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은 도둑이 든 것 마냥 어지러져 있었다. 서랍은 몇 개가 혀를 내밀고 있고, 책들은 여기저기 분산되어 매복한다. 옷걸이는 썰렁한데 행거위에는 옷이 산처럼 쌓여있고 며칠 째 개놓지 않은 이불은 꾸깃꾸깃 굴러다닌다. 책상위에는 노트북과 전선들, 책과 노트 필기구 그리고 햄버거 껍질이라거나 휴지따위가 대충 섞여있다. 한숨이 푸욱 나왔다. 너무 오래 정리를 안했구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가는 땀방울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정리를 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이불을 개고, 책을 한쪽에 모은다. 치워진 곳에 쌓인 먼지를 물티슈와 걸레로 적당히 닦아내자 조금은 사람사는 곳 같이 변했다. 이마를 쓱 훔치고 한숨을 푸 하고 내쉰 뒤에 이제 서랍을 좀 정리하려고 낼름, 뱉고있는 서랍의 물건을 꺼내었다. 그때 갖가지 서류들사이에 끼어진 빨간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하고 싶어서 스윽 꺼내자 머리속 구석에 숨겨져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그리고 아주 선명한 색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지만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여전히 잊지 못해서 생각나는 그 나날들을 말이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건 대학교 1학년 4월의 일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3월 내내 학교를 나오지 못하다가 아이들이 다들 익숙해질 때 쯔음 첫 등장한 그 아이는 얼굴이 파리하고 팔 다리도 가느다란것이 걸음이 조마조마 해 보이고는 하였다. 뒤로 묶어 내린 새까만 머리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게 작지는 않은 키. 안경 쓴 얼굴은 검은 테와 창백한 피부가 대조되어 약간 신비해보였던 그 아이는 첫 인상과는 다르게 아주 잘 웃는 아이였다. 얼굴이 험상궂고 덩치가 커서 아직까지도 친구들이 조금 어려워 하던 내게 먼저 다가와서는 "나도 술 사줘!"라며 당차게 외치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이 전부 수업을 통일해 들을 때에도, 나는 유독 내가 듣고 싶은 과목들을 쫒아다녔다. 그런데 묘하게 그 아이는 나와 겹치는 수업이 가장 많았다. 혼자 앉기를 좋아했던 내게 끝까지 옆자리를 밀고 들어와서는 매일같이 배고프다며 징징대고는 했다. 하루는 학교 식당 지하에서 둘이 라면과 떡볶이를 하나씩 붙들고, 넌 무슨 그렇게 마른애가 어디로 다 들어가냐며 핀잔을 주었더니 새초롬히 흘겨보고는 총총총 만두 하나를 더 사오고는 그랬다. "넌 무슨 덩치도 산만한게 먹는게 그렇게 째째하냐!" 다이어트 중이라고 투덜대자마자, 살 빼서 뭐하냐며 자신의 남성관을 줄줄 쏟아내는 그 아이에게 "식기전에 젓가락질이나 부지런히 하셔야죠?"하며 웃고는 했다.
한 학기가 끝나 갈때쯤, 학과 친구들은 우리 둘 보고 야수와 마녀라고 했다. 덩치크고 무서운 남자와 창백하고 가녀린 여자. 허구한 날 붙어다니며 투덜대는 우리 모습이 그네들한테는 꽤 귀엽게 느껴졌었나 보다. 그 애는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방학때 자기 못 본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말라며 하하하! 하고 웃었다. 뒷꿈치를 슬쩍 들어서 내 어깨를 탁탁 치고는 돌아서는 옆 모습에 약간 쓸쓸한 얼굴이 보였다. 그 표정이 어딘가 쿵 하고 마음을 건드린 참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잡아 세운다는 것이 그만 뒷 머리를 잡아버려 학교 복도에는 아야야! 하는 비명소리가 영롱히 울려퍼졌다. 앗차 하고 손을 놓자 뒤로 몇 걸음 휘청 휘청 하던 그 애는 스니커즈를 신은 발로 내 정강이를 퍽 찼다. 그리고는 무슨 놈의 다리통이 이리 단단하냐며 자신의 발을 붙잡고는 쭈그려 앉아서 울상으로 올려다 보는것이다.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들킬까 싶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방학때 밥이나 먹게 종종 보자." 생각보다 무뚝뚝하게 튀어나온 말에 아차-싶었지만, 그 애는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는 찰싹 소리가 나게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날 보고 싶다면 니가 밥을 사라 엣헴!" 그 당당함에 푸핫-하고 웃으며 우리는 여름을 맞이했다.
