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4일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4월 27일 성주, 4월 28일 청주 그리고 5월 2일에 서울마저 함락되면서 세 곳의 실록은 불타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뿐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6월 전주에도 왜군이 들이닥치면서 전주사고마저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당시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 8백여권과 고려사 등 귀한 책이 보관되어 있었고, 바로 옆 경기전에는 태조의 어진이 함께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주사고는 불타없어졌지만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어진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실록을 위기에서 구한 사람은 사고를 지키던 관리도, 중앙부서의 책임자도 아닌 전주 부근 태인이라는 고장의 이름없는 유생 안의와 손홍록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왜군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 집안의 머슴들을 이끌고 전주까지 달려가 전주사고의 참봉인 유신, 오희길 등과 함께 실록을 정읍까지 피신시킵니다. 전주부의 책임자들이 모두 싸움터에 나가 실록을 지킬 만한 경황이 없는 때 였는데 모두 64궤짝이나 되는 실록 등을 말등에 싣고 전주를 떠난 네 사람은 6월 22일 정읍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실록을 피신시킨 곳은 내장산 은봉암이라는 작은 암자, 지금은 다만 내장산의 금선폭포 부근이었을 것이고 추정되는 곳입니다.
다시 7월 1일 두 사람은 태조의 어진을 조금 더 깊은 산중, 지금의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고 유일하게 남았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어진을 지키기 위해 혹은 함께, 혹은 교대로 밤잠을 자지 않으며 수직을 했습니다. 이듬해 7월 왕명으로 실록이 정읍현청으로 옮겨지기까지 두 사람이 내장산에서 실록을 지킨 날 수는 무려 383일, 1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읍현청으로 옮겨진 실록은 그후 선조가 피신해 있는 해주까지 이송되었다가 영변 묘향산으로, 다시 부본을 인쇄하기 위해 강화도까지 옮겨졌습니다. 이 때 실록을 옮긴 것도 이 두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손홍록의 나이가 56세, 안의의 나이가 64세였습니다. 이 두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선조 36년, 실록은 다시 네 벌로 등사돼 사고에 봉안됩니다.
오늘날까지 실록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손홍록과 안의라는 이름없는 유생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실록 보존의 공으로 선조에게 두 차례나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끝내 마다했으며, 그리고 정유재란 때 다시 실록 피난에 나섰다가 안의는 이때 얻은 병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