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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0/13 00:01:33
Name 해바라기
Subject [일반] 어느 평범한 복학생이 살아가는 이야기

외할머니 상 치르고 나서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일기는 일기장에서 써야하는데 일기장이 없네요 ㅠㅠ


1.

외할머니가 큰 선물을 주고가셨어요.

할머니는 여름 때부터 많이 아프셨어요. 밥도 드시지 못할 정도였어요. 말 그대로 하루-이틀 하는 시기였어요.
급하게 병원에 내려갔어요. 의식조차 없으실줄 알았는데 절 보더니 지긋이 웃어주시고 제 이름을 불러주셨어요.
5년전, 80대 초반에도 농사일 때문에 산 탈 일이 있으면 며느리(저에겐 외숙모)보다 더 빨리 올라가시던 체력은 어디갔는지,
밥 한 수저 넘기지 못해 영양제에 의지하는 할머니 모습을 보이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엄마는 계속 빌었대요. 이번 여름만 넘기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병원에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두 달을 더 버티셨어요.

날이 선선해지자 할머니의 소원대로 집으로 모셨어요.
물 한 모금 잘 넘기시지 못하시는 분을 집으로 모신다는 것은 이별을 맞이하기 위함이었죠.

하루만에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며칠을 더 버티셨어요.
저희 엄마가 진 마음의 빚을 갚으라고, 원없이 할머니를 닦아드리고, 말동무 해드리고, 호박죽이라도 더 자시게 해드리라고
그렇게 할머니는 버틴 것 같다고 엄마가 이야기 하시더라구요.

임종 직전의 순간, 할머니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아들들(저에겐 외삼촌)을 위해 목숨을 끝까지 붙들고 계셨나봐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숨을 몇 번 끊는 마디숨을 쉰다고 하는데, 아들들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는 그 마디숨으로 몇 시간을 더 버티셨어요.
아들, 딸들이 모두 도착하자 그제서야 할머니는 눈물 한 방울을 주룩 흘리셨고, 몇 시간 후 편안히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모든 자식들이 임종을 지킬 수 있게 생의 끈을 놓치 않으시고, 밤이 아닌 아침에 돌아가셔서 긴 3일장을 치르게 해주시고,
장례 때 힘들지 않도록 여름을 끝끝내 버텨주신 할머니께 정말 감사드려요.
임관하실 때 보니 체구가 정말정말 작으시던데....... 많이 보고 싶을거에요.




2.

저는 영어 울렁증이 심해요.

군대에서 공부해서 텝스 800점 중반대가 나왔어요. 그러면 뭐해요. 외국인 앞에 서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합니다.
영어공인인증 점수와 대화능력은 별개에요.

졸업 필수 요건인 영어 수업을 듣고 있어요.
평소 관심이 있는 국악개론을 들어서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데는 문제가 없는데
영어 에세이, 영어 소감문, 영어 시험지 생각만 하면 눈 앞이 깜깜해져요.
교수님이 한국말 하실줄도 아는 프랑스분이신데...... 국어로 쓰면 0점 맞겠죠? ㅠㅠ

에휴...... 돈 벌어서 어학연수 꼭 가고 싶네요.




3.

머리가 나빠졌다는 생각보단, 머리가 굳어서 돌아가질 않는 느낌이 팍팍 드네요.

2학년때부터 지금까지 약 4년 동안 전공 공부와는 빠이빠이 했어요.
그랬더니...... 에휴...... DNA 소리만 나와도 헥헥 거려요.

가아끔, 다른 교양 수업을 들을 때 머리가 휙휙 돌아가는거 보면
아, 나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데
전공 수업 때 저보다 어린 새파란 2학년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내용을 저만 못알아 들을 땐.....
그 중에 에이스가 날카로운 질문을 팍! 다른 친구들 고개를 끄덕! 나만 뭥미? ㅠㅠ 이럴 땐 정말......
머리에 기름칠을 빨리 하고 싶어요. 나빠졌다고 믿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너무 슬퍼질 것 같아요...




4.

제대하면 여자친구 생긴다는 말.

누가했죠?

사기꾼.

거짓말쟁이.






5.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 제 앞 뒤로 1, 2학년들로 보이는 꼬꼬마들이 우르르르르르 몰려있는 모습을 보면 가끔 옛날이 그리워요.

