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좀 축구글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서 쓰기가 좀 꺼려지지만, 어디든 혹시 인터넷 기사로 뜨면 쓰기가
민망해질 것 같아서 먼저 질러 봅니다. 해외축구에 별로 흥미가 없으시거나 너무 많은 축구글에 짜증이 나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조금만 이해를 ㅠㅠ
https://pgr21.co.kr/zboard4/zboard.php?id=freedom&page=3&sn1=&divpage=6&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1380
큰 호응은 없었지만(^^;;) 지난번에 기본적인 아스날 소개글을 썼었는데, 결국 박주영이 와버렸네요. 9번을 들고
저번 글에서 얘기했던 대로, 이번엔 '저주'라고 불리는 아스날 9번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아스날팬들 중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이니 팬분들은 살짝 스킵해 주시고(;;) 잘 모르시는 분만 보시면 괜찮을 듯 싶습니다
9번은 축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이시라면 다들 아시다시피, 골잡이들이 많이 다는 번호입니다.
아스날에서 9번을 달았던 선수들도 대부분 스트라이커 혹은 스트라이커를 볼 수 있는 선수들이었는데,
이들은 망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팬들에게 상처 혹은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박주영 선수가 9번 유니폼을 들자마자, 해외던 국내던 아스날팬들 사이에서는 설마 이번에도....?
라는 수군수군거림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 니콜라스 아넬카(프랑스, 원 소속팀 PSG, 스트라이커)
우수한 선수들이 쏟아져나왔던 90년대 프랑스 유망주 중의 한 명인 아넬카.
프랑스 축구에 정통했던 벵거의 매의 눈(-_-)에 의해 96-97시즌 윈터브레이크에 파리생제르망(=PSG)에서
단돈 0.5m에 영입됩니다. 앙리 이전의 아스날 최다골 기록보유자인 이언 라이트의 백업 혹은 플랜 B를
위한 영입이었죠. 라이트의 득점력은 여전했지만 슬슬 선수생활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으니.
초반 백업멤버로 활용되던 그는 라이트의 부상을 틈타 주전급으로 도약하고, 97-98시즌 벵거 체제 아스날의 첫 더블에
공언합니다.
그에 대한 시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비에이라, 프티 등 프랑스 선수들을 데려오고 폴 머슨 등 아스날의
베테랑급 잉글랜드 선수들을 내보내는 것에 대해 언론과 팬들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는 아스날의 전설 라이트의 자리에 들어가는 '어린 애송이'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는지도 모르죠
하여튼 아넬카는 97-98시즌 좋은 활약을 펼치고 시즌 종료 후 라이트가 웨스트햄으로 떠나면서
결국 성공적으로 아스날에 안착하고 그 시즌 주전으로 좋은 기록을 올리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지만,
98-99시즌 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레알 마드리드가 그에게 접근하게 됩니다.
사전 접촉 등의 문제로 난리가 났었던 걸로 압니다. 결국 그는 소원대로 자신을 스타로 만든 아스날을 떠나 레알로 갑니다
사실 아넬카까지만 해도 그리 아스날에 나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0.5m에 사온 어린 선수를 세시즌만에 무려 23m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았고,
그를 대체하기 위해 유벤투스에게 10m를 주고 데려온 선수가 바로 모나코 시절 벵거의 제자였던 '티에리 앙리'였으니까요
2. 다보르 수케르(크로아티아, 원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를 데려왔지만, 이전 시즌 유벤투스에서 20경기 3골이라는 극도의 부진을 보였던 앙리만을 믿기에는
위험요소도 있었고, 앙리 개인에게 주어질 부담감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벵거는 아넬카를 보내며 레알에서 크로아티아 대표팀 스트라이커 다보르 수케르를 데려오게 됩니다.
크로아티아의 유로 96 8강과 월드컵 98 4강을 이끌었고,
레알에서 한시즌 24골을 몰아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한 적도 있는 세계적인 명성의 선수였죠.
하지만 이미 레알에서부터 살짝 노쇠화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수케르는 아스날에 와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합니다. 앙리가 워낙 대단한 활약을 했고, 다른 한 자리에는 최전성기에 다다른 베르캄프가 있어
주전 자리 확보조차 쉽지 않았죠. 부상 등이 겹치며 기량감소는 더욱 심해졌고,
시즌 말미에는 UEFA컵 결승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며 아스날의 준우승에 공헌(...)합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그는 쫓겨나듯이 한시즌만에 웨스트햄으로 이적했고,
그 곳에서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다 또 한시즌만에 바로 쫓겨납니다. 세계적 스타의 쓸쓸한 말년이었죠.
