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차 자주포, 담비(Marder)에서 코끼리(Elepant)까지]
대전차 자주포의 서막
1940년 3월부터 1941년 1월까지, 알케트 사와 슈코다 사에서 쓸모없어진 1호전차 B형 차체에 47mm Pak(t) 36 L/43.4 대전차포를 탑재하는 개량 작업이 진행됩니다. 이 새로운 파생형은 1호 대전차 자주포로 명명되었고, 이것이 독일의 수많은 대전차 자주포 중 첫번째 차량이었습니다.
주포인 47mm Pak(t) 36 L/43.4 대전차포는 개발 당시에는 제법 훌륭한 화력을 보유하였고, 3명의 승무원과 86발의 47mm 포탄을 적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전차 자주포는 제 521, 605, 616, 643, 670 전차엽병 대대에 배속되어 프랑스전에서 활약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일부 보내지집니다.
1호 대전차 자주포의 차체는 더 이상의 대구경 대전차포를 탑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연합군과 소련군의 전차가 발전하며 47mm 대전차포가 가치를 잃자 곧 빠르게 사라지고 맙니다.
1호 대전차 자주포. 202량이 생산되어 전차엽병대대에 주로 배속되었지만 큰 활약 없이 도태되었습니다.
[오리 사냥꾼 담비, 마더 시리즈]
독소전 개전 후 T-34 쇼크에 대해 기갑사단 측에서는 나름대로 대책을 찾아갔지만, 문제는 기갑사단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병사단 휘하의 전차엽병대대의 대전차포들도 마찬가지로 무력화되었고, 이에 독일국방군이 신형 대전차포인 75mm PaK 40 L/46 대전차포의 생산을 서두르고 있기는 했지만 중량이 1.4톤에 달해서 진지구축도 인력이 많이 들었고, 이동시 차량에 견인했다 풀었다를 반복하기엔 당시 계속 진공중이던 독일군에게는 애로사항이 많은 물건이었습니다.
결국 대안으로 퇴역을 중이던 2호전차의 차대가 선택되어 2호전차 F형 차체에 대전차포 전투실을 탑재하는 대전차 자주포가 재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75mm PaK 40 L/46 대전차포의 양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소련군에게서 노획한 76.2mm PaK 36(r) L/51 대전차포를 75mm 구경에 맞게 개량해 대용품으로 삼았습니다.
완성된 차량의 이름은 대전차 자주포 마더(담비)2로 명명되었습니다. 초기형 마더2가 성공을 거둔 이후 75mm PaK 40 L/46 대전차포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초기형 이후로는 76.2mm PaK 36(r) L/51 대전차포 대신 그것을 장비하며 아울러 차체의 높이도 낮추며 급조된 초기형보다는 좀더 실용적으로 개량했습니다. 마더2는 T-34를 훌륭하게 격파해내며 곧 보병부대의 대전차전력에 있어 감초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더2 초기형. 급조되긴 했지만 이 담비들은 훌륭한 오리(T-34의 별명)사냥꾼이었습니다.
마더2 후기형, 낮아진 차체와 달라진 전투실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마더2와 더불어, 독일국방군이 보유한 프랑스제 차량 또한 마더 시리즈로 개조되었는데, 37L 로렌느 견인차와 호치키스 H39 전차, FCM36 전차에 75mm PaK 40 L/46 대전차포가 탑재되었습니다.
이 개조차량들은 마더1이라고 칭합니다. 마더1은 형제인 마더2와 마더3과는 다른 길을 걸었는데, 초반에 잠시 동부전선의 전차엽병대대에서 교전을 치른 후 부품 호환이 쉬운 프랑스로 다시 후송되었습니다. 마더1은 이후 서부전선 개전 이후 연합군을 상대로 실전을 치루며 대부분이 소모되었습니다.
FCM36 전차의 차체를 유용한 마더1.
H39 전차의 차대를 유용한 마더1.
37L 로렌느 견인차의 차체를 유용한 마더1. 마더 대전차 자주포 시리즈 자체가 잡종전차긴 하지만... 형만한 동생은 없다는 말도 있듯이 다른 두 형제들은 마더1 만큼 잡종스럽지는 않은 듯 합니다.
마더2는 초기형 201량, 후기형 651량이 생산되었고, 이후 2호전차 파생형을 전량 베스페 자주포 생산라인으로 통일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인해 생산이 중지되었습니다.
새로운 마더 시리즈로 1943년 2월 76.2mm PaK 36(r) L/51 대전차포를 38(t) 전차 H형의 차체에 탑재한 마더3 H형이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H 후기형은 75mm PaK 40 L/46 대전차포를 탑재했습니다.)
