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온댄다. 다음주면 영하권인 날씨가 되어버린다니,
습관처럼 밤을 지샜던 엊그제 새벽에 나를 달래었던 말보루 라이트에는 입김이 함께 서렸던 듯 싶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날씨란 놈은 긴장을 풀어버리기 무섭게 다시 독기를 품는다.
이런 놈이였단 걸 알면서도 매번 기대를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도 멍청한 편인가보다. 나 말고도 조금 더 날씨가 순할거라 믿었던 사람은 있겠지?
숙제를 하지 않은 날 나와 함께 벌개진 손바닥을 부비작대던 친구를 얻은 것 마냥 쓸데없이 든든한 기분이 든다.
#2
몇달 전 몸이 안좋았을 때, 손톱이 너무 쉽게 깨져서 잠깐 보호제를 발랐던 적이 있다.
그런데 보호제 사이로 니코틴이 스며들거란 생각은 못하였다.
내가 골치를 썩을만큼 충분히 노래지고 나서야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몇달동안 누르스름해 나를 속썩였던 손톱은 이제야 다시 허여멀건해졌다.
그때부터 담배를 필때면 손톱을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손톱은 남자아이 답지 않다는 수식어를 다시 붙여도 될만큼 다시 이쁘장해졌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니 누래지지 않아 다행인데, 너무 쉽게 깨져서 고생이다. 이러나 저러나 보기 흉하긴 마찬가지다.
어느쪽이 차악인지 고민해보아도 도통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네.
#3
가끔 그립다는게 뭘까, 외롭다는게 뭘까. 그럼 사랑은? 하고 정답 없는 고민을 해볼때가 있다.
사실 그 까짓 것들이 무엇이건 내가 먹을 내일 아침의 만찬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듯 싶다.
라면을 하나 사서, 등교 전 반개를 끓여먹고 두시간을 걸어 수업을 듣고,
또 다시 두 시간을 걸어 집에가는 길에는 남아있을 반 개의 라면스프만큼의 행복과 구질구질함에 설렜던 듯한데
인생이란 건 너무 중요해서 내가 진정으로 진지하게 얘기해야만 진실성을 알 수 있는 하찮은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가 있다.*
그 딴게 무엇이든 내가 먹을 밥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조금 더 중요한 것을 따지라면 아무래도 밥보다는 그깟 사랑이다.
물론 나 또한 내일 아침이 라면 반개가 아닌 밥 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까지 그간에 숨어있는 나의 노력은 충분히 보상 받고있다고 느낀다.
#4
사실, 뼈 빠지게 노력한다고 해서 인생이 바뀐다거나,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진다거나,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혹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을 접은지는 꽤나 오래 되었다.
그깟 사랑, 라면 부스러기 하나를 앗아간 개미를 원망하며 온 집안의 개미를 불태우게했던 나로서는 사랑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내일 아침 먹을 밥이 조금 더 맛있어졌으면 하는 바람에 나는 오늘도 하루씩을 정진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흘려버린 라면 부스러기를 체념할 수 있다면, 남아있는 반 개의 라면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나는 빌어쳐먹을려고 해도 빌 데조차 없는 가난 속에서 가끔은 그런 것을 느꼈던 듯 싶고, 지금의 나의 밥 한 톨에 만족한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하다.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때보다 훨씬 더.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금 더 중요한 것을 따지라면 아무래도 밥보다는 그깟 사랑이다.
#5
사랑은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사랑 속에 숨어 있는 사랑 아닌 것들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우리를 아프게 할 뿐이다.
믿는다고 했지만 기실 떨쳐내지 못했던 나에 대한 가슴 속 깊은 불신이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 또한 아픈 사랑만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종자로서, 올바른 사랑만을 해왔다고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아무렴 어때. 감히 인생을 언급해보자면, 우리는 외롭거나 혹은 외롭기 싫어서 발버둥치며 하루를 정진하는 거겠지.*
가만 생각해보면 아침밥이 나의 외로움을 달래줬던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흠. 밥과 사랑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된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누군가를 보고싶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직접 해본 날이기도 하다.
그립다는 감정은 나에게 도통 도움이 된 적이 없어 이제껏 역겨워했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다.
사랑인 양 날 아프게하고 구차하게 만들었던 사랑 아닌 많은 것들 중 하나인 너와 나는 끝내 친하게 지내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덕분에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있게 되어 쑥쓰러운 기분이 든다. 이번 일 만큼은 고맙다 이자식아.
조금씩 차가워지는 날씨가 왠지 모르게 애달픈 요즈음은 너라는 꽃이 피는 계절이다.
* 오스카 와일드
* 공지영
* 기욤 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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