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고 2때였을 겁니다. 친구들 및 선후배들이랑 (그러니까 학교 써클에서요) 삼삼오오 모여서 영화를 보러 갔고, 두 편을 정해서 반씩 갈랐죠. 나머지 하나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저야 뭐 그 때도 역사 좋아했으니, 거기다 사투리로 논다는 얘기 듣고 그거 보겠다고 했죠. 왠지 같이 본 애들은 실망까진 아니더라도 만족도 아닌 거 같았는데 저 혼자서 신나게 웃으며 명작을 봤다고 자부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럼 이거 시리즈로 다음 거는 고구려랑 붙는 거 나오겠네? 라는 생각은 했는데 고구려는 단역에 불과했고 딱히 차기작을 예고하는 것도 없어서 혼자만의 망상에 그쳤죠. 그 후 이준익 감독님을 기억한 건 왕의 남자가 크게 흥한 후였습니다.
... 그렇게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속편이 나오네요. 혼자만의 망상이라 생각했던 고구려와의 전투, 평양성!
평양성 개봉에 앞서서, 나름 황산벌 빠로서 그 때의 감상과 분석을 다시 되새기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8년 전 영화긴 하지만... 스포일러 다수 포함이죠)
1. 사투리와 현실 풍자
영화 황산벌과 개그콘서트 코너 중 하나였던 생활 사투리. 이 둘의 공통점이 있죠. 지금 나왔으면 과연 무슨 얘기가 나왔을지 정말 궁금하다는 것. 당장 pgr만 해도 지역감정에 대한 글이 한 두개가 아니었으니까요.
황산벌은 고증이 제법 잘 된 영화였습니다. 제가 사극을 많이 본 것도 아니고 그 때 당시에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많이 나온 것도 아니긴 합니다만, 백제의 왕권과 신권의 신랄하게 그려낸 걸 본 건 정말 처음이었죠. 아무리 말년에 가까웠다고 하지만 김유신을 꼿꼿한 이미지의 맹장이 아닌 모략을 쓰는 지략가의 이미지로 그려 낸 것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서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만) 전령이 왕에게 '어라하'라고 호칭한 건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라하'는 백제의 피지배층이 왕을 칭한 말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말이 달랐다는 걸 말 해 주는 동시에 백제의 말이 어땠는지 알려주는 정말 몇 안 되는 근거거든요.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는 거죠. 그냥 역사를 코미디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은 게 황산벌이지만, 역사학계에서 황산벌에 하는 대접은 그리 박하진 않습니다. 제 멋대로 망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사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괜찮게 재해석 했다는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백제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건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는 겁니다. 애초에 백제의 중심지는 위례성, 즉 서울이었고 고구려나 신라에 밀려난 후에도 충청도를 떠나지 않죠. 전남은 4세기까지도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구요. 후백제의 견훤만 해도 전북 전주로 수도를 옮길 정도였으니까요. 이거라면 나주가 왜 그리도 쉽게 왕건의 손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이 가능하죠. 한편, 충북 당진에 배치됐던 후백제 병력은 후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싸웠습니다.
정말 역사에 충실했다면 최소한 지배층만큼은 충청도 사투리로 표현됐어야 했다는 점, 이 점에서 영화 황산벌이 노린 건 역사를 배경으로 한 현실 풍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도 지금도 만연하고 있는 지역 감정이죠. 이렇게 지역감정을 필두로 황산벌은 우리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여러 가지를 깨 버립니다.
계백군과의 최종결전 직전, 김유신은 휘하 뻐꾸기(?)들에게 백제에 대한 적의를 일반 병사들에게 퍼뜨리라고 합니다. 거기서 나온 말들을 대충 살펴보죠.
'이게 다 백제놈들 때문 아잉교. - 저 백제 문디 x끼들하곤 같은 하늘 아래 몬 산다.'
'우리 신라와 백제는 원래부터 뿌리가 다르다 아이가. 조상이 다르다 이 말이다.'
'글마들 말투가 그게 뭐꼬. 거시기가 뭐고! 금마들은 응큼하데이. 속을 알 수가 없다 말이가.'
'이 좁은 땅에서 우리 후손들이 편하게 살려면 한 쪽은 망해야 하는 기야. 밟을 때는 확실히 밟아야 하는 거거든. 그래야 못 개기지. 안 그러면 우리는 두고두고 골치 아프데이.'
