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글쓰기이벤트 모음
14회차 - PGR21
13회차 - 여행
12회차 - 의료인
11회차 - 성탄절
10회차 - 추석
9회차 - 휴가
8회차 - 가정
7회차 - 인문사회
6회차 - 이해
5회차 - 추억
4회차 - 감사
3회차 - 지식
2회차 - 키배
1회차 - 자유주제
Date
2011/11/23 00:33:20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조선이 망한다 - 세도 정치
장화홍련 [돌이킬 수 없는 걸음]
극에 달한 내우, 박두한 외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권 출판 기념 >_<; 예약해놨으니 내일 올 거예요~ 꺄~ 선착순으로 사인본 준다는데 안에 들었을까요~
... 이런 분위기는 치우고.
참 대접이 안습한 두 왕이 있습니다. 헌종과 철종이죠.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정조와, 회광반조라 할 만한 대원군 사이에 낀 세도정치 시기의 두 왕들. 그리고 그 때의 세도 정치가들. 알아보겠습니다.
---------------------------
"여편네 사업이 어이 있사오리까마는 (중략) 상감 성취에 내 죄 있고 없기에 달렸으니 (잘 하면) 조종을 뵐 면목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게는 사업이니..."
순원왕후. 김조순의 딸이자 순조의 비로 두 차례나 수렴 청정을 했으며, 그 기간도 가장 길었습니다. 그녀가 여기저기 보낸 편지는 순한글로 쓰여 있어 국문학계의 주요 연구.... 아 이게 아니고 -_-; 그녀의 편지는 저렇게 왕을 잘 가르쳐야 된다는 것과 왕에게 충성해야 된다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딱히 안동 김씨만을 위한다는 느낌은 없죠. 아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권의 표지 모델인 것 같군요.
김병기는 대원군에 밀려 광주 유수라는 한직으로 떨어졌지만,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다른 양반들은 도망가는 와중에도 직접 가족들을 이끌고 상경합니다.
이들부터 해서 김병학, 김병국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는 삼정이정청 설치 등 삼정 문란을 없애기 위해 나름 노력을 했고, 상갓집 개 시절의 대원군도 잘 대우해 줘서 대원군 집권 후에도 중용에 배치됩니다. 안동 김씨 자체를 숙청하기도 어렵기도 했지만 자기에 잘 해 준 것 만큼이나 능력도 있었던 거죠.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는 등의 일을 할 때도 얼굴마담으로 (...) 열심히 욕 먹었고, 대원군이 벌인 사업에 돈도 아낌 없이 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세도 정치, 조선이 망해가는 시기로 불렸고, 이들은 그 주역이죠.
시작하겠습니다. _-)/
1. 어린 왕
어리다는데 왜 이리 늙어 보이지 -_-;
순조가 죽자 그의 손자 헌종이 불과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이 때 순웡왕후는 7번이나 수렴 청정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뭐 당연히 자기가 될 거라 생각해서 계속 뺀 걸지는 몰라도, 8살이라는 나이는 너무 부담되긴 했죠.
그를 도운 가문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안동 김씨는 정조가 순조를 부탁했던 김조순의 후예고 풍양 조씨는 순조에게 효명세자를 부탁 받은 조인영이 대표였습니다. 효명세자가 있을 때는 안동 김씨가 풍양 조씨에 약간 밀렸지만 아직 김조순이 살아 있었을 때였고, 그나 그의 아들 김유근이나 싸우기보다는 손을 잡자는 주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조순의 딸이 수렴 청정을 하게 되면서 둘의 전력은 다시 비슷해졌죠. 거기다 헌종의 비로 김조순의 7촌 조카, 김조군의 딸로 정합니다. 이렇게 헌종은 어머니는 풍양 조씨에 왕비는 안동 김씨라는 세도 정치 시기의 정말 전형적인 왕이 돼 버렸죠. 뭐 딱 둘밖에 없지만요.
