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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1/18 22:47:20
Name
눈시BBver.2
File #1
함경도.JPG (0 Byte) , Download : 59
Subject
[일반] 사군 육진 - (1) 지난 줄거리
내일 경주 가요 ^0^
... 지난 줄거리는 페이크고 세종 대 것까지 다 쓸랬는데 그 전에 너무 길어져 버렸네요 ㅠ_ㅠ); 일단 사군 육진 개척 직전까지만 다뤘습니다.
부제는 "함경도가 우리 땅이 되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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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년 2년 4년 5년 6년 7년 15년 16년 (가을 장마) 17년 (함경 강원 경상) 18년 21년 (충청 경기) 24년 (황해 강원) 25년 (북삼도) 26년 하삼도 27년 (강원 함길) 28년 -_-; 29년 (황해) / 32년
성종 1년 4년 (경기도) 5년 12년 13년 16년 24년 25년 / 25년
정조 1년 6년 10년 (심함) 11년 12년 (서북) 16년 22년 (호서) / 24년
시작하기 전에 잠깐 통계(?)를 비교해 보죠. 아래 두 왕과 달리 맨 위의 왕은 참 자주 저런 일을 겪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냐 하면... 흉년이죠. -_-; 대충 국가 차원에서 흉년에 대한 대처를 한 해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차이는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심하죠.
맨 위의 왕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보시면 흉년이 안 든 해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_-; 당대에 비슷한 평가를 받던 성종과, 현대에 가장 비슷한 평가를 받는 정조... 차이가 눈에 확 띄죠? 농사직설이 11년에 나오고 측우기가 가을 장마로 농사를 망친 17년 이후인 23년에 나옵니다. 그 자신의 문제 의식도 있었겠지만 확실히 뭔가를 해야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는 거죠. 특히 즉위 초에 흉년이 몰려 있는 걸 보면 태종우 전설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에서 흉년과 전쟁만 없으면 본전치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저렇게 흉년이 계속 든 상황에서도 성군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건 정말 성군이라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
뭐 백성들은 힘들었을 겁니다. -_-; 지금 봐서 좋을 때인 거지 당시 백성들 기준으로는 결코 좋을 때가 아니었죠. 결국 중요한 건 먹고사니즘이니까요. 그리고 저런 상황에서도 세종은 많은 일들을 벌입니다. 그리고 그건 백성들에게도 딱히 좋은 건 아니었지요.
세종대왕의 장점을 토론과 설득으로 많이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죠. 까일 수밖에 없는 거리지만 결코 깔 수 없는 거리입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4군 6진 개척, 시작해 보겠습니다. :)
1. 태조
조선이 세워진 상황에서 국경 문제는 정말 중요했습니다. 동서남쪽이야 어차피 바다니까 상관 없었지만 북쪽은 중요했죠. 특히 중요한 건 동북면, 몽고에게 뺏겼다가 겨우 되찾았는데 명에서 내놓으라 했고, 그 때문에 고려가 무너진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이성계 자신에게는 기반이 되었던 땅이었고, 조선에게도 자기 나라의 근본이 있던 땅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면은 여진족들이 놀고 있었죠. 일단 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새 나라가 세워지면서 여진족들도 대거 귀화합니다. 고려 때와는 달리 자기들과 친했던 이성계라서 그랬던 건지, 새로운 강대한 나라가 세워져서 그런지는 몰라도요. -_-a 이성계 때 이미 방침이 정해집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의주에서 여연에 이르기까지의 연강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서북면은 이렇게 압록강을 경계로 정해집니다. 다만 이걸 완전히 믿으면 안 됩니다. 바로 다음에 보면 왜구들도 없어지고 왜인들도 내조하면서 살기 좋아졌다 어쩌구 이런 게 나오거든요. 그랬으면 대마도 정벌도 없었겠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는가는 둘째로 이게 조선 왕조의 목표라고 봐야겠죠.
