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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2/01 23:19:54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윤관의 여진 정벌, 그리고 척준경 - (1) 역발산기개세
한창 자기들끼리 싸우던 여진족, 그 가운데 있던 한 여전사의 말,
"저 소리가 들리나 제라툴?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
여진족들의 광전사들은 그를 보고 "버틸 수가 없다!"며 도망치기에 급급했으며,
그가 야영할 때 쓸 불쏘시개를 찾기 위해 지뢰를 수거해 버려서 시체매는 스타 2에서 빠지게 됐고,
요격기를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아서 본체를 모두 차원 너머로 넘겨 버렸기에 우주모함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보처럼 옛 예언을 무시하며 서로 싸우기에 급급했던 그들은 하늘에서 (항마군이 떨어뜨린!) 불이 내리는 것을 보고야 새로운 적이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아, 내가 이런 놈에게 덤볐다니 미쳤구나" 할 겁니다.
한편 멀리서 싸우고 있던 왕자는 왕좌가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가 만나야 했던 적은 너무도 컸으니... 얼음 왕관은 백두산에?
그의 손에 사라진 수많은 존재들에게 묵념하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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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무반 출정
1104년에 맺어진 화친이 고려에서 사정해서 한 거라는 말도 있고 그냥 서로 합의한 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뭐 아쉬운 쪽이 고려긴 했죠. 얕보던 여진족에게 한 방 먹은 거니까요.
그 이후 2년간은 별 일 없었습니다. 여진족은 계속 조공하러 왔고, 요나라와도 별 일이 없었죠. 다만 숙종이 추진했던 남경, 현재의 서울에 도성을 쌓은 일이 겨우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좀 격하게 했나 봐요. 그런 상황에서 17만 대군을 편제했으니...
1106년, 아마 완안부 소속으로 추측되는 지훈이 이천여의 기병을 이끌고 천리장성 밖에서 머물렀고, 이렇게 청 합니다.
"(지난번 전쟁 후에 전 왕께서 용서해 주고 후히 선물을 주어 돌려보내주었으니) 상은이 지극히 두텁습니다. 바라건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진심으로 삼가고 힘써 조공하겠습니다"
이게 일 저질러 놓고 혹시나 해서 하는 건지, 적당히 맞춰 줄 테니 건드리지 말라는 건지는 알 수 없죠. 다만... 이 때 고려 내부에서는 훈련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음부(신령의 은밀한 도움)를 빌려 적도의 땅을 소탕하면 그 땅에 절을 짓겠나이다"
숙종은 이런 의지로 대규모 정벌군을 조직했고, 1107년, 예종 2년에 마침내 예종은 칼을 빼듭니다. 그 전에 점을 쳐서 길흉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김지기제坎之旣濟
일반적으로 좋게 보지만 처음은 좋지만 끝이 흉하다로 풀이되기도 한답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숙종 말에 있었던 임간의 일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사에 나온 것이 여진족이 선수를 쳐서 당한 거라면, 절요에서는 숙종이 먼저 만만하게 보고 임간을 보냈다가 지고 돌아온 거라고 돼 있죠. 어느 쪽이 맞을지는 모르겠군요. 아무튼 고려사절요에서는 오히려 여진을 만만히 보고 계속 정벌을 주장한 게 9성으로 이어졌다는 뉘앙스입니다.
목표는 확실했습니다. 동해안까지 가는 길에는 길이 적고, 특히 고려가 주목한 건 '병목'입니다. 이 쪽에 성을 쌓으면 길이 적어서 방어가 확실해진다는 거죠.
원수는 윤관, 부원수는 오연총, 그 중 기병인 신기군은 4만으로 추정됩니다. 17만의 대병은 12월 출병합니다.
2. 순조로운 시작
"신이 일찍이 성고의 밀지를 받았고 이제 또 엄명을 받드니 감히 3군을 통솔하여 적의 진을 파하고 우리 강토를 넓혀서 나라의 수치를 씻지 않으리까"
17만 여진 정벌군을 이끌게 된 윤관, 그는 오연총의 걱정에 이렇게 말 합니다.
"그대와 내가 아니면 누가 능히 만번이나 죽을 땅에 나가서 나라의 수치를 씻으리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또 무엇을 의심하느냐"
1107년 12월 4일, 고려의 대군은 장춘역에 집결합니다. 1차 목표는 장주와 정평을 되찾는 것, 이 때 윤관은 계략을 하나 생각해 내죠.
당시 고려에는 완안부에 밀린 여진족이 계속 투항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전 화친 때도 투항해 왔던 여진족 추장 14명을 돌려보내는 굴욕을 겪기도 했고, 이번에도 그렇게 망명해 온 자들을 돌려보내주겠다고 한 거죠. 그 때 보냈던 인물이 허정과 나불, 여기에 응해 고라 등 400여 명의 여진인들이 왔습니다.
