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번 편에 격려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__); 몸상태도 안 좋고 내용도 영~ 안 좋아서 열받았네요. 그냥 보는 거랑 쓰는 거랑 느낌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가볼게요 @_@)
+) 여요전쟁 두번째 편의 제목과 비교해 봅시다.
1. 섬에서 나오라
최우가 죽고 최항이 승계되는 중에도, 최항이 숙청을 행하는 가운데서도 몽고의 사신은 계속 오가고 있었습니다. 내부의 다툼 때문에 직접 병력을 투사하진 못 했고, 사신과 동진의 병력을 이용한 (뭐 직접 시켰다는 기록은 없지만 최소한 묵인은 있었겠죠) 위협만이 계속됐죠. 그 과정에서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뜯어간 거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최항이 집권한 이후에는 조금 달라집니다. 그 자신의 생각 차이인지, 시간이라도 벌려고 했는지, 아니면 이미 최우 때 계획된 것일지까진 알 수 없구요. 최항은 개경의 옛 궁궐터에 승천부를 짓습니다. 그 이유는 이거였죠.
"이때에 몽고가 고려의 조정이 육지로 나오지 않는 것을 문책하므로 이것을 경영하여 장차 옮길 것처럼 하였다." (동사강목)
최우가 살아 있을 때였는지 알 순 없어도 이 때 "왕이 강화도에서 나오겠다"는 약속을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사는 당연히 지지부진했고, 오히려 강화도에 외성을 한 겹 더 두릅니다. 이후 강화도는 삼중의 성벽을 가진 수도가 되었죠. 그 공으로 고종은 최항을 시중으로 삼고 작위도 후로 올리려 했습니다. 최항이 거절했지만요.
6월에는 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 무로손 등 62명이 도착합니다. 금방 들통나 버린 거짓말이었을 뿐이었죠. 열받아 있는 그들에게 신안공 왕전을 보내 강화도로 불러들인 후 또 걱정말라 입조하겠다 이런 말을 하고 보냅니다. 그 해 말에는 또 홍고이 등이 승천관으로 와서 나오라고 합니다. 결국 설득해서 강화도로 들어왔죠.
이 때 왕이 몽고 사신을 맞기 위해 기다리다가 문무백관이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혼자만 따뜻할 수 없으니 자기도 바람막이를 걷으라고 했다는 훈훈한 일화가 있습니다만 -_-a 그게 왜요?
홍고이는 술을 마시고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나라의 북쪽 변방이 너무 심하게 파괴되어 집에 울타리가 없는 것 같으니, 어떻게 다시 옛 서울에 도읍할 수 있겠는가. 강도에 의지하여 스스로 견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돌아가 아뢰어, 고려를 소란스럽게 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
의외의 말이었고 고종도 기뻐 더욱 후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만 그냥 해 본 말인데 신이 나서 기록에 남겼거나 술 취해서 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정작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왕이 너무 앞서 나가자 "국왕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행차하니 나는 바로 돌아가겠다"면서 협박을 했거든요. 왕이 가마를 멈추고 기다리자 활과 화살을 찬 채로 말 타고 그냥 돌진해 왔다고 합니다. -_-;
술 취해서 한 말이든 뭐든 그가 한 말이 이루어지진 않았구요. 오히려 "항복하고 육지로 나간다면서 성을 더 쌓냐"는 추궁에 "송나라 해적이 와서 방비하는 거다"고 둘러댔죠. 어찌됐든 이번에는 좀 일이 풀린 것 같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고종과 최항은 그걸 기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어쨌든 이 해 동진의 침입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곧 급변합니다. 몽케(몽가)가 정식으로 칸에 즉위했거든요.
2. 교섭 결렬
1251년 10월, 홍고이는 돌아와서 몽케 칸의 즉위 사실을 알린 후, 고종의 친조와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령합니다. 최항은 이번에도 그들을 강화도로 들인 후 머리를 짭니다. 누구는 "태자를 지금 보내야 된다"고 했고, 누구는 "일단 왕이 병들었다고 한 다음에 다시 오면 그 때 태자를 보내면 될 거다"고 했습니다. 결국 답은 해야 되는 상황, 의논은 해를 넘겨서까지 계속 됐습니다.
