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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07 05:31:56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단종애사 - 5. 사육신
후마니타스인지 뭔지 하는 희한한 과목이 생겼더군요. -_-; 새내기 수업인데 졸업하려면 들어야 됩니다. 왜 이런 것만 남았을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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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을 뒤지다가 찾아 낸 사관론 하나를 옮겨보겠습니다. 재밌네요.
"아! 모르는 자는 반드시 나의 이 말을 인후(목구멍)가 막혔다고 식음(음식-_-;)을 폐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인후가 막혔을 때는 반드시 막힌 것을 먼저 치료한 뒤에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막힌 것을 다스리지 않고 음식을 먹이는 데만 힘쓰게 되면, 나는 아마도 그 막힌 것이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 전복(망했어요~)하기에 이르지 않을까 두렵다"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6조가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할 때 나온 말입니다. 이 앞은 "단종 때 간신들이 설쳐서 나라를 좀 바로잡아야 돼서 저랬다"는 변명이 있죠. 그렇게 보면 이건 6조 직계제 뿐만 아니라 수양이 왕이 된 것 자체에 대한 변명으로 보입니다. 이 때 이걸 반대하다가 욕 먹은 사람이 하위지입니다. 수양은 열 받아서 머리 끄댕이를 잡고 끌어내게 한 다음에 죽이려 했죠. 목숨은 건졌습니다만... 이걸 보면 수양이 집현전을 없앤 건 반란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마음 먹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이 주동자가 됐던 것도 단종 복위 이외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 같네요.
시작해 보죠.
1. 수양의 하늘
그 이후의 단종에 대한 키워드는 "상왕"과 "노산군"입니다. 극과 극인 말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죠. -_-a 휴...
이제껏 상왕이 됐던 왕들은 태조, 정종, 태종입니다. 이 중 태종 이방원을 제외한 둘은 허수아비 신세였죠. 단종은 당연히 후자였습니다. 그나마 태조는 아버지요 정종은 형이었지만 그는 조카였죠.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두번은 만나서 사냥을 가거나 술 마시거나 선물을 주거나 했으니까요. 정권은 참 평화롭게 이양됐고 다음 해에는 명에서 허락도 떨어졌습니다. 일단은 어르고 달래는 게 여론에도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단종 친위 세력에 대한 숙청은 계속됐습니다.
"양씨, (좀 많아요 -_-;)는 교수형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하며, (역시 많아요), 정종은 고신(직첩)을 거두도록 하라.”
(세조 1년 11월 9일)
혜빈 양씨, 대비가 없는 상황에서 단종의 어머니와도 다름 없던 이는 이렇게 죽게 되었고, 그들을 따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금성대군 등 종친부터 정종까지는 죽진 않았지만 종친이라서 봐 준 것일 뿐이었죠. 앞에서는 친한 척, 뒤에서는 자기를 따르던 이들을 죽여가는 모습을 본 단종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전 편까지 단종을 친위하는 세력은 구심점이 없었고, 그래서 각개격파 당한 거라고 얘기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각개격파 당한 거라구요. 사육신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건 맞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 늦었습니다. 김종서를 내리친 철퇴의 힘이 그렇게 컸던 걸까요. 안평대군이 의외로 죽을 정도의 짓을 해서 수양 쪽에 확실한 명분을 줬던 걸까요. 수양이 권력을 잡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실록과는 또 다르게 수양의 힘이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걸까요.
단종에게 힘이 되어 줄 이들이 하나씩 숙청당하는 동안 한 쪽에서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는 별 해가 되지 않지만, 수양의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던 이들이 뭉치기 시작한 거죠.
2. 그 날 하루
(1) 역모 고변
6월 2일. 수양이 왕이 된 지 일 년쯤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 전 날에는 명나라 사신이 와서 단종과 함께 잔치를 열었었죠. 이 때 경악할 만한 보고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 사건을 알린 자는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역모였고, 거기에서 나온 이름은 성삼문 세 글자였습니다.
