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급작스레 듣고싶은 노래가 생겨 주머니에서 책상으로 조심스레 모셔본 이어폰은 늘상 그렇듯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다.
...아니 잠깐만, 너, 분명 내가 쓰다듬어줄때만 해도, 그리고 들어갈때만 해도, 들어가고나서 얼마 안됐을때까진 분명 멀쩡했잖아. 어떻게 된거야.
내가 평생 먹은 꽈배기의 꼬임값을 모두 더하여봤자 어림도 없을법한 이어폰의 아스트랄한 몸짓에 나는 대략 할말을 잃고 만다.
듣고싶은 노래는 이미 머리를 떠난지 오래다. 아무렇게나 이어폰을 쥐어잡고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생각한다.
야, 너 다음에 내가 불러서 나올 떄는 멀쩡해야 우리 서로 수지타산이 맞는거 알지?
얼토당토않은 기분과 동시에 얼핏 의혹을 품었다가도 '에이, 그럴리가' 하고 웃어넘겼던 생각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래. 미친 소리일지 몰라도, 아주 어쩌면, 나의 주머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2
휴대폰에 아주 오랜만에 진동이라는 알림이 온다.
전화도 카톡도 알람도, 심지어 키고 끌때조차 진동을 없애놓았는데, 스마트폰을 쓰다보니 휴대전화에 "문자" 기능이 있음을 잊고 살았나보다.
아주 오랜시간동안 나에게 설렘의 의미였던 진동이였는데, 아주 오랫만에 찾아온 진동은 한순간에 증오가 되어버린다.
"내 문자 스팸으로 되있진 않겠지? 그냥, 영혼아 오늘 서구청에 혹시 갔었니? 본 것 같아서.. 영혼아 미안했고 미안해.
순수한 니 마음에 큰 상처가 됐을 것 같아. 나도 니 마음이 그정도로 클꺼라고 생각 못했거든.
그래서 그때 니가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도 일부러 내가 쿨한 척 했어. 미안해.
밥도 잘 챙겨먹고, 담배 끊는 것도 잘 되면 좋겠어."
하, 웃기는 말장난 하고 앉았네. 주접 떨고 있네 아주. 내가 너 언젠가 이런 문자 한번 보낼줄 알았어. 내가 인마 이때까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딱 기다려. 내가 너 문자 보낸거 완전 후회할 수 있게 찌질하고 짜증나고 한심하고 열 받게 나의 거치고 거친 욕들을 한바가지 모아다가 보내줄게.
"일찍 자라. 아프지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고."
..?
#3
음, 사실 허세가 아주 많이 묻어있긴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사람을 대하면서) 생각해온 개똥철학을 자기소개글에 적어뒀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믿을 놈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 나조차도 그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러고보면 믿을 수 있는건 내 생각보다 아주아주 적다는 거다.
(아예 없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주 최근에 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너무 극단적인 것 같아 자세히 생각해보기 싫었다)
기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안전하다 생각하는 것들은 전혀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랑을 속삭였던 사람은 사랑을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멀쩡히 있을거라 생각했던 이어폰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있고, 어떤 감정은 한순간에 뒤바뀌거나,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응.. 그래 고마워. 너도 밥 잘 챙겨먹고, 복학 준비 잘하구!"
하, 우리 둘다 웃기는 말장난 하고 앉았네. 이런 문자나 주고받을만큼 우리가 어여쁜 사이였다면 나는 지금쯤 화이트데이로 골머리가 썩고 있어야겠지? 화이트데이에 대해 걱정을 하면 돈을 얼마나 써야할지, 무슨 선물을 해야할지 머리가 많이 아프겠지? 그럼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담배를 많이 피겠지? 담배를 자꾸 피다보니까 평소보다 흡연량이 많아져서 가래도 끼고 머리도 아프고 폐도 안좋아지겠지? 그러다 몸이 너무 안좋은것 같아서 병원을 갔더니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폐암이라고 하겠지? 벌써 전이가 일어났다고 하겠지? 그럼 난 입원을 하게 되겠지? 차근차근 항암치료를 받고 이겨내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해서 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게 되겠지? 우리가 어여쁜 사이였으면 나는 폐암으로 죽었을거야. 근데 안죽었잖아. 근데 왜 이런 문자를 주고받는거야. 아, 기분 안좋은데 왜 갑자기 개그맨 김원효가 떠오르는거야.
시간이 뭐고 나의 마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왜 이다지도 우리는 무던하며 서로를 걱정하는걸까. 주접들 떨고있네. 아주. 그것도 쌍으로다가.
아 가수..아니 개..아니.. 개수? 가그맨? 아무튼 기분 안좋은데 갑자기 고영욱도 떠올랐어.
#4
그래, 아주 가끔이긴 했는데 그 아이가 내게 한 짓이 생각보다 상식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며, 천인공노할 미친 짓이 아닐수도 있고
그 아이도 내가 미처 생각치 못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해보'긴' 했다. 마치 이블린이 고인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해보'긴' 해보거나, 세상 사람들이 다 훼이크고 나는 지금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긴' 해보듯이.
근데 이런 생각들은 어차피 결론이 나와있는 생각이라, 사실 트루먼쇼는 없었으며 이블린은 2티모급 챔프라 2블린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 아이는 아주 크게 혼내켜야 한다는 생각이 마침표의 앞에 자리잡으며 나의 고개는 끄덕거리곤 했다.
그 이쁜 누나, 우마 서먼이 나온 영화에서도 분명 복수는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댔는데, 김치볶음밥이랑 비슷한거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식혔으니까 이제 맛있게 복수하면 되는거잖아. 너무 오래 식혀서 삭아버렸나.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곰팡이가 슬어버렸나? 킬빌은 원이 짱이지.
아니 그나저나 도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다지도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은 처음과는 달리 헝클어져있는걸까.
왜 증오와 분노는 회한과 미련으로 변해있으며, 나는 그 아이가 걱정되곤 하며 나에게 미안해하는게 되려 미안한 기분이 들까.
난 미움을 정리하여 마음 속에 담아뒀는데, 다시 꺼낸 미움은 왜 애정이 되어있는걸까. 애증. 같은건가 이거?
얼핏 떠오르곤 했던 의혹은 의심이 되고, 자주 그러다보면 그런 의심은 종종 사실이 되어버린다. 지금처럼.
나의 주머니에서 혹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건 아닐까.
#5
그 아이의 문자를 무시하는게 아주 조금(말하자면 한타에서 티모의 존재감만큼)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 사실이, 티끌만한(티모만한) 고통이 너무나도 싫어져 휴대폰을 꺼버리며 생각한다.
나의 주머니에서, 아니 나의 마음에서 분명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내가 미처 몰랐거나 어쩌면 전혀 알수가 없는.
하..사는 거 참 어렵구만. 담배나 한대 펴야겠다.
"쌤, 저 담배 한대 피고 오겠습니다."
"안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