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선 박사는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조달하신 분이었다.
그녀는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학과를 졸업했고 졸업후 프랑스 유학을 결심 마침내 민간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유학 비자를 받은 여성 1호였다.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했다. 학창 시절 스승인 이병도(1896~1989) 교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고서들을 약탈해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이 안 된다. 유학 가면 한 번 찾아보라"고 한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 박 박사는 10여년간 도서관·박물관 등을 뒤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러다 먼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것. 그녀는 고활자본을 해독하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밤을 새워 아침에 도서관에 출근하면 동료들이 '눈이 왜 빨개? 너 어제 울었니'라고 묻기 일쑤였다.
1967년 어느 날 프랑스 국립도서관. 검은 머리칼을 짧게 친 39세의 한국 여성이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찾아냈다. 직지심체요절. 그때까지 중국 책으로만 알려져 있던 책의 맨 뒤에서 '1377년 금속으로 찍은 활자본'이라는 내용을 접한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5년 뒤 그녀는 파리에서 열린 '책의 해 기념 고서(古書) 전시회'에서 "직지는 1377년 금속으로 찍은 세계 최고(最古) 활자본"이라고 공개해 전 세계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항의가 빗발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독일 구텐베르크가 1455년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이나 앞서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고?"
당시 꼴랭드 쁠랑시와 모리스 꾸랑도 만약 간행기록이 사실이라면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70여년 앞서 한국이 금속활자를 먼저 사용했음을 의심을 가지고 다루었다. 그러므로 박병선 박사는 이에 한국 금속활자임을 고증하기 위해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프랑스에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쇄술 관련 책자는 있지만, 한국 인쇄술과 관련된 책자는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박병선 박사는 한국에 있는 친구나 친지들에게 한국 인쇄술과 관련된 책을 요청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관련 자료가 없다는 회신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인쇄술을 연구하는 학문인 ‘서지학’이 막 태동하는 시기였기에 박병선 박사가 만족할 만한 자료를 제공할 수 없었다. 이에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내 간행되어 있는 중국과 일본 인쇄술 관련 자료를 섭렵하고 프랑스내 대장간을 돌며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또한 감자와 지우개 등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금속활자와 목판 인쇄술의 차이점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와중에 3번의 화재를 겪었다. 납활자를 만들기 위해 가스렌지에 납을 녹이면서 다른 연구를 하던 중 화재가 난 것이다.
박병선 박사는 이런 갖은 난관을 극복하며 마침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증명하였다.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 주최로 개최된 “BOOKS” 전시회와 1972년 개최된 유럽내 ‘동양학 학자대회’에서 발표되어 인정받았다.
본격적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다니던 1975년 베르사유궁에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더니 사서가 푸른 천을 씌운 큰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책을 펼치니 조선 왕실 기록물인 '의궤(儀軌)'였다. 1866년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한 후 도서관 창고에서 '파지(破紙)'로 분류돼 있던 외규장각 도서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한국 여자'가 외규장각 문제를 제기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응은 차가웠다.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1979년 사표를 강요받았다. 사실상 해고였다. 한국 정부도 그녀를 못 본 척했다. 해고된 뒤에도 박씨는 '개인' 자격으로 10여년을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며 외규장각 도서 내용 파악에 매달렸다. "점심 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고 할까봐 밥도 안 먹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 놓고 있는 그녀를 '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라고 불렀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6월. 박씨는 마침내 외규장각 도서 297권이 145년 만에 모두 고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지켜봤다. 외규장각 도서 귀환 환영식에 참석차 귀국한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 같다"며 감격하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의궤가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다시는 프랑스에 가지 않도록 여러분 모두가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프랑스 외교부에서 한국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찾아내는가 하면 50년 넘게 프랑스 신문이 게재한 한국 관련 기사를 스크랩했다. 그녀가 수집한 한국 관련 자료는 2000상자, 1만5000쪽 분량에 이른다.
박씨는 생전 인터뷰에서 "긴 시간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 정부와 학자들의 냉대였다"고 했다. "동양학자대회 때 직지를 발표하고 나니 어떤 한국 학자는 '네가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했는데 네가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외규장각 도서문제를 제기했을 때는 한국 외무부에서 왜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느냐며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했었다.
그녀가 고국의 따뜻함을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병마(病魔) 때문이었다. 지난 2009년 귀국했던 그녀는 뜻밖의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가족도 돈도 없이 막막했던 그녀의 사연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성원이 답지했다. 덕택에 지난해 수술도 무사히 마쳤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연구할 게 많아 프랑스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로지 우리 고문서 찾기와 의미 밝히기에만 매달렸던 그녀였다. 지난해 1월 경기도 수원에서 직장암 수술을 받고, 10개월 뒤 파리로 돌아와서도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2편'의 저술 준비 작업에 매달렸다.
직장암 말기로 거의 의식을 놓은 박 박사는 날마다 조금씩 수액만을 맞으며 무려 한 달간 투병했다. 입원 후 박 박사는 대부분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간간이 깨어나면 "책은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의사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며 기이한 형국이라고 했다. 박 박사가 유족에게 남긴 유언은 "책 출판을 마무리해 달라"였다.
23일 프랑스에서 타계한 박병선 박사는 유산 2억 원과 자신이 소장한 장서 9박스 분량을 인천가톨릭대에 기부했다.
여러 기사들과 사설들을 읽으며 내용을 종합해서 올려봤습니다.
그냥 막연히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 도서 직지심경만 알고있었고
프랑스에서 뺏어간 외규장각 도서가 우리나라로 대여되었다는것만 알고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 개인이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는건 몰랐습니다.
한 개인의 힘만으로 이 대단한 일을 모두 이루었다는게 놀랄따름이며
박병선 박사의 일대기를 영화화하여 국민들에게 이런 애국자가 있었다는걸 널리 알렸으면 하는 생각도 드네요.
영화화 할 거리도 충분하다고 보는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 프랑스로 날아가
프랑스사서들의 눈치를 보며 도서관을 계속 뒤져가며
세계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 직지심경을 찾아내고
프랑스가 뺏어간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내어
결국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한 그 장면은 충분히 큰 감동으로 다가올듯 싶습니다.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걸 지금까지 몰랐던 제 자신에게 부끄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