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어느날 유시민은 개혁당을 만들었다.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시민들을 바탕으로한 정당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한 그 정당은 매니아틱한 인기를 얻어갔고 노무현 후보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여겨졌으며, 몇명의 인물들을 국회에 입성시키고 사라졌다.
해체 과정에서 몇가지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개혁당을 애초에 노무현의 본적이라고 여겼던 많은 당원들은 발전적 해체라 판단하였고 유시민의 '백년이 갈 정당' 이라는 말때문에 동조했었던 소수 사람들은 당 해체를 배신이라고 여겼다
나는 후자였다.
이건 10여년의 내 삶에 대한 일종의 회고이다.
갑자기 발생한 정치실험이였던 개혁당은 누구에게는 실패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몇가지 일들을 겪고 시간이 지나가며 거대정치담론보단 정당 그 자체, 그리고 세분화된 운동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탄핵정국을 통해 갑자기 민주노동당이 대두 되었다.
갑자기는 아니었다. 이미 1997년 대선에 국민승리21의 대선후보였던 권영길할배는 2002년 대선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2000년에 민주노동당은 만들어졌다. (여담이지만 1997년 국민승리21의 대선후보로 고 노무현 대통령 께서도 유력한 후보였었다. 그런데 권영길후보는 서울대를 나오고 노무현전대통령은 고졸이라 권영길할배가 대선후보가 될수 있었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아마 그때 노무현전대통령이 대선후보로 나왔다면 우리는 아마 이회창대통령을 겪었을거다)
2004년 민주노동당은 유시민의 사표드립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를 8명을 포함해 총 10명의 의석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노동당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국회에 입성했던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강기갑등은 어벤져스와도 같은 최고의 의정활동을 통해 노동당의 미래을 밝게 비춰줬다.
나는 이때 이들도 응원했지만 노동당보단 함께놀던 사회당 형들과의 술자리가 더 좋았었다. 서울은 책과 인터넷으로만 보던 수많은 운동단체 사람들을 직접 볼수있는 자리였고 갓 상경한 나로서는 그 모든것이 좋았다. 우월감을 성취하기위해 일부로 소수파의 위치를 선택했다. 나는 나의 정치적 허세를 사랑했었다. 서울은 화려한도시였다.
민주노동당의 전성기에 진보누리란 사이트가 있었다.
진중권은 이시절에도 역시 키워원탑이였다. 이시절 수군작, 한그루, 평검사등 수많은 찌질이들과 함께 그는 민노당의 최전방에서 싸웠었다.
2004년 언제였나 진중권과의 인터뷰기사가 있었다. 여기서 그는 히스테리컬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기억으론 이렇다. 지성인은 이성으로써 사고 하고 이성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나는 이런 진중권을 좋아했다. 그의 키워근성이나 속시원한 토론스킬같은 자극적인 모습보단 지성인의 태도를 말하고 그렇게 행동한 진중권을 나는 좋아한다. (그러니까 트위터 블락좀 풀어줘라.. 내가 뭐 잘못한것도 없는데... 진중권 x객끼)
삶에 떠밀려 2년동안 군대에 가서 데모만 막다가 왔다. 사람들이 말하는것과는 다르게 그때의 시위진압은 지금보다 더 심했다. 살수포와 명박산성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야만 관련기사가 몇줄 나던 시절이었다. 그마저도 부족했는지 금세 잊혀지고 묻혀만 갔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똑같은놈이라는 비판에 동의는 하지 않지만 이해는 할수 있었다. 소외된사람들의 분노는 없는거마냥 사람들은 잘살았다. 서울은 오만한 도시였다.
2년이 지나고 많은것은 바뀌어 있었다.
노무현의 지지율은 바닥을 찍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억지로 소모임짱을 했던 내친구는 과학생회장과 공대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장을 출마했다.
노동당은 코리아연방공화국이니 일심회니 삽질을 일삼으며 국민들에게 버림받았다.
진중권은 탈당했다
나도 이때 노동당을 버렸다.
NL의 패권을 견딜수 없었던 많은사람들은 분당을 결심했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분당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떠밀리다시피 나왔고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총선이 있었다.
한나라당은 뉴타운공약으로 전국을 휩쓸었고 진보계열 후보들은 죄다 떨어졌다 그냥 망했다.
진보신당은 정당투표가 3%에서 2%부족한 2.94%로, 그나마 가능성 있었던 노회찬 후보는 잘생긴 홍정욱후보에게 3%가량의 차이로 떨어져 결국 죄다 망했다. (이때 노원병은 민주당후보가 끝까지 노회찬후보랑 통합을 안해줘서 졌다. 이래놓고 서울시장 선거때 노회찬을 까는 민주당원들을 나는 살짝 증오했었다.)
