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직장에서 몇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동년배 직장동료 한 분이랑 많이 친해지게 되었어요.

제가 친한 동성 간에도 스킨십을 거리낌없이 하는 편이라 그런지
서로 자연스러운 터치도 되게 많이 하곤 했습니다. 어깨 주물러주기라던가 뭐 그런 거.
근데 그런 거 있잖아요 터치가 다 같은게 아니라 뭔가 섹슈얼한 뉘앙스가 있는 터치가 있어요
가끔 그 사람에게 그런 싸함이 느껴지길래 그럴때는 하지 말라고 가볍게 손을 치우거나 자리를 피하는 정도의 눈치를 주기는 했지만
그런 행위에 대해 절대 구두로 물어보지도 않았고 곧바로 완전히 잊어버린 채 평소처럼 대했어요
전혀 나쁜 의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평소 일할때 능력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신뢰가 엄청났거든요

하루는 저와 그 사람 포함 직장 동료 네 명 정도 출장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호텔에서 둘이 같은방 같은 침대를 쓰게 되었어요
하루 일정을 마치고 같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제 중요 부위를 만지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죠
비몽사몽 일어나 보니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 손이 제 중요 부위를 미묘하게 쓰다듬고 있네요?
잠결에 손을 들어서 명확하게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치웠습니다.
기억은 다음날에도 생생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고 털어낸 뒤 평소처럼 지냈어요
사람이 잠꼬대가 심하면 손의 위치가 우연히 그럴 수도 있지.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야.

그 뒤 한참 지나 제가 해당 기억을 잊을 때쯤 그 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누군진 몰라도 저보다 현명하게 대처하셨던 분이 계신 모양입니다.

그 시점에서 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허벅지를 조금 이상하게 쓰다듬을 때 수상함을 느꼈어야 했던 것 같아.
나한테 더블베드 상관없냐고 물어본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설계네.
4명을 방 두개로 나눌때 자연스럽게 나와 같이 배정된 것도 설계같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기분 더러운 바로 그 기억.
10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의미없던 지나가는 기억이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성추행이 되어 다가왔고 오래도록 기분이 너무 나빴어요
행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제가 가해자에 대한 신뢰로 인해 긴 시간 덮어두고 있었을 뿐이었던 겁니다.
그 신뢰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마냥 한방에 무너졌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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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나 가해자로부터 잘지내냐고 연락이 오더라구요. 아마 제가 피해사실을 인지했다는 걸 모를 거예요.
근데 웃긴 건 제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다시 말은 틀까. 그냥 아예 전처럼 친하게 지내 볼까.
쓰레기지만 재밌고 똑똑한 사람이었거든요. 추억도 많이 쌓았고. 그런 좋은 기억들이 일순간 되살아나기도 했어요.
친한 친구가 무시하라고 조언해줬지만 결국 무슨일이냐고 답장은 하게 되더라구요
다행히 그쪽에서 제가 오랜만에 연락 닿으면 으레 하는 인사를 안하고 무슨 일이냐고 한게 뭔가 찜찜했는지 더 연락하지는 않았지만요.

듣자 하니 가해자는 여전히 피해사실이 없는 다른 직장동료들과는 종종 연락하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심지어 일부는 저랑도 친하기도 하고, 일부는 가해자의 가해사실에 대해 자세히는 아니지만 알고 있는데도요.
당연히 저 관계들을 다 박살내 버리던 뭘 하던 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또 그러지는 못하겠더라구요.
그러려면 피해사실을 어느정도 고백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얻는게 뭔지도 모르겠고. 듣는 사람이 뭔 생각을 할지 걱정도 들어요.

솔직히 저는 아직도 종종 혼란스럽습니다.
선택에 대한 미묘한 자괴감도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뚜렷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확실한건 아무리 봐도 제가 피해자다운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아요.
피해 이전과 직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피해를 인지한 후에도 그렇습니다.
가끔은 제가 피해자인지조차 헷갈릴 정도입니다.

제가 겪은 일이 아래 글에서도 언급된 한샘 사건이라던지 여러 성폭력 사건에 완전히 대응될 수는 없을거예요
어쩌면 비교하는 것조차 죄송할 정도로 턱없이 가벼운 일과 별거 아닌 고민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때 이랬으니 한샘 성폭력 피해자는 옳고 가해자는 유죄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게 되면서 각종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미투 운동처럼 피해자가 몇 년 있다가 가해자의 가해사실을 신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고
저조차 저를 이해를 못하는데 성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에 대해 제가 그렇게 쉽게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100개의 사건이 있으면 100개의 서로 다른 사연과 100명의 서로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건을 논할때 피해자의 전후 행동을 논하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본인의 편협한 기준으로 피해자다움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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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아니냐 누구 아니냐는 질문은 사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