윤관이 썼던 방법은 예전에 유금필이 썼던, 참 고전적인 방법이었죠. 신나게 술을 맥여서 재운 후에 몰래... 모두 죽인 겁니다. (이상한 상상하지 마요) 이 낌새를 알았는지 그냥 밖에서 머문 여진족도 있었는데, 이들도 최홍정이 기병을 거느리고 몰살시킵니다. 유금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적당히 협박한 다음에 돌려보내줬지만 이번엔 다 죽였다는 거겠죠.
이렇게 적 지도부를 한 방에 날린 윤관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어 진군합니다.
본군 : 원수 윤관, 부원수 오연총, 병력 53000
좌군 : 좌군병마사 좌상시 문관, 33900
중군 :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 36700
우군 :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전, 43900
윤관은 이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겠죠.
"니놈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장주와 정평은 순식간에 점령되고, 여진족은 가축도 버리고 달아나 버립니다.
뭐 이렇게 시작은 좋았습니다.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죠. 하지만 그 결과를 보면 이 때의 선택이 그리 좋았던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이 일이랑 별 상관 없을 수도 있구요. 후술하겠습니다.
3. 쾌진격
이어지는 고려군의 진군에 여진족은 동음성, 석성 등에서 저항했습니다. 특히 석성에서의 저항은 생각 외로 완강했죠. 이에 윤관은 아껴뒀던 치트키를 씁니다.
"해는 저물고 일은 급하니 그대가 가히 장군 이관진과 더불어 이를 치겠느냐"
그 말을 들은 그는 두 말 않고 출진합니다. 당시 그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죄를 그냥 뒤집어 쓴 건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윤관은 그의 무공을 생각해 힘 써 풀어 주었고, 척준경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장주에 종사로 있을 때에 죄를 범했는데, 공이 나를 장사라고 여겨 조정에 청해서 용서받게 하였으니, 오늘이야말로 준경이 목숨을 버려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이 일은 이렇게 간단히,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석성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입고 방패를 가지고서 적중에 돌입하여 추장 두서너 명을 쳐 죽이자, 이에 윤관의 휘하 군사는 좌군과 더불어 공격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그 모습을 그리면 이럴까요?
다음 편에는 창천항로를 적극 써 보도록 하죠.
마치 그 모습은
만렙을 찍고 블레이드 스톰을 쓰는 블레이드 마스터와 같았겠죠. 아니 방패가 있댔으니 이럴까요?
For the Korea!
이렇게 석성이 함락되면서 동북면 정벌의 첫 발이 시작됐습니다. 이 전투로 성을 함락됐고, 남은 여진족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처참했죠. 그 피를 밟고 고려군은 진군합니다.
다음 날, 고려군은 이동위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1200급이나 되는 목을 벱니다. 한편 중군은 고사한 등 35촌을 파하여 380급을 베고 230인을 사로잡습니다. 우군은 광탄 등 32촌을 파하고 290여 급을 베고 300인을 사로잡았고, 좌군도 31촌을 파하여 950급을 베었습니다.
윤관의 본진은 37촌을 파하고 2120급을 베고 500명을 포로로 잡았죠.
고려군의 진격은 어마어마해서 단 한 달만에 목표로 했던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여진과의 경계를 정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4개의 성이 만들어집니다.
英雄福吉. 굳이 풀이 안 해도 다들 아실 한자입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뜻으로 이루어져 있죠. 처음으로 쌓은 이 네 개의 성은 고려의 의지였습니다.
이런 동북 9성의 위치는 아직도 혼란입니다. 정말 이런저런 설이 있죠.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말도 참 다르고 말이죠. 지역만 해도 계속 왔다리갔다리 하죠. 4군 6진 편에서 경원성을 생각해 봅시다. 맨 처음 경원성은 경흥에 있었고, 후방의 경성으로 옮겨집니다. 이후에야 현재의 경원의 자리에 가죠. 단 수십년만에 이렇게 이동한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확실히 결론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뭐 최대한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
어쨌든 공격은 정말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오죽했으면 성을 쌓는 동안에도 여진은 변변한 반격을 못 한 것 같구요. 하지만, 먹는 것보다 지키는 게 훨씬 힘든 것이 영토죠.
여진족은 이 곳을 버리고 만주로 갈 것인지, 잃었던 땅을 되찾을 것인지 의논합니다. 당연히 주전론이 앞섰죠. 그리고 그걸 주도한 자는 완안오사속의 동생, 완안아골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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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나 보느라 솔직히 대충 ( ..)
왠지 저 이번편 놀려고 만든 거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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