3. 프란시스 제퍼스(잉글랜드, 원 소속팀 에버튼, 스트라이커)
웨인 루니 이전 에버튼에는 또 하나의 걸출한 유스 출신 스트라이커 유망주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프란시스 제퍼스, 일명 '박스안의 여우'라는 별명을 지닌 영리한 움직임을 하는 스트라이커였습니다
잉글랜드 성인대표팀 콜업설도 오갈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던 그를 벵거감독은 앙리의 조력자로 점찍었고,
01-02시즌 개막 전 8m의 이적료에 영입합니다. 아직까지도 아스날의 클럽레코드가 15m라는 걸 감안하면,
10년전에 이 돈을 지출한 걸 볼때 벵감독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앙리와 베르캄프의 벽은 너무나 높았고, 간간히 얻은 출전기회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극도의 부진과 성장정체를 보입니다. 03-04시즌에는 극단의 해결책으로 원 소속팀 에버튼에 임대까지 보냈지만
거기서도 21경기 2골이라는 극악의 득점력을 선보입니다. 결국 벵거감독은 실패를 인정한 듯,
그를 방출합니다. 이후 그는 하부리그 팀을 전전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현재는 리그1(3부리그) 소속의 세필드 웬즈데이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최고 재능 중 한 명의 기록적인 몰락이었고, 벵거가 이적시장에서 기록한 가장 큰 실패 사례였습니다.
이 이후로 벵거가 잉글 선수들에게 학을 뗐다는 미확인 소문이 있으며(....)
아직까지도 아스날 팬들은 그를 모음을 빼고 초성체로만 호칭하며 그날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4.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스페인, 원 소속팀 세비야, 윙어 겸 공격형 미드필더)
03-04, 아스날이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던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벵거가 움직인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벵거가 데려온 선수는 '세비야의 진주'라고 불리웠던 스페인의 재능, 20살짜리 윙어 레예스였습니다.
투입된 이적료는 무려 10m 이상(거듭 강조하지만 아스날 레코드는 15m),
엄청난 기대를 안고 레예스는 아스날에 들어왔습니다. 벵거는 그를 35세가 된 베르캄프의 대체자로 보고 있었으며,
파브레가스 및 유스, 프랑스산 유망주 등으로 구성될 이후 아스날의 리빌딩 축을 맡길 심산이었습니다.
레예스는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FA컵 5라운드 첼시전에서 멀티골을 몰아치는 등 빠르게 녹아들며
아스날 선수단의 주축으로 떠올랐습니다. 03-04 무패우승과 04-05 FA컵 우승, 05-06 챔스 결승 진출 등에
공헌하며 맹활약합니다. 비슷한 시기 맨유로 왔던 호날두에 비해 압도적인 활약이었으며, 아스날 9번의 징크스는
드디어 깨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EPL의 거친 축구 스타일은 그에게 잦은 부상을 가져왔습니다(특히 네빌 형제에게 많이 당했고, 이 때문에 아스날팬들은
이 형제를 상당히 싫어합니다). 게다가 세비야에서 성장한 그에게 우중충한 런던 날씨도 적응하기 힘든 요소였습니다.
팀 전력까지 약해지면서 목표까지 상실한 그는 05-06시즌 종료 후, 향수병에 걸려 이적을 요청합니다(....)
실갱이 끝에 그는 훌리우 밥티스타와의 맞임대로 레알 유니폼을 입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다시 아스날로 돌아오고,
AT마드리드로 이적합니다. 그 덕분에 아스날의 리빌딩 과정은 상당한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후 아스날 팬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이게 다 레예스 때문이다' 로 마무리를 짓는 경향이 생기게 됩니다.