헌종 3년, 1837년에 김유근이 병에 걸리면서 풍양 조씨의 강세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특히 기해박해, 병오박해(이 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합니다) 등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입지를 강화해 갑니다. 이런 와중 헌종 6년에 김유근이 죽으면서 안동 김씨는 더 밀리게 되죠. 그 동생 김좌근은 아직 어렸고, 아마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욕을 가장 많이 받아 먹는 탱커일 겁니다. 그와 맞붙은 자는 조만영의 아들 조병구, 당시 조득영, 조인영, 조만영, 조병기, 조병현 등이 좋은 관직을 다 나눠먹고 있을 때였죠.
+) 항렬이 있으니 이런 게 좋군요. 각기의 세대차는 돌림자로 파악하세요 '-'
헌종이 14살이 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거기다 김유근도 죽은 상황이라 승부는 더욱 풍양 조씨로 기웁니다. 헌종도 그 쪽을 선호했구요. 하지만 그 역시 이 때의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꽤나 강력하게요.
대체 어디서 나온 일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_-; 아마 매천야록이 아닐까 싶군요. 조병구가 어느 날 헌종을 만나러 갔는데 헌종이 이렇게 말 했습니다.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고 아주 혼쭐을 내 줬다고 하죠. 풍양 조씨의 중심이 어린 왕에게 욕을 먹은 겁니다. 이 때문에 조병구는 그 상태로 뒤로 자빠져서 죽었다 (...) 는 말도 있고 집에 가서 자살했다는 말도 있고 공식적으로 사약을 받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의 졸기에는 일단 없으니 카더라겠지만, 헌종의 불만을 알 만 하죠.
+) 엔하에는 왜 김좌근으로 돼 있을까요 -_-a 흐음... 출처를 알아보려 했지만, 귀찮았습니다. orz
헌종은 삼정의 문란이 가장 당면한 과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러 차례 혁파를 주장하며 백성들의 쌓인 빚을 탕감하라고 하면서 세도 가문들과 맞섭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죠. 군신이 하나 되어 힘 써도 부족할 판에 세도 가문들은 반대했고, 찬성할 때도 있었지만 잘 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수령들의 부패는 잘 들어오지도 않았구요. 이양선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냥 내보내자 천주교 탄압하자 이런 식이었죠.
세도 가문들은 군권을 쥐고 있었고, 이 때문에 헌종은 그들이 주로 차지하는 요직인 총융사를 어떻게든 제어하려 했습니다. 두 세도 가문이 아닌 자들을 앉히고 아예 왕의 친위부대도 만들려 했지만 이 역시도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동국사략, 삼조보감 같은 책들도 펴고 제방이나 저수지를 정비하면서 농업생산량도 끌어올리려 한 모양입니다만 환곡 문제가 큰 상황에서 뭐가 되겠어요. -_-;
이런 상황에서 큰 일이 벌어지니 헌종 12년, 조만영이 죽은 거였습니다. 안동 김씨의 반격이 시작됐죠. 둘이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 건 헌종의 죽음이었습니다. 향년 24세, 너무나도 어린 죽음이었습니다. 아버지 효명세자처럼 원래 몸이 안 좋았던 걸까요. 아니면 홧병이었을까요.
2. 강화 도령
그 뒤를 이은 것이 강화도령, 철종 이원범입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두 가문은 바빠졌습니다. 풍양 조씨에서 민 건 11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13대사손(하아-_-;) 이하전, 안동 김씨에서 밀던 건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이인의 서손 이원범이었습니다. 둘 다 약점이 있었죠. 항렬로 가까운 거야 이원범이었겠지만 은언군은 죄인이었거든요. 그가 강화도에 산 것도 이런 탄압에 겨우 살아남았던 거였죠.
안동 김씨는 풍양 조씨 측에서 손을 쓰기도 전에 그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여기에도 순원왕후의 입김이 닿았죠. 자기를 죽이러 온 줄 알고 도망가던 그는 엉겁결에 왕이 됩니다. 나이 19세, 하지만 제왕교육 같은 건 받지 않았으니 순원왕후가 다시 수렴 청정에 나서야 했죠.
