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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19 01:02:31
Name 절름발이이리
Subject [일반] 새벽잡상
1.
새벽 1시즈음에, 약간의 졸림을 이겨내고 나면 밤을 얼마든지 샐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조용하고 어두운 사무실에서 퍼포먼스는 지독히도 잘 나오니, 이렇게만 하면 성공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새벽의 끝자락에서 결국 눈커플이 고꾸라지고 마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고, 눈 앞에 보이던 성공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신기루이다.
이렇게 찾아오는 잠이란, 죽음과도 같다. 피할 도리도 없이, 내 의식을 패배감과 함께 덮어 버리는 것이 매우 닮아 있다.
그러나 이런 예정된 결과를 앞두고, 아직은 잠들지 않았으며, 또 다시 착각같은 희망을 품어보는,
이런 새벽이야 말로 나 자신을 알 수 있는 때이다.

나라는 인간의 크기를 벗어나는 것에 편승해 있다보면, 내 자신이 정말로 그런 커다란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 어둠 속에서 진실과의 조우를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을 목도했을 때 찾아오는 것은 겸손함 같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처참함과 두려움 같은 것이다.
이미 나는 그것을 수백번을 마주했다. 수천 수억번은 아니라 그런지,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누군가는 여기서 우울해 할 것이고, 누군가는 주저해할 것이고, 누군가는 현명히 안전을 택할 것이다.

나는 그 중 아무 것도 택하지 않았다.
그저 걸어갈 뿐이다. 절름거리면서.
그러나 나는 긍정적이다. 절름발이란 고장의 이름이지만, 명백한 기능의 의미이기도 하다.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란 없다는 것이다.


2.
약 1년전에 타 커뮤니티에 썼던 글인데, 기분은 여전하군요.
아직도 멈추지 않아 다행인 것인지, 아직도 멈추지 않아 불행인 것인지.

하지만 아마도 사는 게 대개 그런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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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쏠
11/08/19 01:14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장 굉장히 좋네요. 문재가 있으신 것 같아요. [m]
11/08/19 01:52
수정 아이콘
새벽이라 그런지 무척 공감가는 글이네요. 그리고 절름거린다 할지라도, 걸어가고 있으시다는 것이 부럽네요.
몽키.D.루피
11/08/19 02:15
수정 아이콘
이리님이 절름발이이리님이 되신 사연도 궁금하네요.
살다보면은 지독히 회의적인 시절이 오기 마련인 거 같습니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긍정적인 성향과 회의적인 성향 둘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전 회의적이고 비판적이고 지극히 부정적인 성향을 고를 것 입니다.
11/08/19 10:31
수정 아이콘
절름발이 이리님이 예전 피쟐에 이리님이 맞으신가요?^^; [m]
11/08/19 11:23
수정 아이콘
< 나라는 인간의 크기를 벗어나는 것에 편승해 있다보면, 내 자신이 정말로 그런 커다란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 어둠 속에서 진실과의 조우를 피할 수는 없다. >

공감 100% 입니다 :)
11/08/19 13:13
수정 아이콘
저와는 반대의 경험을 하고 계시는군요.....
잠은 안 오고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지는 새벽 2~3시가 돼면, 매일밤 "나는 왜이리도 못난 놈인건가!!" 라는 자괴감에 몸서리치는지라...
주변에서 '너 정도 하는 사람 별로 없어, 좀더 우쭐하고 살아도 돼' 라고 충고를 자주 듣는 편입니다만. 별로 위로가 안돼요.

차라리 자긍감에서 오는 허세가 정신건강에 좋을지도... 라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뭐,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환상이 있게 마련이긴 합니다만.
윤수현
11/08/19 14:59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장을 아직 납득못해서 밤마다 괴로워 하는 중입니다.
머리론 이해가 되는데........
11/08/19 21:34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회의와 자괴의 감정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건 망각이란 놈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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