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 라켓볼 코트장에서 울리는 공의 파열음. 나는 멍하니 끊어진 라켓의 스트링을 바라본다. 오래 썼으니 곧 끊어지겠거니, 끊어지겠거니. 조금씩 스트링의 실이 찢어져가고 있었는데, 결국 타앙-하고 공을 치자마자 팅! 하고 스트링이 나갔다. 망가진 라켓으로 몇 판을 진건지 모르겠다. 이기던 사람들에게 지는것도 짜증나고, 비등비등하지만 결국은 내가 주로 이기던 사람한테 지는건 더더더더더짜증난다. 그래도 잇이스 스포츠. 질수도있다. 망할 줄이 끊어지는 타이밍이란. 사람들이 다 집에 간 텅빈 코트에서 혼자 타앙- 찌낑! 타앙- 찌낑! 소리를 내며 공을 치고 뛰고 또 공을 쳤다.
가뜩이나 돈도 없다. 아버지 환갑이 한달 남았는데 공익월급은 교통비와 점심식비를 실비로 후불지급포함해서 20만원쯤 될 터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라켓에 쓸 돈이 어딨어.. 그치만 라켓볼을 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 내게는 유일하게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 사각의 벽 안에서 공을 미친듯이 치는게. 머리속에 뭉게뭉게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오늘은 데이트가 있던 날이었다. 물론,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열흘 전에 연락이 끊겼다. 열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어쨌거나 1은 없어졌고, 나는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꼬박꼬박 메세지를 읽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낼까 짜증을 부릴까 하다가 그냥 라켓을 또 휘둘렀다. 지워져라. 지워져라. 끊어진 라켓의 스트링이 조금씩 벌어진다. 땀이 비오듯 흘러 눈을 훔쳐내지 않고서는 제대로 눈 뜰 수도 없을때까지 라켓을 휘둘렀다.
돈도 없다. 한 해 한 해 지나간다. 내 동갑내기 또래들은 왜 이리도 뭐든 척척 해내는 것 처럼 보이는지. 어찌어찌 살아간다. 걱정이 머리를 메운다. 할 수 있는 성실함을 다해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이에 많은 타협이 있다. 어쨌거나 나아지는지 아닌지 모르는 채 살아간다. 아니, 남들만큼 나아지지 않았으니 척척 해내고야 마는 친구들을 보며 웃기 어려워 하는 것 일테다. 그리고 그 사람. 벌써 2년이 넘었다. 벌써 일년도 아니고 2년이다. 미친 이게 무슨 70년대 순정 로맨스 드라마냐 XX하고 욕을하니 코트에 빙빙 돌아 메아리친다.
그래서 그렇게 부단히도 속여보려 애를 썼다. 별 사이 아냐. 안 좋아해. 아냐 이제 끝났어. 정리됐어. 개뿔 왈왈대고 있다. 꼴에 존심이 있었는갑다. 남앞에서도, 내게도 그렇게 되뇌이다보니 정말 그랬나보다. 웃기고 있네. 그건 그냥 필사적인 변명이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2년, 내가 다 황당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 나 참.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하.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었다. 당신과 있던 몇 안되는 추억과 말을 몇번이고 되새긴만큼이나 생생하게 벌써 2년이다. 아아. 아아아. 영화포스터가 떠올랐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라고. 엿이나 퍼먹어라 하고 공을 한방 빵 쳤다가 허공을 슝하고 빙글.
허리고 다리고 무릎이고 어깨고 안아픈데가 없었다. 지쳐서 벽에 턱 기댔는데 옷이 땀에 축축해서 벽의 그 차가움에 움찔하고 놀랐다. 여전히 당신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이유라도 말해줄 수 있는거 아닌가. 바쁘다거나. 귀찮다거나. 애인이 생겼는데 연락하면 죽는다고 엄포를 늘어놨다거나. 핸드폰이 맛이갔다거나. 목이 쉬었다거나. 아프다거나. 요금을 못냈다거나. 여러가지 있잖아. 말이 없으면 이게 무슨 아까 말한 대본 각본 대사 정해진 드라마 연극 영화도 아닌데 내가 각본 다음페이지 보고 어떤 상황인지 알 수도 없는거 아니냐. 하고. 무사하기는 한가 싶은거다. 밤 늦게 새벽에 고된일에 퇴근해서 여자혼자 막차타고 집에 터덜터덜 돌아가는 당신이 걱정되서 그런다. 연락이 씹혀도 읽기는 하는 그걸로도 다행이다 싶은 것이다.
라켓을 보니 스트링이 끊어져 다 풀어져간다. 세로줄이 벌어지니 가로줄도 느슨해진다. 힘껏 공을 쳐도 그만큼 세게 나가질 않는다. 오묘한 일이다. 데이트하자던 그 사람이, 서서 웃는 얼굴로 그렇게 반기던 사람이 열흘새에 생판 모르는 사람마냥 대하는 지금에. 결국 그렇게 된 그 날에 이 아끼는 라켓의 스트링도 툭 하고 끊어졌다. 그렇게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착각과 자존심사이에서 삭아버린 사랑인지. 혹은 그렇게 고이 간직한 남에게는 절대 보이고싶지 않을 진심이었을지. 어쨌거나 시간을 잡아먹고 낡아버린 그 마음인지. 마치 라켓의 스트링마냥 쓰고 또 쓰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 결국 끊어져버린 당신인지. 라켓을 고치러가야겠다. 내 마음도 고쳐줄런지.
웃기시네 언젠가 그때 왜 그랬을까 하며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이 사람아. 못된 사람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Shut up and take my love 이러고 싶지만 뭐 살아있는지도 안알려주는데 젠장. 넌 대체 뭔데 이러는거야 진짜 알수가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몰라 아무도 몰라 이건 뭐 내가 만나는 사람과 동일인의 연락처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진짜 아 대체 왜! 왜! 아니 그러면 좀 행동이 일관적이어야 하는거아니야? 대체 왜! 사정이 있으면 말을하면되지 한국말 영어 다 잘하는 사람이 대체 왜그래 진짜 아 진짜 아아아아아아아
공을 꽝 하고 쳤다
공이 찢어졌다
Holy crap on a craker.
멘탈이 붕괴된다.
그러니 롤을 해야겠다.
멘붕은 이붕제붕의 묘를 통해 다른 멘붕으로 막으면 좋다더라.
망할 봄에 올 황사때문에 더 화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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