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밤, 너의 집 앞에서]
그녀가 이별을 고했던, 눈이 펑펑 내리던 그 겨울 밤.
마음 여린 그녀가,
휴대폰 액정을 매만지며 잠 못이룬 채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그 밤.
남자는 그녀의 집 대문 앞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 겨울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을 한 그녀는, 담담하게 이별을 고한 후, 돌아섰고
남자는, 돌아서지 못한채 한참을 서있다가, 그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늘은 까맸고,
그 까만 하늘 사이로 잿빛 함박눈들이 경쟁하듯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죽은듯이 고요했고, 빛 바랜 주황빛 가로등만이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까만 눈들이, 가로등을 지나 주황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잿빛이 되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잿덩이들이 머리 위로 흩날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별을,
혼자서 끌어안을 자신이 없었다.
차가운 자취방에 돌아가 무거운 겨울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 덮고 밤새 숨죽여 울 자신이 없었다.
순전히 그 이유 때문이었다.
남자가 집으로 돌아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던 건.
순전히 그날의 이별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그 헤어짐의 순간들을,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밀어내고 싶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부터, 이별의 카운트다운도 그렇게 시작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밤, 남자의 존재는 사라졌다.
그녀가 이별을 고하는 순간, 세상에서 그의 존재는 없어져버렸다.
적어도 남자에겐 그랬다.
이별도 혼자 맞이할 수 없게 된, 보잘것없는 스스로를 확인해버린 순간 그는,
그렇게 찌질하고 나약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혹여, 그녀가 너무 많이 내리는 눈에 놀라 잠깐 집 앞에 나와보진 않을까.
혹은 밤 늦게 동네 슈퍼를 가기 위해 뒤집어쓰듯 후드점퍼를 입고 종종걸음으로 나오진 않을까.
그리고 혹시, 남자가 잘 돌아갔을지 걱정하며 대문을 조용히 열고 얼굴을 내밀지는 않을까.
그 늦은 밤, 그녀가 집앞에 나와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황을 떠올리며
남자는 그렇게, 세시간이 넘게 그 처마 밑에서 떨었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윤 서 연
세 글자를 새기고..
그 위로 눈이 쌓여 글자가 희미해지면, 다시 세 글자를 새기고..
빨갛게 부어오른 손이 감각이 없어질때까지 그러기를 반복했다.
그의 생에 가장 긴 겨울밤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영하의 기온보다 더 차가운 그녀의 이별 통보와 함께.
그렇게 세시간 즈음 흘렀을까.
흰 담배갑은 텅빈 채로 쭈그러 들고,
종아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딱딱하게 굳은 채로 더이상 감각이 없어지고,
양볼부터 손등, 발목까지.. 추위에 노출된 모든 피부가 전부 갈라지듯 쓰라리게 터지고
아무런 미동도 못한 채로 그저 조용히 숨만 들이마셨다 내쉴 수 있게 되버린 순간까지,
그는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있다간, 깜박 잠이들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무서웠다.
무섭고, 겁이 났다.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남자는, 근처 편의점을 찾았다.
멀쩡한 내 집, 내 방을 두고 한참을 떨어진 그녀의 동네에서
이 겨울 새벽에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편의점을 찾아 떠도는 스스로의 모습이 문득, 참 우습게 느껴졌다.
그녀를 바래다 준 후에 가끔 들러 담배를 사던 그 편의점의 간판은 여전히 환했다.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남자 알바생은 반가운듯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남자는 시선을 애써 피한 채 컵라면 하나, 삼각김밥 하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어? 오늘은 담배 안 사세요?"
"네.. 끊을려구요.."
알바생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와,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한번에 끊을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가 항상 걱정하고 싫어했거든요. 이제라도 끊을려구요."
남자는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들고 구석으로가 조용히 물을 받았다.
편의점 안에서 바라본 함박눈은, 환하고, 희었다.
마치 그녀의 얼굴처럼, 환하고, 희었다.
그렇게 컵라면 하나, 삼각김밥 하나로 허기를 때우고 나서,
남자는 더 살 물건이 있는 사람처럼 한참을 편의점 안을 빙빙 맴돌았다.
