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요일에 쉬는 게 몇 주 만인지,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열 한 시쯤 일어났습니다.
콩레이의 영향으로 며칠 전부터 비가 참 많이 왔는데 오늘이 되니까 비는 그치고 바람만 많이 부네요.
어정쩡한 아점을 먹고, 어머니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태우러 가려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나갔죠.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어라? 바닥에 알록달록한 뭔가가 보입니다. 주워보니까 카드네요. 신용카드.
아침까지 비가 많이 왔는데 누군가 정신없이 출근하다가 흘린 것 같습니다. 같은 아파트 사람인 것 같은데... 찾아줘야겠다 싶었죠.
시간이 급한 관계로 우선 카드는 주워두고 어머니 픽업부터 했습니다.
주말이라 주차 공간이 없어서, 우선 집에 들어가기 편한 곳에 어머니를 내려드리면서
"엄마 나 주차하고 올라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했습니다.
#2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매번 느끼는 건데, 제가 멍청해서 그런지 카드나 은행 등에 전화하면 너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상담원이랑 통화하고 하고 싶은데 오늘 주말이잖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3분 정도 여기 저기 눌러봤습니다. 너무 아무 데나 찔러봐서 어떻게 연결이 됐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카드 사용이 안 된다"는 항목에 카드 번호 입력하고, 비밀번호 0000을 넣고 나서 연결이 됐던 것 같기도 합니다.
드디어 만난 상담원에게 카드를 습득했는데 분실 신고가 되어 있는지 확인해달라 했습니다.
카드 번호 불러주니까 분실 신고는 안 되어있다고 하네요. 몇 가지 더 묻길래(카드 습득 장소는 어디인지 등등..) 성실히 대답했습니다.
저도 오늘 알게 된 사실인데, 카드 주인에게 제 연락처를 알려주고 둘이서 연락하는 방법 말고는 찾아주는 방법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게 주말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상담원이 일거리 만들기 귀찮아서...? 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락처 알려드려도 될까요? 하고 묻는데 좀 망설여졌어요. 그래도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카드 하단에 적힌 이름이 여자 이르..읍읍..
같은 아파트 사는 사람인데 이왕 좋은마음 먹은 거 찾아주자 싶더라고요. 그렇게 통화를 끝마치고 집에 올라왔습니다.
#3
오랜만에 토요일에 쉬니까 뭘 해야 될질 모르겠더군요. 카드 회사에서는 4시까지 카드 주인에게 연락을 해보고, 연락이 안 되면 다시 저한테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킹리적 갓심에 의하면 카드 분실 처리할 테니 파기해달라 했을 것 같습니다.) 시간도 좀 남은 것 같고, 친구들 뭐하고 있으려나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에 전화가 왔습니다.
모르는 번호네요. 아마 카드 주인인 것 같습니다. 큼큼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를 했습니다.
아마 제 또래의 여성분인 것 같았습니다. 통화 내용은 대충 기억나는 대로만 적어보겠습니다.
저 : 여보세요?
그분 : 네 안녕하세요 저 카드 주인...
저 : 아 네. 안녕하세요
그분 : 카드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저 : 아뇨 아닙니다.
그분 : 근데 제가 오늘 출근을 해서.. 여섯 시쯤 돼야 퇴근을 하는데
저 : 네
그분 : 오늘 약속이 있어서... 시간이 좀 늦을 것 같아요.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고객님? 아 고객님이랳흐흐
저 : (크큽) 네. 아 내일...은 제가 출근해서 조금 힘들 것 같구요.
그분 : 네에...
저 : 오늘 귀가하실 때 미리 연락 주시면, 제가 아마 집에 있을 것 같은데...
그분 : 네. 저 근데 많이 늦을 수도...
저 : 미리 문자나... 아무튼 연락 주시면, 서로 얘기해서 시간 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정 안되면 내일이라도...
그분 : 아 네.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저 : 네
그분 : 감사해요.
저 : 아닙니다. 연락 주세요.
#4
남자분들 동감하시겠지만 짧은 통화하면서... 어떤 사람일까... 김칫국 솥째로 끓여서 원샷했죠.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게 하는 힘이 뭔지 아세요? 바로 상상력입니다.
업무 이외의 목적으로 낯선 사람과 얘기해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정말 솔직히, 카드 찾아줘서 고맙다는 이유로 같이 커피 마시게 되는 상상까지는 했습니다. 민망하긴 하지만 분명히! 저만 이런 거 아닐겁니다.
아무튼 통화는 저렇게 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오늘 어디라도 외출을 할 것 같았습니다. 만나자는 친구도 몇 있었고...
해서 미리 얘기해둘까 싶어서 전화하려다가, 일하고 있을테니 전화는 좀 아닌 것 같고 카톡 해야겠다 싶어서 번호를 저장했어요.
그리고 카톡 프로필 사진을 봤는데, 왠 남자분이 있네요? 상태 메시지에는 남자 이름과 하트표가 있네요? 아하...
지금쯤 남자친구한테 누가 카드 찾아줬다, 누가? 같은 아파트 사는 사람. 남자야? 응 남자야. 하면서 질투하고 알콩달콩하고 있겠군? 아하...
카드는 경비실에 맡겨야겠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했으면 되는거잖아?
편안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거 참. 허허. 멍청이, 첨부터 이랬음 되는거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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