뭔가 어디서 많이 들은 말 같지 않나요? 이걸 김유신이 '일부러' 퍼뜨린 걸로 나오는 게 참 재밌습니다.
2. 영웅 깨뜨리기
시작하면서 당 고종은 엄숙하게 '하늘이 내린 질서'를 말 합니다. 그러자 바로 연개소문이 반박하죠. '전쟁은 정통성 없는 것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거'라구요. 의자왕이 거기에 맞장구를 치고, 김춘추가 의자왕에게 욕을 퍼붓습니다. 결국 김춘추는 당나라에 붙어서 자기 딸 복수하려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의자왕은 이에 반박하면서 정권 초기에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거라고 말하죠. 이런 모습에 열 받은 당 고종도 막말하겠다고 하면서 '강대국이 까라면 까'라고 합니다. 결론은 고구려와 백제는 내 말 안 들으니까 니들은 악의 축이다는 거였죠. 그 때 유행했던 말이었습니다만. 다른 건 넘어가고, 이 때부터 삼국통일이니 대의니 하는 건 이미 물 건너 갔죠.
김춘추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어디까지 얻을 수 있나 계산하고, 김인문은 당나라의 위세를 업고 호가호위하고(실제 신라왕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본인은 거부했다고 하지만), 백제 관료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지들 이권 뺏긴 것 때문에 왕 말을 듣지 않고, 신라 장수 김품일은 자기가 진골인 걸 내세우며 김유신의 동생 김흔순을 가야 출신이라고 무시하죠. 뒤로 가면 더 많습니다. 반굴과 관창의 영웅적인 돌격은 그저 아군 사기를 끌어올리고 적군 사기를 내리기 위한 김유신의 작전으로, 김흠순과 김품일은 자기 아들을 사지로 내몹니다. 그 후에도 계속되는 김유신의 화랑 자살 돌격 명령으로 그 둘의 죽음은 어른들의 강압 혹은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에 의한 죽음으로 바뀝니다. 김유신은 이에 더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것으로 이 주제를 확실히 퍼뜨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계백의 명령에 굴복한 줄 알았던 계백의 처는 '호랑이는 거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며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습니다. 황산벌을 대표하는 계백, 관창이라는 두 영웅적인 인물의 행각은 전부 영웅주의에 휘말린 허세가 돼 버 리는 거죠.
이미 인간 장기 부분에서 장수들은 웃으면서 말을 옮기지만 병사들은 그 장난, 실수 하나하나에 피를 뿌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점은 전투가 시작되면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초반과 중후반, 응원전과 심리전을 통해서 전쟁 자체를 웃긴 놀이로 만들어 버리고, 최후의 전투에서는 장수들이 한 번 찌르면 누가 피 한 번 뿜으며 쓰러지는 게 아닌, 서로 난장판으로 밀어붙이고 때리고 찌르고 울고 불면서 싸우는 처절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누가 이 전투 장면을 보고 '이야 멋지다'고 할까요. 당시 누가 이것을 '반전'이라고 칭했죠. 그렇게 웃기던 분위기가 처절하게 바뀌는 '반전'이라는 것과 전쟁을 반대한다는 '반전'이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영웅물의 진지한 부분을 웃기게 가면서 희화화 시키고, 다른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제의식을 부각시킨다는 거죠. 이건 위에서 언급한 계백 부인의 모습에서 요약됩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을 것처럼 하다가 눈을 치켜뜨면서 험한 사투리로 웃기게 반항하고, 굳건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라가 망하든 말든 왜 니가 내 자식들을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으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게 나타나는 거죠.
3. 신라의 살아남기
김춘추가 자기 딸내미 복수를 위해서, 당에 붙어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백제를 친 것, 신라의 5만 대군 + a가 단지 쌀배달꾼이었다는 것, 김유신이 계속 계백과의 일전을 두려워하고 모략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반대로 백제는 계백과 휘하 장수들부터 죽음을 각오했다는 점, 거시기가 마지막에 살아서 돌아간다는 점 등에서 신라가 악역이고 백제가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주인공은 역시 신라입니다. 이제 이 삼부작의 주요 소재는 바로 신라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았냐겠죠.
