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바를 준비하다가, 어젠가 그젠가 결국 열었다. 열었다고는 하나 간판은 켜놓았지만 입구 정리는 되어 있지 않고, 어이 거기 손님 대충 한번 올 테면 와보라는 식이다. 어차피 대학은 아직 시험기간, 술이 필요한 인간은 간판이 없어도 들어올 것이다. 주말에 정리를 좀 하고 정식 오픈을 할 요량으로, 며칠 전부터 낮에는 장을 보고 내부를 정리하고 밤에는 임시영업을 한다. 메뉴판도 '임시 메뉴'라고 써 있다. 진토닉에 넣을 라임을 사려고 재래시장을 3일 뒤지다 결국 커다란(큰 건 문제가 아니지만 비싸다는 문제가 있는) 요리용 라임을 울면서 산다거나, 소다팝 구하려고 대중교통이 가능한 대형마트 네군대를 돌아다니는 일이나, 그러고도 결국 진저에일은 구하지 못해서 생강과 튜머릭을 끓이다 태워먹는 그런 나날들. 아, 결국 민트잎은 일단 포기했다. 정말 화분사다 키워야되는건가.
몇몇 정말 친한 지인들을 불러들였다. 고마운 친구들은 몇 몇을 끼고 와줬다. 한 친구가 데려온 손님이 '여기 칵테일 정말 괜찮다'고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불러내고, 그렇게 불려온 손님이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해서 '정말 괜찮은 바를 찾았다.'고 전화해서 다른 지인을 끌어주었으니, 나는 천재 바텐더인가보다, 라는 결론을 내려야 될 리는 없다. 대학가에 제대로 된 바가 없을 뿐이니, 반사이득이랄까.
그곳에 오랜 친구가 찾아왔다. 내가 대학교 2학년 시절, 그녀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 처음 보게 된. 군대가기 전에야 몇번 말을 섞게 된. 제대하고 나서 우연히 수업을 같이 듣게 된. 둘 다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친구가 된. 그래서 대충 십년지기 친구라 할 만한, 섬씽 없이 만나온 이성 '친구' 중에는 아마 최장기간 만나온 친구가 아닐까 하는. 내가 아는 여자애들 중에 가장 섹시한 친구. '마담'으로서의 북 에디터를 꿈꾸었고, 그래서 출판사에 근무하며, 경사스럽게도 편집인이 아닌 작가로 자기 단행본을 준비하고 잇는, 지금도 그렇게 잘 달려가고 있는 그런 친구. 그녀가 왔다. 두 명의 지인들을 이끌고.
'니가 진짜 술집을 열 줄은 몰랐다'는 첫 대사에, 뭐,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지. 너도 지금 꿈꾸던 대로 잘 살고 있잖아. 라고 화답했다. 그녀가 데려 온 두 지인중 한명은 '오, 뭔가 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가 자신의 꿈을 향해 가는 걸 확인하는 감격의 순간인가요'라고 짧게 코멘트하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블로거 자그니입니다. 김작가입니다. 아오. 젠장. 이봐. 아직 정리도 안된 모지리한 바에 왜 그런 양반들을 데려온거야. 좀 나중에 데려오지. 라는 말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만두었다. 언젠가 내 블로그의 잡글에 트랙백을 걸었던 자그니는, '메인 사진이 울고 있는 가냘픈 여자 그림이라 그런 이미지를 상상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런 산적같이 생긴 놈이라니'가 생략되었겠지. 잠시 앉아 같이 떠들다가, 예전에 많은 정신적 신세를 진, 이제는 귀농하신 문화공간 사장님과, 동아리 후배들과, 동생놈과, 어제 내 친구의 친구에게 전화로 소환당했다가 다른 지인을 소환한 가게 '최초의' '내가 모르는' 단골 손님이 온 덕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직 바 테이블에 수도를 설치하지 못해서 잔과 세이커와 지거를 씻을 때마다 저멀리 부엌으로 달려가야 하는 덕에 많이 떠들지는 못했다.
틈틈히, 떠들었다. 라기 보다는 들었다. 내가 논문을 준비하고 가게를 준비하는 지리한 일을 하는 동안 꽤나 많은 일이 그녀 곁을 스쳐갔다. 덕분에 꽤나 많은 욕을 먹었다. 너 이새끼 논문 준비한다고 내 전화도 안받고 죽을래, 에서 시작하던. 이봐. 니가 바빴던 시간동안 나도 바빴다고. 물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바쁨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잘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빠르게 기어가는 동안.
그녀는 이런저런 술들을 집어넣으며 이런저런 말들을 토해냈다. 기이한 역전이로군. 나는 그녀가 꽤 오래 일했던 바-라고 하기엔 조금 묘한, 아무튼 그런-의 꽤 오랜 단골이었으니. 나도 그녀가 일했던 곳에서 잠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묘하게도, 내 근무일에 그녀가 손님을 온 적은 없으니 근무자-손님의 역전은 십년 역사에 처음이로군. 아마 그 시절에는 내가 이런저런, 아니 생맥주를 계속 집어넣으며 이런저런, 아니 되도 않는 말들을 토해냈겠지. 시간이 흐르고 맥주는 독한 술이 되었고 되도 않는 이야기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로 승급했구나. 살 만한가? 글쎄. 바쁘고. 재밌고. 힘들어. 푸하. 스무 살 같은 삶이로군. 스물 셋 스물 다섯 뭐 이런 우울하던 시절보다는 낫네. 그렇게 꽤 많은 인생사를 나누었다. 숨차게.
야. 너. 너무. 숨차보여.
숨찬 일상에 대한 그녀의 숨찬 이야기를 들어가며, 축축한 수건을 숨차게 쥐어짜며,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나는 수건을 짜고, 건조시키고, 손님들에게 적당히 네그로니와 스푸모니를 추천해주고 그리고 만들고, 잔을 씻고, 담배를 한대 피우고, 공기청정기의 호흡을 거세게 하고, 병을 씻고, 블러디메리를 주문한 손님에게 마음대로 베넥번을 만들어버리고, 뭐 그런 일들을 하는 동안, 잠시.
조금 숨을 고를 필요가 있어보여. 뭐. 너나 나나 이제 내일 모래 서른이고. 너나 나나 이제야 무언가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지만. 하루 이틀 달리고 끝낼 삶이 아니니까 지금은. 택시를 타고 다니며 아이패드로 일정 조율을 하고 끼니를 걸러가며 미팅을 하는 젊고 예쁜 북 에디터는 물론 매력적이지만, 역시 지치는 일이잖아. 작년까지는 좀 나았는데, 2년차가 되니 이제 많이 바빠보이네. 지금 당장은 별로 힘들어 보이거나 지쳐 보이거나 무너질 것 같거나 그렇지는 않는데, 그래도 숨차보여. 쉬어.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내고 그녀는 택시를 타고 간다고 돌아갔다. 택시 안에서 아이패드로 일정 조율을 할 필요는 없겠지.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푹 쉴 수 있기를 바라. 이틀 뒤가 월요일이라고 해서 또 막 달릴 필요는 없을꺼야. 뭐, 굳이 쉴 필요는 없겠지만. 숨 고르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라는 생각을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새벽 공기는 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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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게 정리가 완전히 된 건 아니라, 이런 데 알리기엔 쑥쓰러워서 가게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는 좀 나중에 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