한편 동북면입니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여진족들에게) 만호와 천호의 벼슬을 주고, 이두란을 시켜서 여진을 초안하여 피발하는 풍속을 모두 관대를 띠게 하고, 금수와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의 교화를 익히게 하여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복역과 납부를 편호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또 추장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국민이 되기를 원하였으므로, 공주에서 북쪽으로 갑산에 이르기까지 읍을 설치하고 진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하며, 또 학교를 세워서 경서를 가르치게 하니, 문무의 정치가 이에서 모두 잘되게 되었고, 천 리의 땅이 다 조선의 판도로 들어오게 되어 두만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공주는 현재의 경원-경흥 쪽. 왕자의 난이 있기 전 정도전은 이 곳으로 향합니다. 그 때까지는 동북면이라 불리기만 했던 곳의 행정구역을 정한 거죠. 이 때 남북으로 영흥도와 길주도라는, 함경도의 모태가 될 이름이 정해졌고, 각 지역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여진 식으로 된 이름을 고치기도 했죠. 정도전은 경원에 성을 쌓으면서 6진의 기초를 닦고 돌아옵니다.
이 때의 동북면은 조선인이 있긴 했지만 여진족들과 섞여 사는 미개척지였죠. 이 곳을 정식 도로 편입하면서 고려가 못 했던 일을 시작합니다. 함경도를 온전히 조선의 땅으로 만드는 거였죠. 그리고 주원장은 다른 일과는 달리 여기에 딴지 걸지 않습니다.
태조 실록에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그 안의 여진족은 모두 조선의 풍습에 따르도록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 밖의 여진 부족들은 비록 풍속은 다르지만 조선의 위엄에 감화되어서 앞다투어 내조하고 조공하고 어쩌고 했다고 하죠. 이 둘의 차이를 확실히 봐야 합니다. 두만강 이남의, 조선의 땅으로 인식한 여진과, 두만강 이북의 조선에 복종하기는 하지만 조선 땅은 아닌 여진족들에 대한 차이를요.
2. 태종
(1) 공험진
태종 때는 여진의 반격이 본격화 되던 시기입니다. 주적은 올적합, 올량합, 오도리 등이었죠. 이들은 어쩔 땐 조공을 하러 오다가도 경원 등 최북방의 성들을 공격합니다. 당연히 이들에 대해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터져버립니다. 명의 영락제가 뜬금 없는 결정을 한 거죠.
"황제가 여진에게 칙유하여, 오도리·올량합·올적합 등을 초무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는데, 여진 등은 본래 우리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삼부가 회의한 것이었다." (태종 3년 6월 25일)
아랫 글 보고 추가로 쓰는데, 이 때 여진의 말로 적혀 있어서 조정에 있던 여진족을 시켜 번역하게 했다고 합니다.
급기야 태종 4년 4월 4일, 날짜도 참 좋군요. 명에서 사신이 옵니다. 그 목적은 여진족들을 회유시키는 것, 그리고 그 일대에 건주위를 설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소는... 북청과 단천이었습니다. 함경도 쪽의 여진족들을 모두 자기네가 먹으려 한 거죠. 일단 사신은 사신이니 태종은 잘 대접한 후에 동북면으로 보냅니다. 그 동안에 하륜과 권근을 불러 급히 알아보게 한 것이 바로 고려 때 윤관의 9성이었습니다. 명분을 찾으려 한 겁니다.
사신 왕거인이 온 지 불과 한 달 후, 김첨은 명으로 떠납니다. 여진 지역을 조선이 관할하게 해 달라는 요청과 그 근거가 되는 지도를 들고요. 근거는 이랬죠.
- 동북 지방은 공험진부터 함주(함흥)까지 모두 고려 땅이었음둥
- 요나라 때 저 놈들이 난 일으켜서 함주 이북을 차지했는데, 예종이 토벌해 회복했지비.
- 공민왕 때는 원나라가 가져간 거 모두 돌려 받고 "공험진 이남"을 본국에 환속시키게 하지 않았습네까?
- 결정적으로 느이 아버지 홍무제 때 "공험진 이남은 조선 거임"이라고 약속했고, 거기 이화영(이지란의 아들) 같은 여진족들은 조선에 오래 살아서 다 동화된데다 결정적으로 우리 조상 묘가 공주(경흥)에 있는데 지금 이러면 되겠음둥?
10월에 명에서 칙서가 와서 이를 수락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헌데 왕가인이 또 와서 회유하러 옵니다. 이 양반, 이전에 왔을 때도 "동북면의 여진들이 내 말 안 듣는다"고 불평했었습니다. 그런데 또 안 들었죠. 이렇게 말 하면서요.