1943년 5월부터 1944년 6월까지는 주포를 75mm PaK 40 L/46 대전차포로 교체하고 38(t)전차 M형의 차체를 유용한 마더 M형 942량이 생산되어 독일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양 보병사단 소속의 전차엽병대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마더3 H 초기형. 마더2 초기형처럼 76.2mm 대전차포를 사용했습니다.
마더3 H 후기형. 이전 모델과는 외관부터 차이가 납니다.
마더3 M형. 특이하게도 전투실이 뒤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대전차 전력의 주력이었던 마더 시리즈였지만, 시리즈 내내 이 기종들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사수의 목숨은 고려치 않는 방어력 입니다.
마더 시리즈의 전투실 장갑판 주변 두께는 11mm 정도였고, 그나마 상부와 후방은 개방형이라 승무원들의 생존이 보장되질 못했습니다. 게다가 차체도 경전차를 바탕으로 한 터라 장갑이 약해 대전차포나 전차의 공격에도 취약했고, 전투실 덕에 차체가 높아져 교전에 불리했습니다.
결국 1944년 6월부터 밀폐식 전투실에 경사장갑을 갖춘 헷쳐 구축전차가 등장하면서 마더3도 생산이 중지되지만, 남은 마더 시리즈는 종전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완수했습니다.
[저격수 코뿔소, 나스호른]
1941년 겨울, 모스크바 앞에서 주코프와 동장군에 쩔쩔매던 독일국방군은 3호전차와 4호전차의 차체를 대전차 자주포의 개발에 응용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3호전차와 4호전차의 차체 자체만 가지고는 대전차 자주포의 차체로 써먹기엔 까다로운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이 계획은 잠시 보류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 1941년 9월부터 알케트 사가 자주포 전용으로 포 조작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3호전차 J형과 4호전차 F형의 엔진을 중앙으로 이동시키고 전장을 늘린 차체를 개발해 차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여기에 당시 개발된 최고의 대전차포인 88mm Pak 43/1 L/71 대전차포가 탑재되며 신 차량이 완성됩니다.
1942년 10월에 알케트 사의 시제차량이 히틀러에게 공개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호르니세 대전차 자주포의 성능에 만족해하면서 1943년 5월까지 100량을 생산할 것을 주문했고, 이는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되어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훔멜 자주포와 함께 전장에 데뷔합니다.
30도 각도 강철판을 1000m 거리에서 190mm를 관통하는 88mm Pak 43/1 L/71 대전차포의 가공할 위력 덕에 호르니세는 종종 적 전차의 사거리 밖에서 그들을 유린할 수 있었고, 훗날 1945년 3월에는 소련군의 IS-2 중전차를 4600m 거리에서 격파하는 괴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호르니세의 위력에 만족한 독일국방군은 같은 해 동안 245량을 추가 주문합니다.
동부전선의 나스호른과 승무원들. 같은 차체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훔멜과 매우 유사한 나스호른이지만, 구경장에서 30구경과 71구경으로 명백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포신 길이로 어느정도 구분이 가능합니다. 물론 각 포의 구경은 다르지만, 150x30<88x70. 나스호른이 더 깁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나스호른. 평상시엔 저렇게 주포를 고정해 놓고는 했습니다,
나스호른 사진들입니다,
1944년 2월, 히틀러의 명령으로 호르니세는 코뿔소를 뜻하는 나스호른으로 개명했고, 새로운 조종수 좌석이 추가됩니다.
나스호른의 주포는 마더 시리즈보다 더욱 강력했기에 소속된 전차엽병대대에서 맹활약을 벌일 수 있었지만, 중량의 한계로 마더 시리즈의 상부 개방형 전투실과 얇은 장갑이라는 단점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1944년부터 4호 구축전차가 등장하고 안그래도 훔멜 자주포에게 밀리던 나스호른의 생산량은 더욱 줄어들지만, 그 맥만은 유지되어 1945년 4월까지 총 494량이 생산되어 소모됩니다.
[포덕후의 정점, 디커 막스와 슈퍼 에밀]
※잘 알려진 영어식 발음으로 적겠습니다
1939년 9월,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는 크루프 사에 요새화된 적 진지나 중전차를 격파 가능한 105mm 혹은 128mm 포를 장비한 중형 대전차 자주포의 설계를 명령했습니다.
1941년 초/중반에 크루프 사는 개선된 4호전차 A형의 차체와 105mm sK 18 L/52 중야포에 머즐브레이크를 부착한 105mm K 18 L/52 포를 결합해 2량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했으며, 3월 말 히틀러에게 처음 공개했습니다. 1942년 봄 쯤에 생산이 예정되었지만, 다른 차량들의 생산에 밀려 취소되고 맙니다.
