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 입어 두번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좀 더 흥미진진한 기록들이 있는데요. 어떤게 있는지 살펴볼까요?
조선에 이슬람교도가 살고 있었다? 세종 4년(1422년) 2월 1일 회회교 사문 도로에게 쌀 다섯석을 내려줍니다. 사문이라 함은 출가해서 수련하는 종교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슬람교 이맘쯤 되는 인물이 있었다는 얘기군요. 몇 년 후에는 더 흥미로운 기록이 있는데 회회교도들의 옷차림이 틀려서 다들 혼인하기를 싫어하니까 옷을 바꿔 입히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조회를 할때 하던 회회교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경복궁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모여서 조회를 할때 코란이라도 낭송했다는 뜻일까요? 딱 세종때만 기록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고려때 원나라에서 건너온 이슬람 교도들이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선에도 집시가 살았다? 재인이나 화척 얘기가 아닙니다. 수유적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수유는 양이나 말의 젖을 뜻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선초기에 양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긴 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달단 그러니까 몽고의 후예를 자칭하면서 전국을 떠돌면서 목축업과 도살업에 종사한 것 같습니다. 이들이 공급하는 우유는 임금과 대신들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죠. 군역 면제자인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늘어나니까 폐지를 결정한거죠. 세종대왕때긴 하지만 아직 태종이 킹메이커로 지낼때라 이 분이 결정하셨습니다. 이때 우유맛을 잊지 못한 신하가 "그럼 우유 못 먹잖아요. 그러지 마셈."하니까 우리의 태종 "네가 알 바 아니다."라고 쿨하게 쌩까셨습니다.
가슴아픈 기록도 있는데요. 역시 세종때 북방의 백성들이 밀 색깔이 나는 흙으로 떡과 죽을 만들어서 배고픔을 해결했답니다. 아이티의 진흙쿠키가 떠올랐는데요. 성군이라는 세종때 벌어진 일이라 더 가슴이 아픕니다.
충과 효의 나라 조선에서는 나이많은 노인한테 옷과 식량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종때 무려 백일곱살 먹은 노인에게 옷과 쌀을 줬는데...아뿔싸! 왕이 하사한 옷을 받은 노인이 잠시 후 돌아가셨답니다.
조선에서는 5월 5일이 어린이 날이 아니라 돌싸움하는 날입니다. 태상왕이 된 태종께서 세종을 초청해서 종루에서 돌싸움을 구경하셨답니다. 얼마후 폐지되긴 했지만 당시 돌을 잘 던지는 사람들로 군대를 짜서 왜구를 토벌하러 간 적도 있다고 하니까 이때 우리 조상분들은 제법 돌깨나 던지셨나 봅니다.
조선 초기에는 정말 징글징글하게 비가 안 왔나봅니다. 태종때 뻑하면 기우제를 지냈는데요. 호랑이나 범의 머리를 한강에 넣기도 하고 흙으로 용을 만들어서 빌어보기도 하고, 용이랑 닮은(?) 도마뱀이나 도룡뇽을 잡아다가 빌기도 했답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귀화한 왜인이 일본식으로 기우제를 지내보겠다고 하니까 허락한 적도 있답니다. 그래도 역시 비가 안 오자 태종은 "허락한 내가 바보지."라고 심하게 자책하셨답니다.
1426년 한양에서는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2월 15일과 16일 양일간 불이 났는데 수천채의 민가와 관청이 타고 수십명이 사망했답니다. 이 사건이 터진 이후 세종은 소방서를 설치하라고 지시하셨고, 조선 최초의 소방서인 "금화도감"이 세워졌답니다.
지난번 들려드린 코끼리 얘기 재미있었나요? 조선이 사실 원하던 짐승은 물소였습니다. 정확하게는 각궁의 재료로 쓰이는 물소뿔이었죠. 명나라를 통해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아예 물소를 길러서 뿔을 얻으려고 한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전략 물자의 국산화'쯤 되겠네요. 명나라를 통한 수입이 여의치 않자 여차저차해서 일본에서 두 마리를 가져오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에서도 조선한테 선물로 주려고 무려 유구국, 그러니까 오키나와에서 수입한 겁니다. 일단 따뜻한 남쪽에서 기르게 하다가 봄이 되자 무려 창덕궁 후원에서 기르게 합니다. 거기다 전담 수의사까지 배치해서 번식을 시도합니다만 그후로도 계속 물소뿔을 수입하는 걸로 봐서는 결과가 좋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마지막은 조선판 "엄마찾아 삼만리'입니다. 1427년 대마도에서 늙은 여인이 옵니다. 기해년, 그러니까 이종무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했던 1419년에 부산으로 장사를 하러왔던 남편과 자식들의 소식이 끊겨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직접 찾아온 겁니다. 이때 대마도 정벌 직전에 비밀이 새나갈 것을 우려한 조선정부에서 각지에 있던 왜인들을 모두 붙잡아서 억류했는데 이때 이 여인의 가족들도 사로잡힌 겁니다. 남편과 딸은 순흥에, 그리고 아들은 봉화에 있었답니다. 소식을 들은 세종이 이들을 모두 모여살게 해줬답니다. 행복하게 살았겠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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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뿐 아니라 태종실록에도 회회사문(回回沙門)에게 집을 주었다거나, 회회사문이 수정을 캐는 특권을 얻은 후 수정을 바쳤다거나 혹은 쌀을 내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죠. 세종 즉위년의 실록에는 종묘에 배알하는 의식을 서술하면서 승도 및 회회인이 송축했다는 내용도 있고요. 큰 행사 때 이슬람식 기도도 행해진 것이 맞는 듯 합니다. 다만 1427년의 외래습속급지령 이후에는 뚝 끊기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