저도 옛날엔 참 많은 동기들과 함께 우르르르르르 떼를 지어 다녔었는데,
그 친구들과 긴 줄을 서면 언제 그 줄이 줄어드는지도 모르는채 수다를 떨었었는데,
그 친구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우리 24살들을 참으로 인생이 버겁네요.
아니, 인생이 버겁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는 시기일까요?
졸업을 한, 혹은 할 여자 아이들은 자소서와 취직 실패로 인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고
2학년 즈음부터 사시, 행시, CPA, 변시 등을 준비한 친구들은 슬슬 결과가 나와야 하는, 혹은 발표가 나는 압박감에 절어있고
저처럼 제대하고 복학한 친구들은 '어린 뇌'들 따라잡는다고 헥헥 거리고

24살 아가씨들은 꼬꼬마 학생들이 아닌 직업을 가진 남자를 찾다가 덜컥 결혼이 두려워 연애를 피해버리고
24살 아저씨들은 정신연령이 맞는 21살, 22살을 찾다가 진짜 아저씨 취급을 당해 차여버리고

스물 넷이라는 나이는 조금 어중간한가 봅니다.
조금 힘든가 봅니다.

저도 스물 다섯 되면 봄날이 오겠죠?






6.

꿈은 꾸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품은 것만으로 아름답다는데

현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복학생의 꿈은 무엇일까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려면 미친듯 그렇게 달려들어야 할텐데......

돈, 안정성, 전망, 가족, 결혼

이런것들을 생각하기엔 빠른데, 생각하지 않기엔 부모님의 경제력이, 건강이 쇠퇴회가는 나이가 24살인가 봅니다.



저만 답답한건 아니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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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닉스드라이
11/10/13 00:07
수정 아이콘
같은 24살, 같은 복학생

처지로서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네요

물론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있겠지만

복학하면 다 그렇잖아요

뭔가 어색하고 친해지고 싶어도 어색하고 친해져도 어색하고 하하;;

저 같은 경우는 그냥 몇일 혼자 다니다가 같이 다니고 싶은 학생?이랄까 하는 데

제가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했어요 물론 같은 복학생들이지만 나이는 21.21.24 부류거든요

먼저 다가가보세요. 24살이 어중간하지만 늙은 나이는 아니잖아요
SoulCity
11/10/13 00:09
수정 아이콘
공감가는 글이네요.
내용과는 별개로 글을 참 편하게 읽히게 잘쓰시는거 같애요. 답답하더라도 힘냅시다 ㅠㅠ 화이팅!
빈울이
11/10/13 00:17
수정 아이콘
같은 24살, 같은 복학생
처지로서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네요(2)

1. 저도 고3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가 생각나네요.
외삼촌, 이모들이 다 모일 때까지 숨을 놓지 않으시던 모습과 임종하셨을 때 새햐얗던 손...
2. 저는 과 특성상 영어와 빠이빠이한지 꽤 되었네요. 하지만 졸업하려면 영어전용수업 들어야하는데...
과연 졸업은 할 수 있을지 저도 의문입니다. ㅠ_ㅠ)
3. 전공책들은 정말 저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희와 친해지고 싶단다~...
4. 사기꾼. 거짓말쟁이들. 전역한지 1년이 넘어도 모태솔로에게 빛이란 없더군요. OTL
5. 전역하고 1년 동안 학교 혼자 다니니 적응되더군요. 심할 때는 1주일 동안 말을 한 단어도 내뱉은 적이 없었던 적이 있네요.
6. 모두가 답답하지만 그 모두가 어찌어찌 살아가는게 세상인 것 같습니다. 뭐 살만한게 어디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
11/10/13 00:25
수정 아이콘
어학연수 갔다왔거나, 조기 유학으로 영어회화 유창하게 하는사람들 보면..... 사기유닛 같더군요 ㅠㅠ

그래도 힘내세요!

20대는 어린나이, 30대 중반까진 젊은나이 랍니다!!!
싸이유니
11/10/13 08:47
수정 아이콘
같은나이지만...그래도 어학성적이라두 있잔아요..^^;;
시미라레맨크로브노비
11/10/13 14:56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
27세 영문학 전공자가 텝스 성적 부러워하고 갑니다.
힘내서 살아봅시다!! 빠샤!! 원래 사는건 힘든거라고 누가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편할 것을 기대하면 더 힘들어진다던가??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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