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래도 피곤한 밤 하늘위에 먹구름까지 껴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집까지 가는 길이 멀어보인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힘들게 도착한 집에서는 더욱 힘든 표정의 룸메이트 A가 나를 맞는다.
"무슨일있냐?"
"여친이랑 싸웠어."
"왜 또."
"아니 그게.."
A는 말상대가 필요했나보다. 나의 인사치례처럼 건낸 말에 자신의 이야기를 국수 뽑듯 뽑아내기 시작한다. 안 들어도 뻔한 이야기지만 눈을 반짝이는 척 하며 경청하는척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싸워.."
맞다. 그 커플은 그랬다. A가 무슨 말만 하면 싸우게 됐다. 상점도 아니고 물건 주면 돈주듯이 A가 던진 말에 그의 여친 B가 싸움으로 화답해왔던 것이다.그렇다고 B가 대단히 까탈스러운 여자냐. 그건 절대 아니다. A가 여자 맘을 너무 몰라주고 아니 정확히이야기하면 상대 마음을 전혀 몰라주고 상대에게 다소 무신경하다. 부처 아니 부처는 남자지? 관음보살과 만나지 않는다면 늘 겪을 수 밖에 없을일로 보인다. 오늘은 또 아무 생각없이 전 여친 이야기를 꺼냈단다. 크게 의식하고 말한것은아닌데 나오다 보니 B와 전여친의 비교 비슷하게 이야기가 흘러갔단다. 이건 아무리 말주변 좋은 나라도 막을수가 없다.
"니가 좀 잘해라."
"난 잘하고 있다고 난 솔직하고 싶어서 순간순간 감정을 표현하는데 뭐가 문제야!"
"..."
"그리고 이런식으로 나오면 내가 신경쓰여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편하게하겠냐."
"..."
"점점 난 위축되고 예전처럼 대할수 없다고. 그리고 난 가식적인것 싫어!"
그랬다. 그 녀석은 솔직함에 대한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차근히 풀어 설명해줬다.
"너 옷은 왜 입냐? 솔직하게 알몸으로 다니지?"
"..."
"향수는 왜 뿌려? 솔직한 체취를 느끼게 해주지?"
"..."
"수염은 왜 깎어..수염은 솔직하지 않고 가식적으로 자라나 보지??"
"..."
"화장실 왜 가냐. 솔직하게 길에다 싸지."
"..."
"니가 잘보이기 위해 겉모습을 꾸미는 것도 가식이야?"
"그건 아니고."
"넌 감정의 배설과 솔직함을 구분 못하는구나. 가식과 배려도 구분 못하는것 같고. 니맘 대로 하고 싶은대로 배설하는 것을 솔직함이라고 표현하지 마라."
A는 이제서야 수긍하는것 같다. 자신이 솔직함이라 생각했던 것이 솔직함이 아니라그냥 배설이었던 것임을. 그의 이야기는 나 아무곳에서나 배설하게 해줘야지 왜 못하게 하느냐고 우기는 철없는 아이의 칭얼댐이었음을. 아껴줘야 할 상대를 솔직함을 명분으로 전혀 아껴주고 싶어하지않고 있단 사실을. 상대에 대한 배려없음을 그냥 솔직함으로 포장하며 위안하며 방어하고 있었단 사실을.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그냥 내일 가서 미안하다고 빌고 한동안 최대한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하며 말을 해봐. 상처 받았으면 한동안은 생각조차 나지 않게 완벽하게 약을 발라줘야 한다. 최소 한달간은 너의 말실수로 싸우지 않도록 하렴. 안그러면 조그만 말실수에도 여자친구의 감정이 폭포수 마냥 쏟아질껄"
"난 악의를 갖고 말을 던지는게 아닌데. 어떤 말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
"그건 사실 니가 사회화가 덜된거야. 초등학생이 자신이 뭘 해도 되는지 안되는지 모른다는것과 똑같아. 왜 세수를 안하고 학교가면 안돼요? 라는 질문이지. 고쳐야해. 일단 모든 일에 상대의 생각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렴. 상대방이 지금의 내 행동으로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생각해봐야해. 역지사지가 사실 배려의 출발이니깐."
다음날 날씨는 화창했다. 내리쬐는 햇살이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우중충한 날씨보다는 훨씬 화해에 도움이 되는 날씨이다. 하늘도 잘 막아보라고 도와주시는듯했다. 아침일찍 그녀를 만나러 인천으로 달려간 친구녀석은 하루종일 연락이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약간의 호기심과 약간의 걱정으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입조심해 크크"
룸메이트 A와 여친 B는 실갱이 끝에 화해 했다. A가 싹싹빌며 다음부터는 그런일 없겠다. 입조심 하겠다 뭐 이런 공약도 내보였겠지. 사실 세상의 많은 커플들이 그렇듯 싸우지만 않으면 깨가 쏟아지기에 다시 잉꼬커플같은 모습을 보여주겠지.
"U've got mail"
A의 하얀 연아폰이 울린다. 웬만해선 울리지 않는 그의 전화기에 문자가 왔다. A는 잠시 자연의 부르심에 따라 화장실에 갔고 B는 호기심반에 전화기를 본다. 문자가 전화기 메인화면에 바로 떠있다. 보낸 사람은 B와도 여러번 인사한적 있는 A의 룸메이트이다. 남자의 문자답게 지나치게 짧고 별 내용이 없다. 그런데 뭘 어떻게 입 조심하라는 거지? 생각에 잠길쯤 저 멀리서 A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오빠 love&hate 오빠한테 문자왔어"
"응"
"근데 뭘 조심하라는거야?"
A는 조용히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너랑 싸워서 이야기를 했더니 앞으로는 입조심 하라고 했다고. 사실 그간 여러번 말실수 해서 싸울때마다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며 싸운이야기를 디테일 하게 들려줬고 그때마다 늘 내가 잘못했다고 입조심하라고 조언해줬다고. 오늘은 많이 걱정 되었는지 이런 일로 문자까지 보냈네라고.
이윽고 B가 입을 연다.
"오빠는 나랑 조금만 싸워도 다 친구들한테 말하고 다녀???? 오빠 왜 그래!!!! 오빠 친구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