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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8 16:15
독립운동가 자손과 친일파 자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면 이 나라도 대충 답이 나오죠.
올해는 백선엽 같은 자도 이리저리 추어올리고 있구요.
13/08/28 16:46
저도 눈시님 글을 읽고 백선엽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그 공헌은 충분히 높이 칠만하다.. 물론 엘스님 말씀처럼 적당히 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3/08/28 16:58
백선엽이야 나라를 구한 공이 있으니 단순 친일파와 비교할 수는 없죠.
결국 김일성이 망할 놈이죠. 6.25를 전후로 독립운동가들 중 다수가 침략군이 되고, 친일파 중 일부는 그에 맞서서 나라를 구했으니까요. -_-;
13/08/28 16:19
사실 남베트남은 제대로된 국가 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남베트남 국민들과의 괴리가 컸었죠. 남베트남 국가의 국민이라는 관념조차 있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정부가 막장.
13/08/28 16:25
+송나라 멸망 시나리오도 답답하죠.
송이 왜 군사력이 약했는지 역사적 측면의 접근은 없고 조공했으니 망했다는 어이없는 논법이 매번 등장하더군요.
13/08/28 16:27
송나라는 내치와 외치의 균형을 생각하게 하는 나라죠. 북송 멸망이라는 변수 빼고 군비가 줄어서 국가 자체는 아주 부유하게 되었죠.
13/08/28 17:07
북송은 좀 억울한 면도 있는게 대대로 중국의 말의 산지였던 지역(삼국지로 치면 마등의 근거지였던 옹양주, 공손찬의 근거지였던 연운 16주가 해당되죠.)이 건국도 하기 전에 죄다 북방 이민족에게 넘어간 상태여서 기병전력을 운용하는게 거의 불가능 했었죠. 왕안석이 보마법을 시행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기병을 충당하는 다른 방법이었던 유목민 기병 동원도 통일 유목민 왕조가 이미 드러선 상태라 큰 효과를 보기 어려웠었고요. 여기에 당의 절도사 난립 때문에 군사 제도 자체도 매우 비효율 적이었던 것이 더해지면서 북송의 호구왕조 이미지가 생겼다고 봅니다. 남송시대 이후 양양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전의 능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는데 그런건 보통 잊혀지더군요.
13/08/28 18:30
금이 요를 멸망시키는 과정은 송의 외교적 실패인거지 군사적 측면의 실패라고 보기엔 거리가 좀 있습니다. 부족한 기병전력을 고려해서 여진을 이용해서 거란을 견제한 거니까요. 군사적 측면에선 나름 훌륭한 판단이죠. 송에게 적당히 뜯어먹고 서방쪽에 신경쓰던 요를 무너트리고 송을 멸망시키려고 한 금을 불러들인 외교적 측면의 실책이 문제일 겁니다.
물론 송은 다시 한번 이 실수를 범해서 금을 무너트리고 몽골에게 멸망 당하는 일을 자초하죠.
13/08/28 16:54
고려도...꽤 오래 싸웠죠;;
근데 송이 오래 버틸수 있었던건, 몽골 내부 문제도 컸죠. 송이 위기에 몰린상황에 몽골 내부 정권문제가 벌어져서 후퇴하다가 쿠빌라이가 정리하고 멸망시켰으니...
13/08/28 17:25
물론 그렇긴 하지만 쿠빌라이 이전에 몽케 칸이 남송과 전쟁하는 와중에 죽었으니까요. 정리해보면 송의 군사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13/08/28 16:24
이렇기에 이번 국정원과 경찰등 각종 국가기관의 비리야말로 내란죄수준으로 경계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번 잃은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거죠
13/08/28 16:32
그리고 명분 자체가 미국과 남베트남에 없었습니다. 북베트남의 호치민의 프랑스 등 외세를 물리친 구국의 영웅 이었고 지도력 자체가 틀렸습니다.