1252년 1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최항은 우선 이현과 이지위를 몽고에 보냅니다. 이 때 "저들이 만일 육지로 나왔느냐고 힐문하면 금년 6월에 나온다고 대답하라"고 이릅니다.
이 때 몽고에서는 아모간과 홍복원이 계속 고려를 치자고 건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칸이 된 몽케 역시 고려를 그냥 둘 수 없었구요. 4차 침공이 있고도 어느덧 4년, 1차 침공부터 따지면 21년이 흐른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인 훌라구에게 서남 아시아 평정을 명령했고, 이는 후에 일 한국이 됩니다. 남송에 대해서도 동생 쿠빌라이를 보냈죠. 고려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몽케는 일단 이현에게 고려의 상황을 묻습니다. 이현은 최항에게 들은대로 대답하면서 개경에 궁궐을 짓고 있다고 했죠. 몽케는 그를 억류한 후 사신을 보냅니다. 이 해 5월에 동진의 병력이 2000천이나(이전에는 백 단위였죠) 쳐들어왔고, 같은 달에 승천부에 성곽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봐서 몽고에서 사신을 보내면 열심히 하는 "척"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신이 온 것은 7월이었죠.
하지만 몽케는 이미 고려 토벌령을 내린 상태, 원사에는 이 때 야굴이 와서 고려로의 공격을 "중지"시켰다고 돼 있습니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공격은 그대로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실제 몽케는 다가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네가 저 나라에 이르러, 국왕이 육지에 나와 맞으면 백성은 나오지 않더라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속이 돌아오라. 네가 오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내어 치겠다"
이 때 서장관으로 억류돼 있던 장일이 이를 알고 비밀리에 고종에게 알렸고, 고종이 강화도를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의 논의가 다시 시작됩니다. 물론 최항의 "왕이 경솔히 강 밖으로 나가는 것은 대략 좋지 않다"는 말 한마디로 끝났죠. 이번에도 승천관에 있는 몽고의 사신들을 강화의 제포관으로 불러 술을 먹이면서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은 기다려 달라 이런 말을 남기면 될 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하여 다시 바다를 건너갑니다.
"최항이 천박한 지혜로 나라의 큰일을 그르쳤으니, 몽고 군사가 반드시 올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3. 다시 폭풍은 불고
최항은 다시 모든 도에 산성 방호별감을 나눠 보냅니다. 폐허가 된 서경에도 서경유수를 다시 두었죠. 고종은 자신의 주특기인 부처에게 빌기를 다시 시전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몽고군이 오지 않을 리가 없었죠.
몽케는 자신의 동생 야굴(야고, 야호, 야홀, 예쿠 등)을 보냅니다. 황금씨족이 왔네요 -_- 봄부터 동진의 병력들이 계속 고려의 국경을 넘어 왔고, 원주 사람으로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했던 자가 와서 이렇게 말 합니다.
"아모간과 홍복원이 황제에게 나아가서 아뢰기를, '고려가 강화에 겹성을 쌓고 출륙할 뜻이 없습니다.' 하자, 황제가 황제 송주(야굴인 듯)에게 명하여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동진국에게 길을 빌려 동계로 들어오고, 아모간과 홍복원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북계로 나와서 모두 대이주(안정복은 대이천의 오타인데 위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에 둔을 쳤습니다"
5월에는 야굴이 사신을 보냈고, 고종은 그들에게 금은과 포백을 나누어 줍니다. 그냥 전쟁 전의 의식일 뿐이었죠.
야굴의 곁에는 홍복원 뿐만 아니라 이현이라는 새로운 앞잡이도 있었습니다. 2년 동안 억류되면서 이현은 결국 몽고로 돌아서게 되었죠. 오히려 그는 야굴에게 고려를 치는 방법까지 알려줍니다.
"우리나라 도성이 섬 속에 끼어 있어서 공부가 모두 주군에서 나오니, 대군이 만일 가을 전에 갑자기 국경에 들어간다면 도성 사람들이 위급하게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야굴은 그 침공의 시기를 가을로 삼습니다. 군사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동계 쪽으로 향했고, 아모간과 홍복원을 북계로 보냈죠. 이미 폐허가 된 북계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요. 몽고군은 서경까지 그냥 자기 땅 가듯이 갑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최항은 다시 전국의 백성들에게 산성과 섬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때는 1253년, 5차 침공의 시작이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