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동안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비는 묘합니다. 촉촉하게 내릴 때면 기분이 좋지만 추적추적 쏟아질 때 느껴지는 찝찝함은 무척이나 싫지요.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강의실 너머 창가에 잠깐 갠 하늘에 감탄하기도 하고 거침없이 내리는 물줄기가 짜증나기도 했습니다.
그저 몇 일 간의 비오는 날이었을텐데, 여느 때와 같이 잊어버릴 날들이었을 텐데 2011년의 나날은 당분간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
안녕? 누구는 편지 쓸 때 첫마디 쓰는 것도 힘들다던데 인사가 그렇게 어색하진 않네.
조잘조잘 풀어내면 너무 가벼워보일까봐 조금은 오글거리게 쓸께.
잘 지내니? 눈 앞에서 물어보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거 같은 너지만 네가 생각보다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는 몰랐지.
1년만에 손이 간 연락에도 아무런 어색함 없이 응해주어서 고마웠어.
실패로 움츠러든 난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은 것 같아서 용기를 냈지.
오랜만에 봤을 때는 그저 반가웠다!
내 기억보다는 다소, 그래 아주 쪼금 볼살이 붙은 거 같아서 웃었지.
경적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밤에 문득 문자 한통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날씨는 맑았을 거야 아마도?
네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을 때 졸린 눈을 비비며 휴대폰 자판을 떠듬떠듬 누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되게 잠왔는데 얼핏 심각해서 눈이 확 떠지고 집중해서 볼 수 밖에 없었지.
누군가의 속마음을 듣는다는 건 허투루 할 수 없었거든.
아마 이 때부터 였을거야 지독하게 비가 내린 날들이 계속된 것은.
다음 날 저녁쯤 네 문자를 받았을 때는 내 마음도 먹구름처럼 시커매졌다.
난 어느 순간부터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네 반응이 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어 무척이나.
한가지 알았다면 넌 내 생각보다 훨씬 착하고 순수했다는 것 정도일까?
안타깝기도 하고 약간 다그쳐보기도 했지만 바보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널 보면서 답답했지.
어디서 보았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어.
'호의를 가지고는 있으나 없어져도 약간 아쉬울뿐인 관계, 딱 그 정도의 거리감'
그 말이 떠오른 순간 내 가슴은 왜 그렇게 갑갑해졌는지.
문득 생각난 기억이 자꾸만 삐져나왔지.
그 다음 일은 내가 미안해.
넌 괜히 날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미안해했지만 나와는 비교도 안되게 혼란스러워 하던 너에게 괜히 부담만 준 거 같았어.
난 두려웠어.
안 본지 겨우 2년 밖에 안되었는데 남은 것은 생생한 현실도, 미화된 추억도 아닌 가라앉은 듯한 허무밖에 없었으니까.
순간의 감정들도 모두 진짜일텐데, 의식하지 않다가도 가끔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내가 싫어지곤 했지.
네가 하는 짓은 고도의 합리화일 뿐이야-라는 친구의 말을 곱씹으면서 진심이라는 것에 대한 의심을 싹틔웠지.
모든게 혼란스러워졌다.
남들은 차도남이라고 진담반 농담반으로 장난을 걸고 나도 그냥저냥 동의하곤 했는데
남들 다 자는 새벽4시에 연락은 무슨 충동으로 한건지 지금은 이해가 가질 않네.
아직 남아있는 기록을 조금이나마 살펴보면 되게 화끈거려.
처음이었어~ 가장 친한 10년지기에도 여기까지는 내 밑바닥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말이지.
피식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고자 했던 걸까?
그냥 개운했어- 이것도 네가 먼저 마음을 털어놓은 덕분이겠지.
이 날 이후로 난 너에게 연락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한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또 이거대로 헷갈렸어. 스스로 하는 헷갈림이지 그래.
빨리 오지 않는 답장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다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꾸준히 답해줘서 안심하기도 하고.
챙겨주는게 되게 멋지다고 웃었을 때 흐뭇해지고, 나 보고 싶냐고 발랄하게 말할 때는 두근두근거리기도 하고.
내 책 취향을 어떻게 아냐고 물었을 때 '널 봐왔는데 어떻게 모르겠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관심이 많다'라고 했을 때 놀라기도 하고.
휴일 날 아침이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뒤척이던 내가 떠오른다 하핫.
항상 여유있고 덤덤하던 내가 그런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기복을 느낀 건 처음이었지...
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너한테 난 뭐야?' 라고.
The nuts - 사랑의 바보가 오버랩되서 또 한번 웃었다.
그 때는 농담으로 얼버부렸지만 지금은 글쎄...?
연락을 했을 때 내가 너한테 '너하고 나는 그냥저냥 좋은소리 해주는 관계'가 아니냐고 털어놓았잖아.
그 때 네 말은 조금 의외다 싶을 만큼 신선하게 다가왔지.
'난 너한테 늘 좋은 소리만 하진 않아. 쓴소리도 하는데 모르고 있는 것인감? 항상 내 생각해서 말해주는거 고마워~'
왜 니가 고마워하니.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정말 고맙다.
..
너는 나한테 뭘까?
네 생각하면 흐뭇해지고 행복해지면 좋겠고,
믿음이 깨져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하면서 한번 더 기회를 준다면서 기다리는 너.
그 바보같은 모습에 화가 나다가도 왜 그냥 이해하고 난 가만히 있을까.
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거 같아.
묻어둔 기억 때문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감을 잃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
'나 좋아해?' 라고 물었지? 응 많이 좋아해. 근데 만난지 얼마 안되서 생기는 그런 두근거림과는 조금 다른 거 같네.
비록 자주 보지 않아도 언제나 의지가 되는 그런 잔잔한 두근거림, 편안함이랄까.
그런 너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무척이나 부럽구나.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너도 아는 사람이지만.. 너와 달리 문자를 자주 하지 않아서 가까워지기가 쉽지는 않지만 진솔한게 너와 무척 닮아서 느낌이 좋네. 안되도 질러봐야지 우리 모두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므로-
내가 마지막쯤에 보낸 문자 기억하고 있니? 마지막을 어떻게 적을까 하다가 그냥 이 말이 좋아서 한번 더 여기에 적는다.
네 마음 무사하기를, 내 마음도 무사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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