이날 나는 매우 슬펐고 혼자서 소주를 깠었다. 조금 울었던거 같기도 하다
나는 진보신당에 입당하였다.
한때나마 정당활동을 열심히 하려 했었다. 청년당대회도 나가고 모임도 꼬박꼬박참석하고 대학조직에도 참여했었다. 그렇지만 원래부터 없던 열정이 만들어지진 않았다. 얼마 안있어 금방 아무것도 안하게 되었다.
그나마 촛불정국때 진보신당은 반짝 했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지방선거를 하면서 유시민의 야권이 통합하여 지역마다 한나라당과 1:1로 붙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하게 까였다. 노회찬은 민주당에서 불러주지도 않았는데 합치지 않았다고 욕을 먹었고 심상정은 유시민과 힘을 합쳤다는 이유로 내부에서 엄청 까였다. 진보신당에겐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유시민은 항상 중요한 시기마다 나와 대척되는 곳에서 우리를 무시하고 능멸했다. 나는 유시민을 싫어해버릴것만 같았다. 힘든 시기였다.
심성정과 노회찬은 민주노동당과 합당을 하자고 했다. 조금 있다가 조승수도 합당을 하자고 했다. 나는 합당을 하고싶지 않았지만 당의 의견이 그렇다면 합당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합당은 부결되었다. 당의 의견은 합당이 아니었다.
그리고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는 탈당했다.
진보신당은 없어질것만 같았다. 우리는 오합지졸처럼 아무것도 못한채 악에바친 목소리만 낼뿐이었고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했다. 민주노동당의 삽질을 보고 진보세력을 비웃으면서 또다른 진보세력인 우리를 없는사람 취급했다. 우리는 서러웠다. 그리고 홍세화 선생님이 나서기로 했다.
홍세화 선생님은 원래 아무것도 하기 싫어했다. 평당원으로 끝까지 있는게 선생님의 소망이였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우리를 이끌어줘야만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시어질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어하셨던 선생님의 소망은 그렇게 사라졌다. 홍세화 선생님은 당대표가 되었다.
정당투표율이 3%를 넘지 못하면 원외정당이 되고 2%미만이면 당을 해산해야 한다. 이렇게 버텨온 정당을 이런식으로 없애고 싶진 않았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탈당을 하면서 진보라는 이름을 빼앗아 가버렸다. 이제 아무도 진보라는 이름에서 진보신당을 떠올리지 않는다. 모두가 통합진보당을 떠올린다. 나는 아직도 진보라는 이름에 매달리고 있다. 한때 정치동아리가 아닌 정당운동을 하고 싶어서 선택하지 않았던 사회당과 이제는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29살이 된 이제서야 나는 처음으로 낭만을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이건 10여년동안의 내 삶에 대한 소회였다.
글은 쓸데없이 길어지고 난잡해졌다. 나는 글을 잘쓰는, 깔끔하게 요약하는 재능도 가지지 못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쓰레기 같은 이글을 보지 않을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한줄은 꼭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나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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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이 3%까지 내려가면 그쯤되면 남아있는사람들은 정말 진성이란겁니다.. 뭐 원래 진보신당은 시작부터 끝까지 한결같은거 같습니다만..
그래도 군소정당(원외정당)중에서는 유일하게 원내입성이 가능할법한 정당으로 보입니다.김한주씨도 가망이 아주 없진 않고, 탈당여파로도 재보궐당시 양천구에 출마한 후보가 2.8%가량의 지지율을 보였으니까요..
진실을 전하기에는 우리의 힘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사람들이 모이고 뜻이 맞아
당당히 맞서자고 서로 재우친다.
연필을 쥔 손이 설렘으로 떨린다.
대단한 일을 지금 우리는 하고 있다.
회의와 냉소 따위는 떨쳐 버린 뒤
의연하게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힘주어 다시 한 번 적어내려간다.
내일은 우리의 편이라고,
자유롭게 미래를 엮어가자고.
(맨 앞 글자만 읽어주세요)
2008년 총선 전날에 쓴 응원글입니다. (그 다음해 보궐선거에도 쓰였습니다만)
그때 저는 투표권이 없는 고3이었고, 이번에는 해외 부재자투표 신청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4년 동안, 저는 끝내 당원이 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실망하고 관심 끊기를 다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고 말하기가 정말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