"우리들이 조선을 섬긴 지 20여 년이다. 조선이 명나라와 친교하기를 형제처럼 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따로 명나라를 섬김 필요가 있겠는가?"
"본래의 뜻을 변치 말고 조선을 우러러 섬기되, 두 마음을 갖지 말자"
태종은 이런 여진인들에게 선물을 주고 잘 다독입니다. 거기다 이번에도 왕거인이 온 지 한 달도 안 돼 다시 사신을 보냅니다. 내용이야 똑같았죠. 결국 영락제는 포기합니다. 조선에 도움 될 거 하나 없었던 주원장이 이럴 땐 도움이 되네요.
(2) 화전양면
한편으로는 명에서 다시 시비 걸기 전에 확실히 이 땅을 우리 땅으로 잡아야 했죠. 정도전이 쌓았던 경원성의 중요성은 태종 역시 인식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방침을 잡았습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세력을 쌓고 있던 올적합 등이었죠. 서북면에서는 비교적 무난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의 마을들이 통합되어 조선식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녹아들고 있었죠.
토산물을 계속 바치고 서울에 자식 등을 보내는 등 잘 따라주던 그들, 하지만 본질은 오랑캐죠 -_-a 6년부터 올적합 등의 공격이 보입니다. 이게 가속화 된 건 태종 10년, 태종은 북벌을 결심합니다. 쉽게 승리하긴 했지만 도망간 적들은 다시 공격해 옵니다. 특히 최전방 경원의 피해가 심했고, 이 곳의 백성을 후방 경성으로 빼자는 논의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적들이 더 기가 산다는 반대가 나왔죠. 일단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긴 한 모양입니다. 이 때 나온 반론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누에처럼 우리 땅을 먹어 들어오고, 우리는 땅을 깎이는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태종은 이에 "저들이 경원 노리는 건 능 때문이니 옮기면 좀 괜찮아질 거고, 우리 쪽에서 계속 치고 나가면 땅 잃을 일 없을 거다"고 답 합니다. 한 발 물러서긴 하지만 경원을 잃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하지만 경원의 사람들을 경성으로 옮기는 것도 계속돼서 11년에는 경원진을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여진족들도 이에 한 발 물러섰는지 화해를 청합니다. 조정에서는 의심스럽긴 했지만 일단 받아들이죠. 올적합 등도 이 때 귀화합니다. 언제 다시 등을 돌릴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렇게 물러난 조선이 다시 일어난 건 태종 16년, 이 때 영길도를 함길도로 고치는데 이 의미가 없진 않을 겁니다. 다음해 8월, 옛 경원의 땅에 다시 진을 설치할 움직임을 보이거든요. 본격적인 사민 정책도 이 때부터 시작인 거 같구요. 이제 배경은 세종 때로 넘어갑니다.
3. 세종 초
"무인년에 공주성을 중수하여 경원부를 설치하고, 도내의 부유한 백성들을 이주시켜 그것을 채웠더니, 그 후 또 다시 병란을 겪게 되자,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다시 부를 설치하고 이미 각관에게 쇄환하도록 명령하였으나, 각관들은 그들이 호적이 없다는 핑계로 당장에 쇄환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위년 8월 22일)
태종 편의 "지난 줄거리" 느낌이죠. (...)
사민 정책은 기본적으로 함경도 내의 사람들을 최전방으로 옮기고, 삼남의 백성들을 보내 그 자리를 메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_-; 그 총 수가 얼마나 됐을진 몰라도... 계속 계속 보낸 거 같네요. 에휴...