남베트남 정권은 완전 부페의 극치였고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도움이 없이는 유지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도와주러 온 미군조차 엉망진창 이었습니다. 1,2차 대전은 자유세계 수호라는 명분이 있었기에 징병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썩은 독재 정권을 도와주러 강제 징병되어 온 미군의 전투력은 엉망이었고 미군 내에서 마약등을 하면서 막장을 달렸습니다. 거기에 일반병들의 장교에 대한 프래깅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무능한 상관에 대해서 지하신문으로 현상금을 걸고 전쟁터에서 대부분 등에 총맞고 죽는게 초급 장교들 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순신 장군님이 가도 대책 없습니다. 명분을 잃고 능력도 없이 막장 정권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13/08/28 16:45
사기고 뭐고 미군이야 북진 금지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그런 미군을 상대로 구정대공세 실패로 주력 다 말아먹고
케산 포위도 실패하고 한꺼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월맹도 개차반이긴 했습니다. 북진 금지만 풀었어도 그렇게 길게 갈 전쟁이 아니었죠.
13/08/28 17:59
그럼 남한도 딱히 명분이 없네요.
북한은 그 당시 정치인의 대부분이 일본군과 싸워온 독립운동가였으니깐요. 남한도 전쟁전후로 미국의 경제적 도움없이는 유지되지도 않았고요. 지도부는 국민들에게 거짓 정보나 흘리면서 수도에서 도망치기 바빴고 등등등
13/08/28 18:10
북한 정부도 친일파들 꽤 있었어요.
남한 정부도 독립운동가들 꽤 참여했구요.친일청산과정에서 막장이어서 그렇지. 그리고 남한이 전쟁전후에야 미국의 경제적도움없이는 힘든건 사실이지만 그건 일제독립직후와 전쟁의 영향이고 베트남전쟁이 있었을 60년대~70년대 박정희 정권때는 충분히 자립적인 기초를 세우기 위해 잘 달리고 있었죠. 지도부가 국민에게 뻥까고 수도에서 도망치기 바빴고,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발췌개헌등 막장짓을 해도 남한국민들은 남한을 지키러 싸웠죠. 애초에 전쟁부터가 6.25는 북한이 통일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일방적으로 침입한것이지만 베트남전쟁은 가만냅두다가는 남베트남이 무너지게 생겼으니 미국이 조작사건 만들어서 일으켰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13/08/28 21:27
전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확대에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는데,
북한 초기 정치인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였다는 말을 들으면 제대로 된 근현대사 교육이 필요하긴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 정권에 얼마나 친일파가 많았는지, 북한에서 제 명에 죽은 독립운동가가 얼마나 적은지 알면 기겁하실 겁니다. 남한에 계시던 독립운동가 분들 중에서도 정부 지원 못받고 어렵게 사신 분들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최소한 정부수립 초기의 혼란기 이후로 감방이나 강제노동에서 죽어나간 독립운동가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지원을 못해줬을 따름이죠. 대체 처음에 이런 얘기를 퍼뜨린 사람이 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네요. 이쯤되면 진짜 대북 간첩이 열심히 활동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13/08/29 10:17
누가 뭐라해도 남한보다 북한이 친일 청산이 더 잘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요즘 오히려 이런 식으로 북한이 더 친일 청산이 안되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는데 상당히 위험한 주장이라고 봅니다.
13/08/28 16:50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1. 호치민과 김일성의 차이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독립할때 소련과 미국이 들어오고, 각 측의 지지를 받는 대립적인 정권이 들어서는 모양이었다면 베트남은 기존 지배자였던 프랑스가 일본에의해 잠시 쫓겨난 상태에서 일본패망의 공백속에 호치민 정권이 들어왔구, 이전 베트남에 영향을 미치던 승자국 중국국민당과 프랑스세력이 다시 들어오는 양상이었고, 호치민은 외교를 통한 상호견제와 전쟁 등으로... 민족정권을 세우려 치열한 노력을 했었습니다. 이런와중에 다시 프랑스가 들어와서 세운 남베트남과 대립하는 구도가 되었죠. 이런 와 중에 프랑스를 전쟁으로 쫓아내자 미국이 들어왔던가 그렇구요. 