풍양 조씨 측에서는 이를 문제삼습니다. 사실 철종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가 헌종보다 항렬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순조, 즉 순원왕후의 양자로 삼았지만 어쨌든 항렬에는 변함이 없었죠. -_-; 안동 김씨는 나름 위기에 몰렸습니다만 위기는 곧 기회였죠. 무슨 기회? 풍양 조씨를 한 방에 쓸어버릴 기회요.
마침 철종 즉위 이듬해에 조인영이 죽습니다. 안동 김씨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조병현, 권돈인 등 남은 풍양 조씨 세력을 몰아냅니다. 이런 과정에서 순종이었던 순조는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보다 먼저 종에서 조로 바뀌게 됩니다. 조 쪽이 더 뽀대 나거든요.
그러면서 철종의 비 또한 김문근의 딸로 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안동 김씨로 가득차게 됩니다. 순원왕후가 철종 3년에 수렴청정을 그만두지만 이제는 뭐 할 필요도 없었죠. 김좌근은 김수근, 김문근, 김병기 등을 이끌며 조선을 통치합니다. 일자무식이었던 철종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교동 아저씨(김좌근)이 아는 일인가?" 하면서 모든 걸 그들에게 위임했죠.
조선 후기의 민란은 이 시기 집중됩니다. 철종 13년, 1862년이죠.
그 시작은 경상도 진주, 이어 3월에 전북익산! 4월에는 경상도 개령, 전라도 음평, 5월에는 삼남 전체에서... 이걸 수습하러 간 박규수의 활약으로 주모자는 처형됐지만,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삼정 문란의 폐해를 강력히 주장하게 되죠. 그 때문에 나온 것이 삼정 이정청입니다만... 하늘도 돕지 않는지 한발과 수해가 일어나며 8월 이후 전국적인 민란이 벌어집니다. 9월에 제주도가 스타트를 끊었고, 함경도부터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까지... 그 동안 쌓인 모든 불만이 터져 나온 겁니다. 순조 때 홍경래의 난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평안도 차별의 영향도 컸었죠. 이 경우는 정말 순수한 농민들의 불만이었습니다. 그게 충격이었는지 원래 오래 살 목숨이 아니었는지 철종도 다음 해 세상을 떠나죠. 향년 33세였습니다.
그 이후 안동 김씨는 급히 다른 왕을 찾으려 했지만 이번엔 조대비가 한 발 빨랐습니다. 효명세자의 비, 신정왕후 조씨는 이하응과 손 잡고 그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양자로 올리니 그가 바로 고종입니다.
이하전은 철종에게 "여기가 이씨의 나라냐 김씨의 나라냐"고 직언했다가 역모로 몰려 죽었다고 합니다. 어찌됐든 풍양 조씨가 밀었던 그를 살려둘 순 없었겠죠. 하지만 그 동생 이하응은 달랐습니다. 상갓집 개니 하는 온갖 욕을 먹으면서 그는 굽히고 살았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도 하는군요) 안동 김씨도 그에게 미안했던건지 위협이 안 될 거라 여겼는지 잘 대우해 줬죠. 그랬던 그가 조대비와 손 잡고 모든 걸 뒤집은 거구요.
뭐 재밌게도 조대비의 목표와는 달리 풍양 조씨는 재기하지 못 했고,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교적 후대했지만요. 그렇게 세도정치는 끝납니다. 뭐... 대원군 몰락 후 민비의 민씨 세도 정치가 또 이어졌습니다만...
3. 세도 정치란...
철종 그림 하나 더
"탐욕, 교만, 사치에 빠져 실로 외척이 나라를 망치는 화근(亡國之禍)이 되었다. 다만 국권을 잡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오직 장동 김씨만을 알 뿐이오, 국가가 있는 줄을 알지 못 하였다. 혹자는 '장동 김씨는 나라의 초석이다'라고 하지만, 어찌 그렇게 볼 수 있겠는가?" - 매천야록
뭐 -_-a 세도 정치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진짜 솔직히 귀찮아서 대충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없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 평소 제 말투 ( ..)