5. 훌리우 밥티스타(브라질, 원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공격형 미드필더 겸 스트라이커)
세비야의 또 다른 재능, 라리가의 피지컬 괴물. 밥장군. 훌리우 밥티스타. 야수라는 별명의 소유자
세비야에서 리그를 거의 초토화시키는 활약을 보이며 레알에 입단한 그였지만 레알에서의 활약은 세비야 시절만
못했고, 마침 레예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던 아스날과 맞임대하는 형식으로 06-07시즌 이적시장 종료 직전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아스날 팬들은 '근육으로 다 튕겨내 버려라!'라고 하며 기대를 잔뜩 걸었죠
.............하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결국 스트라이커 땜방 및 컵대회 전용 선수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유망주들로만 구성된 아스날의 칼링컵 스쿼드에 포함된 몇 안되는 베테랑이었던 그는 그래도
인상적인 장면을 남기긴 합니다. 프랑스 유망주 알리아디에르와 투톱을 구성한 그는 칼링컵에서 아스날의 승승장구를
이끌며 '밥-알 영혼의 투톱'으로 불리기도 했고, 준결승 리버풀전에서는 그 유명한 '안필드 4골'을 작렬시키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
모나코산 유망주 아데바요르에게조차 밀린 그는 시즌 종료 후 조용히 레알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후 로마로 이적한 그는 08-09시즌 챔스 16강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거듭하며 아스날의 8강행에 큰 공헌을 해
'은혜갚는 제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6. 에두아르도 다 실바(크로아티아, 원 소속팀 디나모 자그레브, 스트라이커)
06-07시즌 종료 후,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가 리빌딩에 돌입한 팀을 견디지 못하고 챔스 우승을 위해
바르샤로 이적을 하게 됩니다. 벵거 감독은 아데바요르-반 페르시 투톱 체제를 구축하며, 백업을 위해
브라질에서 크로아티아로 귀화해 맹활약을 하고 있던 에두아르도를 데려오게 됩니다. 이적료는 약 8m
당연히 팬들은 '지금 앙리가 나갔는데 그걸 아데바요르와 에두아르도로 때우겠다는 거냐' 라며 울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이내 호의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데바요르가 최고의 모습을 보였고 에두아르도 역시 멋진 모습을 보입니다.
초반 살짝 적응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는 반페르시의 부상 이후 주전 투톱에 진입해 환상적인 골 결정력을
보여주며 07-08시즌 초중반 아스날의 선두 질주에 크게 공헌합니다. 그야말로 원샷 원킬. 때리면 골.
진짜 내추럴 본 스코어러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거친 축구는 그에게 시련을 가져다 줍니다.
아직도 모든 아스날 팬들이 생생히 기억하는 08년 2월 23일, 버밍엄 수비수 마틴 테일러가 그에게 시작 3분만에
끔찍한 태클을 가합니다. 그의 발목은 완전히 골절되었고, 이후 1년이 넘게 그는 피치를 떠나있게 됩니다.
아스날은 이 이후로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며 초반 9승 1무로 시작했던 07-08시즌을 결국 놓치고, 이후 이 시즌에 구성했던
황금의 4중주(흘렙-세스크-로시츠키-플라미니) 중 두 명이 떠나고 한명이 장기부상을 끊으며 본격적인 암흑기로 접어듭니다
우여곡절끝에 그는 08-09시즌 후반에 복귀해 FA컵 번리전에서 골을 넣으며 훌륭히 복귀하지만,
플라미니의 대체자 DDS(데닐손-디아비-송)가 전부 실패한 아스날은 결국 09-10시즌 442 포메이션을 버리고 433으로 전환합니다
스스로 골을 만들어내는 유형이 아닌 전형적인 피니셔였던 그는 원톱 자리에서는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10-11시즌 개막 전 우크라이나 클럽 샤흐타르에 이적료 6m로 트레이드됩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이 정도로 기억합니다.
이후 1년간 이 번호는 비어 있었고(빅클럽에서 9번 번호 선수가 없는 황당한 상황;;),
새로 박주영이 입단하게 되면서 다시 주인을 찾게 되었습니다
불길한 마음부터 드는 건 사실이지만, 농담 반 보태 주님의 은혜와 은총으로(-_-;;)
박주영 선수가 이 징크스를 깨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9번이 저주의 번호라니, 좀 그렇잖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본문은 대부분 기억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여우볕 출판사의 '아르센 벵거' 책과 위키백과를 참조했습니다
(원문을 옮긴 것은 아니고, 가물가물한 기억이나 기록 같은 것을 확인하기 위한)
**기억이나 개인적인 느낌, 경험 등에 기반을 둔 터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점이나 보완할 점 등을 알고 계신 분은 댓글로 도와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