그 해의 여름은 무진장 더웠다. 그리고 우리는 바퀴벌레마냥 하루가 멀다하고 만났다. 할일도 없으면서 학교에 기어나와서는 캠퍼스를 빙글빙글 돌다가, 이제는 너무 자주 가서 익숙한 맞은편의 어린이 대공원도 갔다가, 옆 학교의 커다란 호수에 오리를 보러도 갔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는 뭐가 이리 덥냐며 셔츠를 펄럭이다가 슬쩍 보이는 무방비한 살색에 나도 모르게 눈을 뱅글뱅글 돌리면 되려 "내가 좀 섹시하지? 이쁜건 알아가지구."라며 눈을 흘기곤 했다. 내가 언제 그랬냐며 버럭 할 때마다 그 애는 약이라도 올리는 듯 더 크게 옷을 펄럭이며 왜 눈을 못 마주치냐고 실실 웃는 것이다. 단발머리로 자른 모습이 너무 예뻤지만 모르는 척 하는 내게 바뀐게 없냐고 계속 머리를 매만지던 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뻥 걷어찰 때에도, 낡아빠진 컨버스를 신는 나에게 어느날 갑자기 대뜸 있지도 않은 오빠 타령을 하며 집에 굴러다니던게 네 것보다 깨끗하다며 준 새 컨버스를 받을 때에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발이 채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며 울상이 된 네가 "멍청한 알바가 그러니까 더 커야 된다고 했는데도.."라며 중얼대며 신발을 다시 뺏아갈때에도 네게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새어나갈까 두려웠었다. 우리의 매일은 이런 쓸데없는 외줄타기 같았다.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살랑이면서도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이 빠른 듯 혹은 느린 듯 지나는 하루하루였다. 언제나 먹는 밥이 질리면 한시간이 넘게 걸어가서 이상한 음식점을 들어가 보기도 하고, 서로 주머니를 탈탈 털어 겨우겨우 소주 두병을 사가지고는 과실에서 둘이 홀짝 홀짝 마시기도 했다. 술이 취하면 배시시 웃는 그 애가 조금 두렵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 아이는 술이 조금만 들어가도 엎어져 잠들곤 했다. 가끔은 아침까지 한 명은 책상에서, 한 명은 쇼파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에 안녕-하고 집으로 가서, 다음날 똑같은 시간에 안녕-하고 만나곤 했다.
데려다 달라는 말에 엿이나 먹으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쫄래쫄래 따라갔던 일, 한 입만 달라던 아이스크림을 한번에 왕창 넣었다가 코가 시큰거려 눈물이 찔끔 나던 일, 신나게 투닥대다가 마주친 눈에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던 일, 바보도 안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렸을 때 이마를 맞대며 열이 왜이리 높냐는 말에 속으로 너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려서 그렇다며 비명을 지른 일. 도서관에서 마주보고 앉아 졸고 있는 네 조금 벌어진 분홍색 입술만 바라보다가 네가 조금 움찔 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느라 한시간 동안 같은 페이지만 수십번 읽었던 일. 술을 진탕 마시고는 화장실을 가고싶다며 책상위에서 볼일을 보려던 너를 안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여자화장실까지 들어갔다 나온 일. 잘 생긴 남자가 번호를 따갔다며 자랑하는 네가 괜시리 미워 오늘은 바쁘다고 만나지 않았던 일. 무작정 따라오라며 잡는 네 손이 생각보다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꼬옥 잡자, 휘둥그래진 눈으로 징그럽다면서도 손을 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던 네 빨개진 귓볼까지. 뜨거운 여름에 하루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던 나날들이 차례차례 떠올라서, 아련한 마음에 청소를 하다말고 너와 자주 듣고는 했던 라디오를 틀었다.