여제동맹의 압박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까지 몰리고, 겨우 당나라와 동맹을 해서 백제를 깨뜨릴 기회를 잡았지만, 영화 내내 볼 수 있듯 강대국 당나라에게 시달리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신라 최고 명장은 군량이나 수송하면서도 오천밖에 안 되는 결사대에 발목이 잡히고, 그 때문에 백제를 멸망시켜도 그 땅을 차지하지 못 하는 상황에 몰리죠.
김유신은 결코 이걸 거부하지 않습니다. (불만이야 계속 터뜨리지만요) 대신 이것을 이용해 최대의 이익을 챙기려 하죠. 최후의 결전 직전, 김유신은 후에 문무왕이 될 김법민과 김품일, 자신의 동생 김흠순에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쌀배달 가는 거다'고 합니다. 기존 신라인이든 가야 출신이든 모두 신라인이고, 굴욕적인 이 작전 역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것. 그리고 김유신은 마지막 장면, '고구려보다 당나라를 먼저 칠 거다'는 말을 통해 약소국이지만 자존심만큼은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말 역시 역사에서 실제로 했던 말이며,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당과의 전쟁은 결국 치러집니다.
백제 역시 마찬가지죠. 당나라에서 무려 13만 대군이 쳐들어 온 상황. 하지만 의자왕은 신라가 오지 않으면 당은 군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용해 항복을 하면서도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하죠. 계백은 이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구요. (의자왕이 당의 대군에 그냥 협상으로 '쇼부'를 치려고 하는 모습은 왠지 불만입니다만. 뭐 대규모 전투가 끝난 후의 상황이라면 이해는 되죠.)
4. 평양성 - 어떻게 나올 것인가?
결국 신라와 백제는 현재 우리나라 모습의 은유겠죠. 전쟁에서 신라가 백제를 이긴 것은 역사적인 소재, 혹은 전라도가 경상도에 비해 차별 당하다는 것의 은유일 뿐이구요. 국가 내에서의 분열을 백제에서는 왕권과 신권의 다툼으로 신라에서는 가야 출신에 대한 차별로 보여주고 약소국이 살아남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모든 건 한국 내부의 여러 가지 분열로 인한 다툼(지역이든 이념이든 간에요)을 보여 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양성이 개봉됩니다. 고구려의 모습이 나오는 거죠.
황산벌 개봉 당시 당나라에 맞섰기에 고구려는 북한을 비유한 거라는 분석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 반미가 유행이었으니 맞을 수도 있겠네요. 예고편에 따르면 연남생이 중국에 붙으면서 고구려와 신라의 비밀 연합 작전이 깨진다는데, 이게 뭘 은유할지 기대되네요. :) 개인적으로 고구려는 북한 따위가 아닌, 현실에는 없는 좀 더 큰 무언가의 은유였으면 하는데요. 아무튼 황산벌에서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로 영호남 갈등이 떠오를 수밖에 없게 했듯이 이번에는 이북 사투리가 나오면서 남북 관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영화가 나옵니다. (고구려 정통 후계자라는 놈이 벌써부터 당에 붙어 버리네요~) 거기다 '거시기'가 재등장하면서 전쟁에서는 살아남는 게 최고다를 웅변하고 있네요. 기대하는만큼 실망도 크지만, 이번에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서 영화관 직접 가 봐야겠네요.
이준익 감독은 평양성이 실패하면 상업 영화에서 손을 뗀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흥행할 지는 잘 모르겠네요. 황산벌 때도 그냥 역사를 코미디로 만들었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고, 인터넷에서 지역 감정 및 남북에 대한 문제가 말이 많은 지금 두드려 맞지 않을지도 걱정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개그가 얼마나 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산벌이 성공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로부터 팔 년이 지나서 그 후광을 입을 가능성도 그리 크진 않구요. 삼부작 마지막이라는 매소성 전투까지 보고 싶기는 한데요.
간만에 쓰는데,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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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영화 중간중간에 나오는 개그코드 등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보았지만, 왠지 실망이야.. 라는 생각으로 보았고
지금 나오는 평양성 역시 왠지 거북합니다....
하지만 은근히 기대하는 분도 많더군요.. 황산벌에 대한 평가도 굉장히 좋았던 분이 주위에도 계시고..... 보고 오신 분들의 평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