이 4호 자주포 A형 디커 막스의 주포인 105mm K 18 L/52 포는 30도 각도 강철판을 2000m 거리에서 111mm 관통하는 준수한 성능을 가졌으며, 장갑 면에서도 상부 개방을 빼면 마더 시리즈보다 약간 나은 편이었습니다.
프로토타입 2량은 지브롤터 공격에 대비해 521 전차대대에 배속되었다가 이내 독소전 개전 후 제 3기갑사단에 배속되어 실전을 치뤘습니다. 실전 기간 동안 디커 막스 대전차 자주포는 소련의 전차들을 무리없이 잡아내며 유용성을 증명했지만, 1량은 탄약 유폭으로 격파되고, 남은 1량은 1941년 10월 공장으로 회수됩니다.
디커 막스. 두터운 주포가 인상적입니다. 독소전 초반 동안 디커 막스는 KV-1, KV-2, T-34등 당시 압도적인 소련 기갑전력에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끝내 대량생산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디커 막스보다 더욱 강력한 128mm Pak 44(80) L/55 대전차포를 장착한 5호 자주포 슈퍼 에밀이 개발되지만, 이 또한 2량 생산으로 그친 후 현재 1량이 쿠빙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슈퍼 에밀은 6호전차 티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티거의 시제차량으로 만들어진 모델들 중에 VK3001(H)이 있는데 프랑스와의 전쟁이 예상보다 너무나 빠르게 끝나버려 선택받지 못하고 있다가, 이 슈퍼 에밀에 사용되게 됩니다
크고 아름다운 포신을 자랑하는 슈퍼 에밀과 포신에 앉은 병사들. 재미있어 보입니다.
두 대전차 자주포는 당시의 다른 차량과의 경쟁에서 밀려 양산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다양한 병기 개발로 전황을 타개하려 했던 독일국방군의 노력의 결과인 만큼, 성능 하나는 썩 좋은 편이었습니다.
[슈퍼 에밀의 배다른 남매 Flak 88mm-Sonderfahgestell]
6호 타이거 전차 개발 계획의 2번째 단계였던 VK3001(H)계획이 사라지고 남은것이라곤 괴물자주포 12.8cm 완고한 에밀(Sturer Emil)자주포 2대와 VK3001(H)차체 2개, 여러 실험용 차체들 뿐이었습니다.
지휘부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후 프랑스전의 경험에 의해 강력한 대전차 자주포와 이동할수 있는 대공포를 병기국에 제작을 의뢰하는데 처음에는 따로 제작을 하려했지만 여러가지의 개발계획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도 촉박하고 제작여건이나 비용의 문제로 고민을 하게됩니다.
이것 때문에 병기국은 대전차 교전능력을 지니면서 대공포의 역할도 수행할수 있는 Flak 88mm에 주목하였고 빠른 시제차량 제작을 위해 VK3001(H)계획에서 채택되지 못한 여러 시제 차체중 앞서 언급되어진 VWF1을 골라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를 크룹사에서 제작하게됩니다.
1942년 12월에 완성된 시제1호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는 주행테스트중 여러 기계적 요소가 불안정하여 계획이 중지되고 마는데 1944년 다시 계획이 부활합니다. 그이유는 대도시나 여러 핵심시설을 보호하는데 진지에 고정된 88mm대공포와 이동이 가능한 20mm와 37mm의 대공포면 충분하였는데 사방에서 날아드는 연합군의 폭격기와 전투기들 때문에 이동가능한 소구경의 대공포로는 화력이 약해 대응이 어려워서 이동가능한 88mm대공포를 급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VK3001(H)계획에서 채택되지 못한 VWF1차체에 88mm Flak 37/41대공포를 장착한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는 자유로운 고각조절로 유사시에는 대전차 공격도 가능한 꽤 전망이 좋은 대공자주포였습니다..(사진의 88mm대공포는 Flak 41)
기존의 자주포가 다른방향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차체를 움직여야 했지만 Sonderfahgestell 는 대공포+자주포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제자리에서 88mm포를 방향전환 할수가 있었습니다.(사진의 88mm대공포는 Flak 41)
1944년 3월 덴마크에서 테스트를 진행중인 시제2호 차량으로 평상시에는 소화기의 방어목적으로 양쪽에 사이드 스커트를 두르고 있다가 대공임무 수행시 승무원 9명의 활동편의를 위해 사진처럼 옆으로 펼칠수가 있는 구조였습니다.(사진의 88mm대공포는 Flak 41)
완벽한 대공 임무 수행을 위해 최대고각으로 88mm대공포를 들어올린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의 모습입니다.(사진의 88mm대공포는 Flak 41)
너무 늦게 나와버린 환상의 88mm대공자주포
1944년 다시 활발하게 양산계획이 논의됐던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는 늦게 등장하는 바람에 겨우 2대만 만들어 지는데 그이유는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들 때문에 독일의 전력은 분산됐으며 연합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대도시와 공업단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일선부대에 배치되었던 88mm 대공포까지도 독일 본토 방어를 위해 회수시키고 있었던 상황에서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에 탑재시킬 수 있을 정도로 88mm포의 공급 수월치 않았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비록 2대만 생산되고만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였지만 기존에 88mm 대공포를 고정시키거나 트럭 등에 견인하여 끌고 다니던 것에 비해 스스로 움직일수 있었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기존의 고정형 88mm대공포들이 연합군의 정찰기에 발각되어 전투기나 폭격기등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만약 대량 생산됐다면 자주 88mm대공포를 이동시켜 진지변환을 할수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됐을겁니다.