2학기를 일주일 앞두고, 그 아이는 가족여행을 간다며 나중에 보자는 짧은 문자 하나를 남겨두고 훌쩍 떠났다. 그때쯤 친구들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슬쩍 운을 띄울 때마다 '오오오오~~~~'라는 환호성을 듣고는 했다. 머쓱한 쑥쓰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러나, 그 아이와는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떠남의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2학기가 되며 그 아이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대신 내게 남겨진 것은, 그 아이에게 노래하며 쳐 주고 싶던 기타와 한 쪽 어깨에 기댄 따뜻한 기억, 그리고 수줍어 자세히 담지 못한 희고 고왔던 살결의 내음이었다. 쓸쓸한 가을바람이 옆구리를 간질일 무렵에, 그 아이와 친하게 지냈던 여자아이가 내게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빨간색 편지봉투를 조심스레 뜯자 봉투사이로 그 아이의 내음이 가득했다. 마치 옆에서 나시만 입고 다리를 펄럭거리며 떠들던 그 때 처럼.
안녕! 네가 이거 읽을 때 쯤 나는 독일에 있을꺼야 독일!
넌 분명히 나 없다고 또 우울해져있겠지?
너랑 놀아주는건 나 혼자였는데 이제 어떡하니.
나 외국으로 나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일부러 니가 울고불고 난리칠까봐 이렇게 훌쩍 떠난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구..
독일에서 좀 쉬면서 건강해질거야.
돌아가면 또 만났으면 좋겠어.
내 어리광 매일 받아줘서 고마워!
나한테는 꿈만 같은 매일매일 이었어.
나 글씨 진짜 못쓴다..
되는대로 읽어 임마!
헤헤.
다음에 만날때,
애인 만들구 그러면 배신이다 너!
얼른 군대도 갔다오구! 그래야 나 돌아가면 매일 또 같이 놀지.
...
보고싶을꺼야..
다시 만나면, 나 꼭 안아줘야한다!!
수줍어 하지말고 멍충아 등치는 산만한게 으휴.
내 스무살을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는거 알지?
돌아왔을 때 잘해라 짜식아 히히
그럼 건강하게 잘 있어!
짤막한 편지를 읽었을 때에, 무언가 뭉클한 느낌이 들었었다. 학교를 다녀와 채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한숨이 푹 나왔다. 좋아한다고 말할 걸 그랬어. 침대위에 누워있는 밤마다 연습한 기타를 들었다. 그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조금 늦게 들려주지 뭐 하고 생각하며 나를 달래어 보았지만, 금세 돌아오겠거니 했던 그 아이는 그 뒤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이 대신 돌아온 것은 두 통의 편지였고, 그것은 그 아이가 아닌 그 아이의 어머니께서 보낸 것이었다. 국제우편으로 온 두 통의 편지중 내 앞으로만 온 것을 받아 열어보니, 약간 눈물이 얼룩져 쭈글해진 편지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미안하다는 말만 잔뜩 있는 바람에 금세 눈가가 흐려져서 잘 읽을 수 없게 되버렸다. 남 몰래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도 자꾸 울렁거리는 글씨는 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그러는 동안에 난 그 아이가 지금쯤 내가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갔다는 것을 머리로나마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배웠다. 독일 하늘은 어느쪽인지 몰라서 무작정 기타를 들고 노래했다. 태우지 못한 담배와 덩그러니 놓인 술잔 두잔. 돌아오지 않을 그 아이에게 노래했다. 이제는 도착하지 못할 편지를 노래했다. 부칠 곳 없는 마음을 노래했다. 하늘에서 태워올린 마지막 편지에 울먹이며 노래했던 그 날이 떠올라서 콧등이 시큰해졌다. 청춘이었구나, 하고 씨익 웃어보려했지만 그 여름날의 기쁨이 아파서 요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아직 버리지 못한 그 편지를 소중히 접어 서랍 한 켠에 두었다. 깔끔해진 방 한켠에 놓인 먼지쌓인 기타를 보며, 아직까지 애인이 없는건 다 너 때문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못된 년, 하고 중얼거려보았다. 틀어둔 라디오에서는 때마침 그 애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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