재밌다고 해야 할 지 그 답다고 해야 할 지, 실록에서는 수양을 직접 죽이려 했다는 말은 피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명회가 상왕을 죽이려 하니까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었죠. 상왕과 대립하는 사람 역시 수양 자신이 아닌 그 세자를 지목했고, 둘 다 어리니 상왕이 다음 왕이 돼야 한다, 이런 느낌이었죠. 물론 그 다음에는 "이런 상황에서 상왕을 다시 올려야 된다"고 적고 있죠. 누가 정리했는지 몰라도 이 때 머리 아팠을 거 같습니다. -_-;
자... 그 날의 광경을 실록과 야사를 조합해서 재구성해 보도록 하죠.
끌려 온 성삼문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 했다"고 합니다. 김질과 대질하게 해 달라고요. 김질은 스포일러 읊듯이 신나게 얘기를 꺼냈고, 성삼문은 "됐다 고마해라"면서 말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 다음부터는 실록과 야사가 내용이 다르죠.
실록에서는 "혜성이 나타나서 참소하는 사람이 나올 것 같아서 그랬다"면서 발을 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문해도 "다른 뜻이 없었다"면서 변명하죠. 연루자들을 말해서 끌려 온 사람들도 모른다, 몰랐다면서 뭔가 비굴한 모습까지 보여 주죠. 그렇다면... 야사를 볼까요?
(2) 우리는 나리의 신하가 아니오!
+) 표준어는 나리죠. 왠지 느낌이 좋으니 강조할 땐 나으리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뜻 외에 종친, 특히 왕자들을 부를 때 쓰던 호칭이었다고 합니다.
"다 참말이다. 상왕께서 젊으신데 손위하셨으니, 다시 세우려 함은 신하된 자가 마땅히 할 일이라, 다시 무엇을 묻는가!"
이 때 성삼문은 웃으며 말 했다고 합니다. 아마 좌절감이 섞인 박장대소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일이 실패했음을 알고, 최소한 자기 할 말이라도 다 하고 죽으려 했던 거겠죠. 이어서 김질에게 말 합니다.
"니 말도 이리저리 둘러대서 적절하지 않다. 우리들의 뜻은 바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 한 것이다!"
실록에서는 수양이 그를 꾸짖자 "진실로 맞는 말씀입니다. 신은 벌써 대죄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라면서 자기 죄를 실토했다고 하죠. 이 때 고문했다는 말도 없이 수양의 말 한 마디에 뱉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야사에는 이 때 고문이 가해져서 말 했다고 하고 있죠. 그의 입에서 나온 인물들은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ㆍ유성원ㆍ유응부ㆍ박정이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국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실록에서야 "모릅니다" "몰라요" "모른다니까요" 라고 했던 이들이 정작 야사에서는 이렇게 말 했다고 돼 있군요.
성삼문 : 천하에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는가? 어찌 이게 모반인가? 온 나라 사람이 내 맘을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했으니, 이 성삼문이 신하가 돼서 그걸 볼 수 있겠는가? 나.으.리가 심심하면 지를 주공, 주공 그랬는데 이게 주공인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열 받은 수양이 말 합니다. "선위 받을 때는 저지하지 않고 나한테 붙었다가 왜 지금 이러냐!"구요. 그의 답입니다.
성삼문 : 그 때 했으면 죽을 뿐이지. 괜히 죽어서 뭐 하게? 계속 참고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수양 : 니가 나를 나리라고 하는데 그럼 내가 준 월급은 왜 받아 먹었는데? 내가 준 돈 먹고 그러면 그게 반란이지 엇다 대고 상왕 핑계대냐?
+) 따지고 보면 꽤나 그럴 듯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이 그걸 초월했죠.
성삼문 : 상왕이 계신데 내가 왜 나.으.리 신하냐? 우리 집에 가 봐라. 니가 준 월급 쓴 거 하나도 없다. 이거 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원문은 나리의 말은 허망하여 취할 것이 없다)
이에 수양은 쇠를 구어 다리와 팔의 힘줄을 끊었다고도 하고, 배꼽을 쑤셔 기름이 '지글지글' 끓었다고 합니다. -_- 이후 쇠가 식자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성삼문 : 다시 달구어 와라. 나.으.리 형벌 참 독하네. (유응부가 했다고도 돼 있습니다)
이 때 신숙주가 수양의 옆에 있었는데 그를 꾸짖었다고 하죠. 서로 친한 사이였다고 하는데, 실록에서도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게 있다는 걸로 봐서 확실히 죽이려 하긴 했나 봅니다.
