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야자실은 섬과 같다. 우선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천장조명을 꺼 어두운 방이 쓸쓸함을 더한다. 또한 사람이 적다. 군데군데 몇 자리만이 불을 밝혔다. 기말고사가 한 달 넘게 남아있어서 친구들이 올 이유가 없었다. 처지는 분위기에 나도 그다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날은 글이 쓰고 싶었다. 우선 노트를 꺼냈다. 두껍고 투박한 노트였는데 질 나쁜 종이의 그 감촉이 좋았다. 그곳에다 무작정 글을 적어나갔다. 노트에는 줄도 쳐있지 않았다. 그래서 줄이 맞지 않았을 뿐더러 글씨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결코 지우거나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깔끔히 쓰느냐가 아니라, 쓴다는 것 그 자체에 있었다.
오직 컨셉만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지만, 그래도 서로 절실히 원하는 사랑’. 당시 좋아했던 god의 노래 ‘0%’의 주제였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런 연애 판타지는 있었다. 세세한 내용들은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우선 남자아이의 1인칭 시점이 되었다. 일부러 극적인 상황을 만들고 처음부터 감정표현을 절절하게 해보았다. ‘징징댄다’싶을 정도로. 나중에 읽으면 쪽팔릴 걸 알면서도 욕망대로 써보았다.
한 편을 다 적고나니 야자시간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수정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후배에게 보여주었더니 좋다고 해 주었다. 머쓱하면서도 기뻤다.
다음 날 학교 백일장 때 이 이야기를 적었다. 마침 주제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비오는 날>. 이것을 그대로 주제로 삼았다. 수월하게 썼지만 시간이 걸렸다. 친구들이 놀 시간동안 나는 꼬박 글을 적었다. 그 글이 나중에 장원을 타게 되었다. 상금도 받았고 학교 교지에도 글이 실렸다. 기뻤다.
글쓰기는 입시공부를 시작하면서 접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날 야자시간에 꼬박 글을 적었던 것은 나에게는 작은 일탈이었다. 외로워서 글을 썼다. 갑자기 찾아든 외로움이 나에게 ‘옛 친구’를 부르는 일탈을 저지르게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시를 위해 나는 많은 것들을 접기로 했다. 덕분에 지금도 내 글쓰기 실력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수준에 머물러있다. 읽고 싶었던 책, 만나고 싶던 사람, 관심이 가던 사람, 하고 싶었던 운동 등 많은 것들을 자제했다. 그런 노력과 포기의 결과로 나는 지금 학교에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도 생각해보곤 한다. 그렇게 가지치기로 잘라내던 내 마음들. 그것들이 사실 ‘곁가지’가 아니라 내 마음의 ‘줄기’였던 게 아닐까. 그 시절 그 날의 그 외로움은 내 마음의 위급신호가 아니었을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 그 마음들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그런 후회를 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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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조용하고 성실한 '척 하는' 학생이 제 고등학교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글쓴이님과 "일탈"은 비슷했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독서와 글쓰기를 꾸준히 했던 것이지요.
참가하는 학생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온갖 글쓰기 대회에 다 나갔는데 그때마다 상을 탔던 기억이 나네요.
문화상품권을 받으면 전부 힙합 음반을 샀습니다(...)
독서, 글쓰기, 음악(주로 힙합) 듣기에 집착적으로 빠져들었던 것이 아주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게 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중2병 같지만 그때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 힘든 시기였어요...
지금은 어떨까요? 아무것도 안 하고 담배만 피우고 있습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시간이 있을 때 이렇게 되는 게 스스로도 이해가 안되네요.
기안84의 단편선들이 생각나는 전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