그렇게 언 몸을 녹이다가.. 결국 다시 편의점 문을 나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이제 정말 가야겠다..'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고 지켜봐주지도 않는 이런 한심한 짓 그만하고 집에 돌아가야겠단 생각에
남자의 발걸음은 그녀의 집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눈발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몇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남자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자꾸만,
지금 이 순간에,
왠지 그녀가 처마밑에 나와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아가면,
왠지 그녀가 거기 서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복잡하고 서글픈 얼굴로,
처마 밑 한켠에 버려진 담배 꽁초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남자는 발길을 돌렸다.
그리곤 달려갔다.
몇번을 미끌어져 넘어질 뻔하면서도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앞만보며 미친듯이 달렸다.
30초라도 늦으면, 그녀가 그냥 들어가버릴 것만 같은 생각에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그렇게 달렸다.
그렇게 가뿐 숨을 몰아쉬고 당도한 집 앞에는,
그 곳에는,
남자가 앉았던 자리 위로,
그리고 윤서연이라고 새겼던 이름 위로,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복히 쌓인 눈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일어설때만 해도,
남자의 마음 속에 각인된 그녀처럼, 선명했던 그 자리가, 그 이름이..
어느새, 그녀 마음 속의 그처럼, 흔적도 없이, 내리는 눈발에 파묻혀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순간, 무언가, 억울하고 야속했다.
입술을 깨물고 차갑게 굳은 맨손으로 처마 밑에 눈들을 깨끗이 쓸어내기 시작했다.
손이 시려운지도 모른채 한참을 쓸어낸 후에야 그는, 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다시 눈 위에 그녀의 이름을 새기려고 검지 손가락을 펴는 순간..
겨울밤 추위 속에 울그락 불그락 부르튼 자신의 손, 딱딱하게 굳은 그 마디 마디가 보였다.
그 손을 보는 순간, 남자는, 무언가, 서러워졌다.
순간.. 울컥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다.
'지금 이 밤에, 나는 혼자, 뭐하는 걸까..'
'우리 엄마가 지금 이 모습을 보시면 뭐라 하실까..'
문득,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서러워졌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밤하늘만 바라본 채로, 부옇게 고였던 눈물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한참 동안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던 그 자리를 바라보던 남자는,
소복히 쌓인 눈 위로 천천히, 이름 석자를 써내려갔다.
이 정 우
그렇게 적고나니,
한없이 미련하고 서글픈 이름 세 글자를 적고나니,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남자는 울었다.
남자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숨 죽여가며 한동안 꺽꺽대며, 그렇게 울었다.
미안함에.
스스로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지난 2년의 삶에 대한 미안함에.
남자는 울었다.
그녀와 만난 2년이란 시간 동안
남자는 자신이 무얼 먹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은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그녀가 무얼 먹고 싶을까 고민했고,
그녀와 헤어진 저녁에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했다.
문자를 보낸 후에는 언제쯤 답장이 올까만을 기다렸고,
문자를 주고받다가도 남자는 언제쯤 전화할까만을 생각했다.
잠들기 전에는 다음 주말에는 그녀와 무엇을 할까, 어딜 놀러가야 그녀가 좋아할까..
그렇게 그녀의 마음 속만을 궁금해하며 지내 온 2년이었다.
그것이 남자의 전부였고
자신의 마음, 자신의 심장이 멍들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스스로를 보듬지도, 끌어안지도 않았던 2년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그의 퉁퉁 부은 손가락이, 처음으로 남자의 눈에 보였다.
벌겋게 부은 손가락이, 아팠다.
자신의 손가락도 이렇게 퉁퉁 붓고 쓰라릴 줄 안다는 걸,
남자는 그때서야 알았다.
그녀 앞에서는 손가락에서 철철 피가 나도, 괜찮다며 바보같이 씩 웃던 그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
손가락이 아팠다.
남자는 손가락이 아팠다.
얼마나 지났을까, 젖은 눈물을 간신히 삼키고 메이는 목을 참아넘기며,
남자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우야,
미안해."
남자는 그렇게 겨울밤의 칼바람 속에 눈물을 삼키며 숨죽여 뱉어냈다.
"미안해.. 정우야."
그녀와의 이별은 그렇게, 그를 향한 최초의 고백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