성삼문 : 세종께서 옛날에 집현전에서 원손(단종)을 안고 "내가 죽은 뒤에 얘를 잘 부탁한다"고 하신 말씀 잊었냐? 니놈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에 신숙주가 부끄러워하니 수양이 뒤에 숨게 했다고 합니다. 배반의 아이콘 신숙주의 시작입니다.
이 때 수양은 박팽년을 살려주고 싶어서 "넌 안 했다고 해라"고 조언해 줬다는데, 박팽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양을 계속 나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수양은 그에게도 따져 물었죠.
수양 : 니가 나를 나리라고 하는데 이하 동문
박팽년 : 나는 상왕 전하의 신하였고 니한테는 장계 쓸 때도 한 번도 신臣이라고 안 썼고 녹도 안 먹었다 이놈아
나중에 확인해보니 모두 거巨자로 돼 있었다는, 현대에도 널리 알려진 페이크였죠.
수양은 이어 유응부에게 묻습니다. 뭘 하려고 했냐구요. 그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유응부 : 잔치날에 한 칼로 족.하(조카-_-; 현대로 생각하면 어이 자네 정도)를 없애고 상왕을 올리려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뭘 하겠냐.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라.
수양 : 니가 상왕의 이름을 내걸고 반란 일으킨 게냐!
하면서 살가죽을 벗겼다고 하죠. 이 때 유응부는 시종일관 당당했던 성삼문을 디스합니다. 이건 뒤에서 다시 고찰해 보겠습니다.
"샌님(서생-_-;)들과는 일을 같이 하지 말라더니 과연 그렇구만. 지난번 칼이 잘 드나 시험해 보려 했는데 니들이 나중에 하라고 했었지? 그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니들은 꾀가 없으니 짐승이랑 뭐가 다르냐?
"아 몰라 짜증나. 더 물어볼 거 있으면 저 가엽고 딱한 샌님들에게나 물어봐."
이 때 쇠를 달궈 허버지 사이에 넣었는데, '지글지글' 끓으며 살이 익어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고, 쇠가 식자 다시 달구어 오라면서 던졌다고 합니다. 손이 묶여 있지 않았나 봐요 - -;
이외에도 이개는 "이게 무슨 형벌이냐", 그러니까 법에 있느냐면서 묻자 수양이 대답을 못 하고 단근질(쇠로 지지는 것)을 안 했다고 하고, 하위지도 "반역이면 죽이면 그만이지 뭘 더 묻냐"고 했다고 합니다. 왠지 김종서나 안평대군 등을 죽일 때 심문 같은 것도 안 하고 바로 죽인 것에 대한 디스도 같이 한 거 같네요.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국문 장면. 하지만 그 사정을 살펴보면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3) 1년간의 준비
6월 1일, 명나라 사신이 오는 자리. 거기에는 수양과 그 측근들이 거의 참석했었죠. 성삼문 등이 목표로 삼은 건 이 때였습니다. 이 때 연루돼 죽은 자가 칠십명이 넘는 걸로 봐서는 1년 동안 정말 차근차근 준비해 온 것 같습니다. 성삼문의 아비 성승도 여기 포함돼 있었고, 박팽년의 아비 박중림도 여기 포함돼 있었죠. 그 결과가 드러나는 듯 싶었습니다.
연회에서 수양 등을 호위하는 별운검, 여기에 하늘이 내린 운명인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그의 친구 유응부가 임명됐습니다. 이 때 수양과 한명회, 신숙주 등을 죽이고 역시 자리에 있는 상왕을 옹립한 다음 명나라 사신에게 당위성을 주장하자는 거였죠. 꽤나 괜찮은 계획이었습니다만... 이 때 끼어든 것이 한명회입니다.
한명회는 "자리가 좁고 날이 더우니 운검은 빼고, 세자도 들이지 말자"고 건의했고, 수양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입니다. 대수롭지 않았던 이 결정으로 모든 게 바뀐 거죠. 성상문, 박팽년과 성승, 유응부는 이걸로 싸우게 됩니다.