다음 편에 다루겠지만 세종 대의 흉년은 북쪽에 집중돼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죠. 그 중에서는 하삼도에 흉년이 드는 치명적인 일도 벌어집니다. 이런 가운데서 사민은 계속되고 있었으니... 태평성대라 하기에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어떡해요. -_-;
세종 초에도 화전양면전술은 계속됐습니다. 오면 물리치고, 복종해 오면 선물 주고, 굶주리고 있다 하면 쌀을 내려줬죠. 백성들도 굶고 있는 상황에서 욕을 좀 먹긴 했을 겁니다. 햇볕정책에 비유해야 될까요. 그래도 이 경원 땅을 지키기는 참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경원의 읍은 본래 덕릉·안릉 두 능을 위해서 설치한 것인데, 지금은 이미 내지(경성)로 옮겼으며, 본읍은 사면으로 적의 침략을 받으니, 용성(현 청진)의 지리는 이면이 험하게 막혔으므로 경원을 용성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에 여진족 토벌의 영웅이 되는 최윤덕도 이렇게 말 합니다.
"이 지방의 형세를 신이 갖추 아오니 용성으로 옮기는 것이 비록 〈국경에서〉 물러나는 것이나, 그 사이가 심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오니 옮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수긍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 하죠.
"그러나 나의 뜻으로 말하면 물러나오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조정의 논의는 조금씩 최전방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후방으로 피하자는 쪽으로 흘렀습니다. 일견 맞긴 했습니다. 농사로 뭘 어찌할 수 있는 땅도 아니고 적은 계속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종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덕을 배반하고 은혜를 저버려서 변방 백성을 죽이고 노략하니, 만일 토벌하지 않는다면 징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제 태평한 지 오래여서 사방에 걱정이 없다."
"맹자가 말씀하기를, ‘적국의 외환이 없는 자는 나라가 항상 망한다.’ 하였으니 오늘의 일은 비록 야인이 한 짓이긴 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하늘이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다"
세종 15년, 사군 육진 개척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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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아니예요. 5편 이상을 안 쓴댔으니 4편까지는 세이브예요. _-); 그러고보니 북유럽 신화 글은 손 놓고 있었네요. 일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여기서 늘 나오는 말이 "얻을 게 없다" "얻을 게 없다"입니다. -_-; 이전에도 말 했지만 조선의 상황이 참 안습이었던 게... 서쪽으로 요동을 치면 중국과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되고, 동쪽의 여진을 쳐 봤자 이득이 없어요. 남쪽의 대마도를 치자니 여기도 조선에 쌀 받아 먹는 인생 orz...
조상님 너무 욕 하지 맙시다.
세종(世宗)의 世는 영토를 늘리고 오랑캐를 정벌한 공이 있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였습니다. 치세를 정말 잘 한 왕에게 올리는 묘호는 仁이나 成이죠. 당시 유학자들은 성종을 세종보다 더 높게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흉년이 적었고 일을 크게 벌리지도 않았으며, 신하들의 말을 정말 잘 들어줬거든요.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이상형이죠. 하지만 仁이라는 묘호가 간 사람이 하필 -_-; 뭐 반대로 보면 사군 육진 개척을 조선에서 그만큼 대단하게 여겼다는 반증이 되겠죠
아 그리고 불쌍한 게... 세종 초부터 이징옥이 계속 함경도에 있습니다. ..................... 아마 세조 때까지 계속? 그리고 그 말년까지 생각하면...
후 그럼 다음 편...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한 치라도 버릴 수 없다"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하기만 생각하고 장래를 생각지 아니하여 그 일에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세월만 허비한다면 되겠는가"
"비록 내가 있다 하더라도 만일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족히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비록 종서가 있다 하더라도 만일 내가 없었다면 족히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논하는 자들의 말대로 하여 용성으로 경계를 삼더라도 오히려 적이 침입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뒤에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마천령으로 경계를 삼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했는데도 오히려 면치 못하면 결국 철령으로 경계를 삼으려 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 북쪽 변방은 우리 왕실이 일어난 곳이므로 조종 때부터 넓히고자 하였으나 이룩하지 못했는데,이제 다행히 강토를 개척하였다. 장사들이 십 년 동안을 멀리 와 수자리 살았으니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위로할 방법이 없다. 하물며 일을 시작한 때인 만큼 박하게 할 수 없음에랴. 지금 비록 소다리 하나를 썼으나 뒤에는 닭다리 하나도 변변히 차리지 못할 것이다. 만일 장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여 돌아가기를 생각한다면 누구와 함께 이 변방을 지킬 것인가"
- 김종서가 맨날 병사들에게 술 가지고 잔치를 벌인다고 비판하자 그가 한 대답
기대해 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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