묻고 따지기도 싫을 정도로 개판이었고, 그것보다는 그 때 민란 같은 근대적인 모습에 대한 연구를 더 한 거죠. 어차피 그 전후로 정조랑 흥선대원군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떡밥이 있는데 이걸 찾겠어요 -_-; 그래서인지... 이들을 직접 욕 한 사료도 찾기가 쉽지 않네요.
김조순처럼 김유근, 조만영 등 세도 정치의 중심은 최대한 관직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뭘 받아도 사양, 뭘 해줘도 사양이었죠. 하지만 김조순 때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 요직에 있던 이들은 모조리 세조 가문이었다는 겁니다. 거기다 김조순은 세도와는 관련 없는 이들도 추천하는 등 모두를 감싸안으려 했지만, 이후에는 그런 게 안 보이죠. 그래서 매천야록에서도 "김조순은 참 좋았는데 그 아들놈들이..." 이런 식으로 서술합니다. 뭐 자세한 건 예전에 쓴 김조순 편으로~
헌종 철종 실록에서 정말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당최 왕의 말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내가 진짜 솔직히 예전에는 실록에서 사람 이름만 쳐도 읽기도 싫은 토론이 나오고 왕은 화내고 신하들은 뭐라 하고 이런 게 나오는데 여기서는 찾으면 나오는 건... [누구를 어디에 앉혔다] [누가 뭐라 하니까 알았다고 했다] ... 어쩌라구요. 내용도 정말 없어요. 다른 실록에 비해서 정말 적죠.
이 정도로 왕은 아무런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고, 혹은 못 했고 거의 모든 결정은 비변사에서 내려졌습니다. 세도 가문들은 이 비변사와 총융청 등 병권을 틀어쥐고 자기들만의 정치를 했죠. 그 중 개개인은 훌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도 좋은 정치가 안 나옵니다. 가문 전체가 똘똘 뭉쳐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좋은 세상으로 간다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이런 게 가능할까요?
양란 후에 대동법으로, 영조 때 균전제로 삼정 중에 두 개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면 과제는 환곡이었죠. 수령들은 이걸로 열심히 백성들을 수탈했고, 윗 가문들에게 열심히 갖다 바쳤습니다. 자기들이 이런 걸 받아 먹는 상황에서 이걸 열심히 고친다는 건 불가능했죠.
헌종이 여기에 손 대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철종도 무시할 수 없었고, 당시 세도 가문들도 이를 그냥 좌시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난민들이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삼정이 모두 문란해진 것에 불과한데, 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은 환곡이 제일 큰 일입니다. 진주의 허포에 대해서는 이미 사계에서 전적으로 논하였고, 단성현은 호수가 수천에 불과하지만 환향의 각곡이 9만 9천여 석이고, 적량진은 호수가 1백에 불과하지만 환향의 각곡이 10만 8천 9백여 석인데, 이를 보충시킬 방도는 모두 정도를 어기고 사리를 해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조가에서 탕감시키는 은전을 또 어떻게 계문하는 대로 번번이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병폐를 받는 것은 우리 백성들뿐입니다."
민란 진압 후 박규수의 말입니다. 일시적인 탕감이야 여러 차례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을 막지는 못 했죠. 양반의 수가 늘어나면서 세금을 내는 수가 줄고, 그건 곧 개개인의 부담으로 연결되며, 수령들은 막으려 해도 막지 못 했습니다. 정조 때야 그나마 살 만 했죠. 하지만 그 이후는... 결정적으로 기후도 나빠져서 흉년도 계속됐구요.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렇게 나라가 흔들릴만한 조짐이 보였지만, 조선은 그 중에서도 상황이 정말 나빴습니다. 왕은 무력하고, 유림들은 세도 가문의 앞에서만 얼쩡거렸으며, 바른 소리를 내던 대간들은 이제 상대 가문을 없앨 때만 동원되었습니다. 지방의 사림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 하게 되면서 지방 곳곳에 서원을 만들었구요. 철종 후기의 민란은 이런 조선의 모순들이 모조리 드러나게 된 걸 말해 줍니다. 서양 열강의 침략 이전에 이미 조선은 망하고 있었습니다.