유응부 : 이판사판이다. 지금 수양과 한명회라도 죽이자.
성삼문 : 세자가 없으니 별 소용 없다. 기껏 죽였는데 세자가 군사 이끌고 오면 허사가 된다. 나중에 둘이 같이 있을 때 노리자. (실제로는 존댓말 썼겠죠 - -;)
유응부 : 빨리 해야지 미루면 기밀이 누설된다. 다 죽이고 경복궁으로 가면 세자가 뭘 하겠느냐.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이 때 성삼문과 박팽년은 "이건 하늘의 뜻이다"면서 반대했고, 계획이 중지된 걸 모른 윤영손이 칼을 품고 일을 벌이려 하자 역시 말렸다고 합니다. 예. 하늘의 뜻이었을까요.
계획이 틀어지자 바로 배신자가 나옵니다. 김질은 바로 장인에게 달려가서 의논했고, 정창손은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고발하면 부귀를 누릴 게다"고 하면서 일이 허사가 된 거였죠.
1년간의 준비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난 상황, 유응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뭐 성공 가능성이야 적었겠지만 이렇게 된 거 하늘에 뜻을 걸고 해 봤어야겠지요. 말리는 자들을 발로 차 가며 억지로 일을 성사시켰던 수양과의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이 때 단종이 모의에 참가했다는 걸 인정한 거죠. 실록과 야사에서 같이 드러나는 걸로 봐서는 이걸 인정한 건 사실인 거 같습니다. 글쎄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 죽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요. 생각해 볼 면이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보호해야 할 단종을 끌어들인 것은 좋게 보기는 힘들죠. 유응부의 말대로 더벅머리 서생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 의기는 존경해야겠지만 내용은 잘 했다고 보기 힘듭니다.
3. 가장 길었던 하루
6월 1일, 이 날 단종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의 외삼촌 권자신 역시 여기에 연루돼 있었고, 단종에게 소식을 알리는 건 그와 그의 어머니가 맡았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문종의 비 소헌왕후의 어머니, 단종의 외할머니였죠. 그냥 엎드려 있는 게 좋았을 단종은 이 때 지지를 표명했고, 당일에는 권자신에게 긴 칼을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그리고 성삼문이 굳이 빼지 않고 모의에 참가한 걸 인정했다는 걸 보면 의외로 단종도 여기 깊숙하게 관련돼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어린아이라서 죄 없이 죽은 게 아니라는 거죠. 그대로 있었어도 언젠가는 죽었을 지 모르겠지만, 그냥 죽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이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다면 그 날 하루는 정말 길었을 겁니다. 성공할까 실패할까, 수양이 알아채지는 않았을까, 일이 벌어진다면 내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을까. 하지만 정작 그 날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초조해 하면서도 웃으면서 수양을 대했겠죠. 이 길었던 하루가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일이 벌어진 후, 수양은 승지 윤자운을 보내 단종에게 이 일을 알렸다고 합니다. 단종은 그에게 술을 내려주었다고 하죠. 그 이상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과연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죽음을 직감했을까요. 슬펐을까요, 아니면 후련했을까요.
이제 단종의 목숨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은 수양은 물론 그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다음 편부터 그의 마지막을 따라 가 보죠. 우선 사육신 얘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4. 수양산 바라보며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 주려 주글진들 채미도 하난것가. /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생각한다. 굶주려 죽어도 고사리라도 캐 먹겠는가. 비록 푸새(산나물)라도 그게 누구 땅에서 낫느냐.
성삼문
이제는 백이와 숙제. 은이 멸망한 후 주나라의 것을 먹지 않겠다면서 수양산으로 들어갔죠. 이름이 참 들어맞네요. 거기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하여 주나라 건국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충신으로 이름 높은 이들이었죠. 뭐 이 시는 단종에 대한 절개와 충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국어 수업 같은 얘기는 하지 맙시다.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 낙락장송이 다 시우러(기울어) 가노매라. / 하믈며 못다 픤 곳이야 닐러(말 해) 므슴(무엇) 하리오
유응부
낙락장송. 언제나 푸른 절개의 상징이죠. 이게 그 자신을 뜻하는 거라면 못 다 핀 꽃은 누구를 뜻 하는 걸까요.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오랴 /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박팽년
까마귀는 눈을 맞아 흰 것 같지만 검은 게 어떤 나.으.리와 닮았죠. 정몽주를 패러디한 명시입니다.
