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감수성이 듬뿍 들어간 글을 잘 올리지 않게 됩니다. 벌써 감수성이 줄어든 것은 아니고, 어렸을 때에는 '이런 생각은 나름대로 꽤 독특한 것이겠지? 이런 경험은 꽤 남다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70억 명의 인간 중에서 내가 그렇게 특별할 리가 없다는 너무 당연한 사실이 점점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수천 년 동안 수천만 명이 같은 생각을 해 보았을 텐데, 거기에 내 생각 하나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물론 굳이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감수성 좀 들어간 글을 쓰고 싶어서 미리 굽신굽신 하는 겁니다(응?).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 중에서도 성향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꽤 있는데, 저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굳이 비종교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평소에 이야기하지 않을 뿐, 세상에 목적은 없고, 우리는 그냥 현재의 우주가 가진 free energy gradient 이 너무 크다 보니 far-from equilibrium dynamics 가 지배하는 곳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emergence of complexity 현상이 발생하여 어쩌다 보니 존재하는 부산물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말씀드린 다소 현학적인 표현은, 실제로 많은 수의 과학자들이 생명의 기원 및 복잡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표준 모델입니다)
물론 존재의 목적 같은 것이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좀 공허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목적을 본인이 직접 정하면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말이죠. 해서 사상가들은 허무주의의 끝에서 초인 사상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실존주의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저도 생명 에너지가 가득 차있을 때에는 축복 >>> 공허라고 느끼면서 삽니다. 문제는, 저도 사람인지라 생명 에너지가 낮아질 때가 종종 발생하는데, 그럴 때 기댈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 제 기분이 딱 이 영화의 미키 루크 같습니다. 내가 가는 길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는, 때때로 꽤 버거울 수 있습니다.
저 영화의 사람들은 전부 나름대로 열심히 삽니다. 피를 튀기는 하드코어 레슬링, 스트립쇼, 정육점 직원 등등 다들 살아가려고 열심이지요. 하지만 영화는 노골적으로, 네깟 놈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봤자 결국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담이지만 저 영화는 맥주를 옆에 놓고 봐줘야 합니다)
제 직업은 공학자 + 교육자입니다. 둘 다, 저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종사하기에 아주 좋은 직업이지요. 저는 인간이라는 종이 (비록 free energy gradient 에서 파생된 byproduct 에 불과하더라도) 보다 위대한 존재로 끊임없이 발전해나간다는 그 느낌을 매우 사랑합니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세상에 맞서는 뭐 그런 거 멋지잖아요. 예를 들어서 이런 비극적 장면에서 나름대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약하다는 것이 우리가 의미 없는 존재라는 얘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도 맥주를 옆에 놓고 봐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고양 (이걸 주제로 쓴 책이 브로노프스키 교수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입니다. 물론 수십 년 전에 쓰인 책이기에, 요즘 대학생들이 읽기에는 조금 많이 고리타분할 것 같습니다) 에 기여하는 두 축은 새로운 지식의 발견과, 새로운 세대의 교육이지요. 해서 저는 기본적으로 행복합니다. ..... 는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업다운이 있습니다. '절대자가 정해준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없지만 뭐 상관없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라는 기분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가끔은 좀 징징대고 싶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근데... 징징댈 곳이 없군요.
특히나, '이게 다 뭔 의미가 있나' 라는 기분이 들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면, 위와 영화에서 핀베커가 하는 말이 딱 와 닿는 그런 상황이 됩니다.
'그녀는 열심히 싸웠지.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 그리고 죽지. 네가 뭘 아무리 열심히 하던, 이 결론은 변하지 않아. 나는 7년 동안 신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우리를 모두 천국으로 데려다 준다고 했어'
'나는 신을 믿지 않아'
'나도 그랬지. 하지만 너도 곧 그를 만나게 될 거야. 햇빛 속에서 말이지'
열심히 해봤자 죽으면 끝! 이라는 명제는 누구에게나 짜증과 공포를 유발하지만, 저는 특히나 인생은 본질적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인식하는 쪽에 가까워서, 저 장면이 참으로 보기 힘겹더군요. (참고로 저 장면은 원 영화에는 없습니다. DVD 의 보너스 트랙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징징대는 것도 나름 사치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다시 생각을 고쳐먹겠지요. 그렇게 인생은 계속되는 겁니다?
Rocky: 내가 이길 리가 없어.
Adrian: 어?
Rocky: 그 사람을 이길 리가 없다고.
Adrian: 아폴로?
Rocky: 응. 좀 걸으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사실 말이 안 되잖아. 난 그 사람과 레벨 자체가 달라.
Adrian: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Rocky: 몰라.
Adrian: 그동안 진짜 열심히 했잖아.
Rocky: 그건 그렇지. 근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애초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까.
Adrian: 그렇게 말하지 마.
Rocky: 괜찮아 애드리안.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사실인데 뭐. 근데 그것도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왜냐하면, 내가 진다고 해서 그게 뭐 문제가 되는 건 아냐. 경기를 하다가 죽을 수도 있지. 뭐 그것도 괜찮아.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 경기를 끝까지 가는 거야. 아폴로와 경기를 해서 끝까지 버틴 사람은 하나도 없었거든. 내가 만약 마지막 벨이 울리고도 링 위에 서 있을 수 있다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아니라는 걸 나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을 거야.
이건 임베딩이 안되는군요. 그냥 링크.... 를 걸어뒀더니 k' 님께서 임베딩이 가능하게 어찌어찌 소스를 만들어주셨습니다! k' 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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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니체에 심취하신 분의 글이군요. 뭐라도 끄적하고 싶으나 모르니 침묵.
인간등정의 발자취가 곧 재간할 거란 말은 4,5년전에 들었는데 검색하니 재간되었군요;; 니체전집이 새 판본(독일어)을 저본삼아 새로이 번역중이란 말을 들었는데, 이건 아직 안 됐네요.
레슬러는 맘이 아파 못 볼 것 같고, 선샤인은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