4. 망조
그 때 그 날 편에서는 좋다 좋다 했지만... 정조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선 김조순을 외척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신념도 어겼죠. 거기에 대간이라는 비판 세력의 침묵에는 영조와 정조의 탓이 큽니다. 정조 때 대간들이 탄핵한 신하는 세조 때보다도 적습니다. 세종 때는 물론, 대간 권력이 가장 강했던 성종 때와는 비교도 안 되죠. 영조와 정조는 탕평을 하면서도 절대 권력을 향한 질주를 했고, 정조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시스템 중 하나였던 언론을 침묵시켰습니다. 그 다음대인 순조 때는 그나마 많아집니다만 이건 벽파의 남인 공격과 시파의 벽파 공격을 생각해야죠.
유학자들도 갈 때까지 간 상태였습니다. 벽파가 남인을 없애고 시파가 벽파를 몰아내면서 조선의 당파다운 당파는 없어졌습니다. 정조의 희망처럼 그들이 싸우기만 할 뿐 잘 지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들은 다 없어졌고 남은 건 시파 뿐이었죠. 강력한 왕권을 가진 정조가 사라진 상황, 그런 왕한테 의지하던, 아무 색깔 없던 시파는 그저 다음 권력자에게 향할 뿐이었습니다. 그 다음 권력자는 더 이상 당수가 아니었죠.
효명세자도, 헌종의 노력도 크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가문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 했고, 그저 안동 김씨에 대항해 풍양 조씨를 키우려 한 것일 뿐이었거든요. 영정조 시기는 말 그대로 조선의 망조를 봉합한 것일 뿐... 그 문제 자체를 바꾸지 못 했죠.
그렇게 조선은 망해 갔습니다. 뭐 민초들의 반란은 너무 늦은 감은 있어요. -_-; 어쩌면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먹고 살기는 편했던 게 조선이 그렇게 오래 갔던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막장이 된 고종 때에도 선교사 등으로 온 외국인들은 "백성들은 먹기는 참 잘 먹는다"고 했으니까요. 이걸 먹을 게 없으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먹는다고 해석하는데... 이런 말도 했다는군요. "생필품의 부족이 가난이라면 조선인들은 절대 가난하지 않다" 뭐 카더라입니다만 -_-a
중국의 개혁은 아편 전쟁이라는, 정말 크게 한 방 얻어 터진 데서 시작됐습니다. 일본의 개혁은 중앙집권이 안 돼서 막부와 싸우기 위한 유신파의 필요에 의해 시작됐죠. 뭐 그 이전에도 막부가 조금씩 하려고는 했겠습니다만. 이런 면에서 조선은 정말 천천히 죽어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백성들이야 무시됐고, 양요도 강화도에서 살짝 수준이었으며, 조선을 뒤집을만한 힘과 필요를 가진 세력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천천히가 정말 무섭죠. 조금씩 침몰하고 있다는 지금 일본처럼요.
조선은 500년을 끌었고, 세도 정치는 60년간 계속됐습니다. 그들이 안던 모든 모순과 부작용이 세도 정치 말에 민란이라는 이름으로 터집니다. 이미 갈 때까지 간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정말 천명과도 같은, 내우와 외환의 환상적인 조화였습니다.
--------------------------------
이 다음에 "그리고 흥선 대원군이 집권합니다."를 넣으면 환상적인데...
요롷게 말이죠. 근데 안 할 거예요 '^' 고종은 진짜 안 다룰 예정. 최소한 올해는요.
연재게시판 내일부터 재개하겠습니다. ㅠ_ㅠ VRKRO님과 기다려주셨던 분들 죄송해요 ㅠ_ㅠ
근데 참... 헌종 철종이 불쌍해지기도 하지만 하필 이 상황에서 이런 어린왕들이 저런 식으로 앉아버리다니... 진짜 운명인지 뭔지가 있는 걸까요.
까먹고 있었는데 -_-a 헌종이 조병구에게 저렇게 말 한 이유가... 자기 앞에서 안경을 쓰고 있어서였습니다. 어른 앞에서 안경 쓰면 안 되는 시대였거든요. 이렇게 보면 살짝 ( ..)a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