방안에 혓는(켜진) 촛불 눌과(누구와) 이별하였관데 /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줄 모르고 / 저촛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이개
촛농을 눈물에 비유한 시입니다. 누구를 생각하기에 그렇게 속이 탔던 걸까요. 공주의 남자에서 김승유와 신면, 정종의 스승으로 나온 그, 그의 최후가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되네요.
이들 "사육신"은 후에 남효온이 육신전이라는 제목의 책을 지어 그들을 추모하면서 만들어진 명칭입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하위지, 이개, 유성원이 포함돼 있죠. 하지만 이 때 절개를 지켜 죽은 이들은 이들만이 아닙니다. 성삼문의 아비 성승부터 김문기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련됐죠. 수양의 공신 사랑, 학자 사랑은 상당했고, 집현전 세력은 그가 계속 끌어들이려고 했던 이들입니다. 수양의 하늘 아래 묵묵히 살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역사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하늘 아래 임금이 둘일 순 없다는 것 때문에요. 그 전후의 반역들과는 방향을 달리하는 이 반역은 후에 충신의 대명사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역사의 패자는 현대에 이르러 더 칭송되었고, 승자인 세조는 수양으로 불리며 까이게 됩니다.
후에 사림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이 사건은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어 빙빙 돌려서 수양을 비판했고, 다른 사관들 역시 수양에 비판적인 사초를 남긴 게 발견되면서 조선 최초의 사화가 시작되었죠.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 육신전을 왕에게 충신의 얘기이니 읽어보라고 했다가 크게 욕 먹습니다. (엔하위키에는 경연자리에 썼다고 돼 있더군요. 지금은 수정됐습니다) 이 때 선조가 조목조목 "이놈들이 왜 충신이냐"고 반박하면서 아예 책을 불태우고 얘기도 못 하게 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이 때 삼공이 굽신굽신하며 없애는 것만은 막아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정실록에는 이들이 사육신의 충정에 대해 간곡하게 얘기하니까 임금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고 하죠. 사림의 공통적인 생각을 볼 수 있는 부분이고, 한편으로 사림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갔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후에도 사육신의 얘기는 계속 퍼졌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킬 때 명분으로 쓸 때도 있었습니다. -_-; 사육신과 같이 충정을 발휘하자 이런 거였죠. 효종 대에 이르면 이들의 신원이 시작되어 숙종 때에 확실히 복원됩니다.
이들에 반대하는 김시습, 남효온 등의 생육신이 있는데, 이들 역시 미친 척을 하거나(김시습) 정계에 진출하지 않는 식으로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하죠. 재밌는 건 남효온은 이 때 겨우 세 살이었는데 이름이 올랐다는 것입니다. 일단 육신전을 지은 이기도 하고 사림의 시작이라 할 만한 김종직이 그의 제자였다고 하네요. 위의 육신전의 내용이 다 맞진 않을 겁니다. 겹치는 부분도 있고 너무 성삼문에게만 중심이 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확실한 건 그들이 자기들에게는 아무 이익도 안 되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거겠죠.
이미 수양의 하늘 아래 잘 살 수 있으면서도 가능성 낮은 일을 벌였던 이들, 부러지되 꺾이지는 않는 선비의 표상 같은 이들은 이렇게 쓰러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 세력이 이렇게 허물어져 가면서 수양은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죠.
흔히 알려진 시 하나를 마지막으로 글을 맺겠습니다. 앞으로 한두편? 얘기를 끝낼 때가 왔네요.
이 몸이 주거 가셔 무엇이 될꼬 하니 / 봉래산(금강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야 이셔 /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죽은 후에 늘 푸른 소나무가 되어 세상이 눈에 뒤덮일 때 혼자서 푸르름을 자랑하겠다고 했던 성삼문. 이렇게 그는 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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