) 또한 제2연대 병력 중 유독 서북청년회 단원들로만 구성된 제3대대는 5월 15일 전투사령부와 함께 제주에서 철수했다.34) 2연대 3대대를 철수시킨 것은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로버츠 준장은 2연대 3대대 뿐 아니라 경찰에 소속돼 있는 서북청년회 출신들을 본토로 복귀시켜 널리 분산시키라고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시달했다.35)
당초 미군은 군과 경찰에 서북청년회가 투입돼 지원하는 것을 칭찬하며 장려해 왔다.36) 그러나 사태가 완화된 후에도 서청의 횡포가 지속됨으로써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자 뒤늦게 서청을 철수시킨 것이었다. 5월 18일에는 경찰특별부대가 3개월간의 작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로써 유혈 참극의 사태는 어느 정도 진정됐다.
그런데 유재흥 대령은 선무공작을 실시하면서 “하산을 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지만, 유 대령이 제주를 떠나고 난 후 1,600여 명이 총살당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폐지 이후 제주는 다시 2연대 함병선 연대장의 책임 아래 놓이게 되었다.
단장 변호사‧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박원순 등
여기서 보면 알 수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민간인 학살' 등이 포함된 과격한 토벌을 하던 인물은 함병선이고, 당대 미군도 그렇고 함병선의 "가혹한 토벌" 과 유재흥의 "회유작전" 을 완전히 별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유재흥은 무려 2만명이나 되는 피난민들을 무사히 하산 시키는 작전을 성공하고, 부대를 산으로 보내 진짜 빨치산을 토벌하는 공적을 올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1,600명의 사망자는 유재흥이 '죽인' 것이 아니라 유재흥이 "떠난' 후에 벌어진 참극이고.
관련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등을 한 제민일보(제주도 신문)에서의 4.3사건 관련 취재 당시, 유재흥은 말꼬리를 돌리거나 취재를 기피하는 관계자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임하기도 했고, 관련 인물들에게 "피난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유재흥이 현리에서의 대망, 작전권 관련한 이야기로 비난을 받는것은 물론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에 상식적인 대응으로 피난민을 구하는 인도적 성공, 빨치산을 토벌하는 군사적 성공" 을 거둔 미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악질적인 학살자" 로 매도하는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에 해당할 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