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byte. 나의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 할 수 있는 글자들의 모임이 가지는 무게다. 나는 스마트폰이지만 그녀는 좀 옛날 피쳐폰을 쓰는지라, 언제나 나의 문자는 저 80byte의 안에서 모든 의미를 담아야 했다.
그녀는 웃음이 수줍었다. 괄괄하게 하하하하 웃지도 않고, 천상 여자마냥 호호호호 웃지도 않는다. 웃음이 헤퍼서 날 만날때면 언제나 '호후호후훗후훗'하면서 묘한 웃음을 쏟아낸다. 이렇게 글자로 들으면 굉장히 가식적이지만, 앞에서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면 웃는 모습에 지는 주름은 보여주기 싫고, 이가 벌어지는 모습도 보여주기 싫고, 근데 웃기기는 하고, 수줍기는 수줍은 그런 웃음이라 좋았다. 활짝 웃거나 아주 어두운 얼굴 대신에 그 사이의 표정에서 좋고 나쁨을 보여주는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내게 곧 '순수'라는 단어로 들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좋았다. 그 웃음에 거짓이 없는 것 같아서.
새벽이 지나 아침에 가까워지는 세시쯤, 그녀와 나는 마지막 술집에 갔다. 취기가 오른 그녀의 눈빛은 소주 한 잔을 털어넣으며 조금 더 부드럽고, 애타고, 사근사근해 보였다. 사랑스러운 눈빛, 아마도 이 진부한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은 눈동자. 그녀는 이번에도 훗훗훗훗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 이렇게 아침까지 남자랑 둘이 술마시는건 두번째에요. 처음은 나였잖아요. 응, 그러니까 그쪽이 1,2등 다 쥐고 있는거야. 하하하 그거 기분 되게 좋은데? 훗훗훗훗. 미묘한 음계의 선율을 따라 서로의 말을 주고 받는다. 가느다란 실은 때로는 팽팽하게, 흐물하게 바뀌며 마음을 간질인다. 취하기에는 충분히 좋은 새벽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식 선술집을 표방하는 술집은 많았지만 제대로 된 술집은 얼마없다. 그런데 그 곳은 아침까지 영업하면서도 주인아주머니의 섬세한 배려와 친절함이 가득했고, 안주는 너무너무 맛있었다. 심지어 자기로 된 소주잔을 따로 고를 수 있게 할때는 마치 오늘 처음 술잔을 기울이는 것 같은 신선하고 설레이는 마음도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그 날 틈틈히, 그리고 꾸준히 이야기했다. 처음, 처음, 처음, 그게 내게는 당신밖에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렇지만 그 곳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몹쓸 이야기인건 알지만, 나에게 좋은 동생이 되어달라던 그녀의 말이 수 개월이 지나서도 귓가에 생생했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그녀가 말하는 그 모든것이 내가 편해서 할 수 있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래, 나는 또 차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미운만큼이나, 좋았다.
쓸데없는 말로 화제를 돌리며, 때로는 쓸쓸해 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혹은 좋은 동생의 코멘트에 새초롬하게 그게 좋냐고 투덜대는 그녀의 말을 애써 술잔에 담아 넘기며 우리는 아침의 이별을 맞이했다. 그녀는 지난번처럼 또 만날건데요 라며 자신이 술값을 계산했다. 그때 문득 기억 저편에 어렴풋이 남겨진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 날,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좋은 동생이 되어달라고 하기 전에 만났던 그 날에도 그랬다. 또 만날텐데요 라며 영화를 보여주던 누나. 아직도 노원 롯데시네마 천원 할인권 두 장은 내 방 책장위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 기억은 곧 불안감으로 내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또 만날건데요라고 해준 말이 내게는 가까운 만남이 아닌, 언젠가 살다보면 어디선가 마주칠 것 같은 그런 노랫말같아서.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생각보다 작았던 품 속의 그녀를 채 기억하기도 전에, 또 다시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다. 수줍게 웃는 얼굴만 툭 던져놓고, 그 잊지못할 독특한 웃음소리만 귓가에 남겨둔 채 어딘가로 휑하니 사라졌다. 설레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았던 불안감은 수면위로 올라오고, 나는 다시 조용히 침잠해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처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 마음의 자물쇠를 걸어둘 수가 없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렸었다며 지난 얘기들로 웃음지었던, 수줍게 웃는 얼굴은 어쩌면 이렇게도 그대로였는지. 아직도 혼자라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는데.
결국 나는 답장 한 통 없는 그녀의 번호에 또 다시 80byte의 말을 남겼다. 그녀가 그것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한 겨울 밤의 꿈이었는지 그녀는 여전히 답장이 없고, 핸드폰 너머에서 훗훗훗훗 하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린다.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걱정과, 너무 잘 지내면서 나만 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차마 다른 전화로 확인하기도 무서워서,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던져놓고 기다린다.
내가 대체 뭘 잘못한거에요.
그녀는 또 훗훗하며 수줍게 웃어버릴까.
몇 번을 지우고 쓰고 지우다 결국 전하지 못한 말만 허공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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