게다가 우리에게는 소련군이던 미군이던 해방군으로써의 이미지도 함께있었지만. 프랑스의 지배를 쭉 받다가 막판에 일제에 점령되었던 베트남에게는 2차대전 승전국인 프랑스가 다시 들어왔구 미국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프랑스 쫓아내자 연이어 들어온 외세라는게 더 강했던거 같습니다. 2. 응오딘지엠과 이승만,박정희. 월남과 남한의 미군을 바탕으로 세워진 정부를 보면 기독교 친미정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응오딘지엠은 개인은 나름 엄격한 생활을 했답니다. 문제는 자신의 형제와 기독교형제에 대한 사랑이 아주 컸답니다.--; 그래서 족벌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고, 이 족벌들이 답이 없었다 하죠. 게다가 월남에 있었던 연이은 쿠데타로 정치가 엄청 불안했죠.(이건 본문의 글에 잘 나와 있네요) 사실 이승만정권에 대해 많은 불만이 있었지만, 저러한 족벌행태는 없었구, 사실 6.25직전에 북한에 뒤질세라 토지개혁을 하였구, 이 토지개혁은 북한처럼 극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정계층에 큰 불만을 낳지도 않은 편이라 6.25때도 민심이반이 잘 안되었죠. 그래서 박헌영의 오판이.. 암튼 이승만 정권의 문제가 쌓이긴 했지만, 4.19로 깔끔하게 어느정도 정리되었구 그 후 사회불안은 사실 박정희가 억지로라도 잘 봉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경제성장쪽에 온역량을 집중하게 만들었구요.. 3. 결론적으로 호치민에 대한 지지>>>김일성에 대한 지지였고 남한 지도자들이 남베트남보다 훨씬 유능했죠. 뭐 김일성이야 당시 북한에서는 꽤 인기가 높았구, 그걸 바탕으로 자기 숙적들도 정리할수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여겨져 생각외로 인기가 없었을뿐 아니라. 6.25로 남한내 북한정권지지세력이 상당히 정리. 호치민은 베트남 민족지도자로 제대로 인정받아 베트남에서 남북할거 없이 국민들 지지도가 높았죠. 또한 월남과 남한에서의 지도자를 비교하면. 남한이 월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뭐 우리나라에 존경할만한 대통령 없다하지만.. 사실 현실은 아시아 중에서 일본을 제외하면 경제던, 정치던 거의 최상위권이고, 이건 지도자던 국민이던 뭔가 시대에 따른 도전을 어느정도 잘 극복한 결과라고 봐야죠..
13/08/28 16:51
아래 글에 썼는데, 장기간의 게릴라 활동은 지역사회 기반이 필수적입니다. 지역사회 기반이라는 말은 도와주는 사람 몇명이 있다 정도로는 아주 부족하고, 적어도 모 시민이 모 게릴라, 혹은 게릴라 활동을 봤을때, '그냥 넘어갈'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라는 거죠. 이 것이 가능해 질려면, 간첩은 거의 도움이 안되고, 정권 자체가 문제가 있어야 됩니다. 역으로 정권에 문제가 없으면, 간첩이 아니라 간첩 할애비가 와도 안됩니다. 역사적으로도, 게릴라가 전세에 영향을 미친 예는 1.정권이 개막장이거나, 2.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경우 둘 중 하나 뿐입니다. 베트남 걱정을 할려면 정치인들이 잘 하는게 답이죠. 간첩은 아무 영향도 없습니다.
13/08/28 18:09
호치민이야 한국으로 따지면 김구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원봉을 다 합친것 같은 인물이니 김일성과 비교자체가 안되죠...
베트남전 이야기를 정훈시간에 틀때마다 웃었습니다 개콘보듯이요 군대 정훈에서 역사관련 다큐 대부분이 그렇긴 합니다만
13/08/29 05:16
남베트남 패망에 대한 교훈은 간첩에 대한 경각심보다는 내부적인 부정부패에 대한 경각심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남베트남의 민심이반은 자생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있었고 이건 간첩이 호도한다고 해서 될일은 아닙니다. 물론 여론을 조장하여 민심이 크게 좌우되는 사안들도 있기는 하지만 한 국가의 패망은 역시 지도부가 얼마나 부정부패 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신뢰와 존경심을 받느냐는 것이겠죠.
그런면에서 현재의 북한보다 남한이 수만배는 더 국가적인 존재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북한산 간첩들이 날뛰어도 패망할 꼴은 안난다는 겁니다. 오히려 내부적인 부정부패와 중국,일본 세작들의 이간질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3/08/29 13:01
방구차야 님 댓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마 처음인 것 같..)
특히 마지막 문단에 강력 동의하며, 그래서 김석기의 내란혐의보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더욱 경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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