2대만 생산된 Sonderfahgestell 대공자주포지만 그중 시제1호 차량이 이탈리아 전선의 대공포대대에게 배치되어 실전을 겪습니다..(사진의 88mm대공포는 Flak 37)
[전차잡는 코끼리, 페르디난트/엘레판트]
포르쉐 박사가 헨셀사와의 경쟁에서 패하여 포르쉐 티거가 채택되지 못했지만, 이에 관심이 많던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에게 차체 90대를 생산하도록 허락합니다.
1942년 9월, 포르쉐 티거의 차체들을 새로운 중(重)대전차 자주포로 개량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1942년 11월 디자인이 완성됩니다.
이 디자인은 나스호른에도 장착된 88mm PaK 43/2 L/71 대전차포를 탑재한 밀폐식 전투실과 200mm의 압도적인 전면장갑을 장착했고, 발전용 엔진을 마이바흐의 신형 가솔린 엔진으로 교체했습니다. 또한 추가 장갑판을 볼트로 차체에 고정해 전체적인 방어력 또한 증강시켰습니다. 차재기관총은 없었지만, 대신 MG34 1정을 1정 지급해 사용할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1943년 3월 프로토타입이 생산된 것을 시작으로 5월까지 포르쉐 티거의 차체들은 전부 신형 대전차 자주포로 개량되었습니다. 신차량의 이름은 포르쉐 박사의 이름을 따 페르디난트로 명명되었습니다.
페르디난트 대전차 자주포. 헨셀에게 밀려 탈락되어야 했던 포르쉐 티거의 화려한 복귀입니다.
소련군에게 노획된 페르디난트. 두터운 중장갑 덕에 페르디난트가 전장에서 격파된 적은 드물었고, 대부분 기계적 고장이나 느린 기동성 덕에 후퇴시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경우가 많습니다.
페르디난트는 제 653, 654 중전차엽병대대에 지급되어 쿠르스크 전투에서 데뷔전을 치뤘습니다. 페르디난트는 강력한 주포와 막강한 장갑을 바탕으로 소련 전차들과 대전차포를 말 그대로 코끼리처럼 짓밟아 버렸지만, 쿠르스크 전투가 워낙 치열했고, 페르디난트의 약점인 잔고장과 느린 기동성 덕에 독일국방군은 상당수의 페르디난트를 상실해야 했습니다.
살아남은 48량의 페르디난트는 전차장 큐폴라와 차재기관총을 장비하고 엘레판트(코끼리)로 명칭이 바뀝니다. 이 코끼리들은 제 653 중전차엽병대대로 전부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과 동부전선을 전전하며 남은 전투를 치릅니다.
잘 알려진 소문과는 달리 의외로 엘레판트의 주 고장 원인은 하이브리드 구동 장치와 내부 결함이 아닙니다. 45톤으로 상정되어 장착된 궤도부품들이 65~70톤으로 늘어난 엘레판트의 중량 때문에 피로누적이 심해 궤도가 퍼져 버리는 일이 잦았는데, 이것이 하이브리드 구동 방식을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타고 와전된 것이라고 합니다.(물론 하이브리드 기술 덕에 엔진효율이 떨어져 더럽게 느리기는 했습니다.)
또한 쿠르스크 전투에서 보병의 접근공격으로 파괴된 페르디난트는 단 1량뿐으로, 두터운 장갑이 보병들의 수류탄과 화염병을 차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대전차 자주포는 강력한 상대였던 소련군의 기갑전력에 맞서기 위해 보병사단 하 전차엽병대대에 배속되어 수많은 전차들과 격투를 벌이며 독일국방군의 귀중한 과도기 전력이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엘레판트를 제외한 나머지 대전차 자주포들은 방어력의 부족이라는 고질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고, 결국 1944년을 기점으로 그 사상을 계승하는 구축전차들에게 바톤을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패배가 가까운 시점에서 한 대의 전차라도 더 필요했던 독일국방군은 남은 대전차 자주포 모두를 전장에 투입했고, 이들은 나치 독일의 패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스펙은 글 길이상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