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친구의 여자친구이자 내 친구이기도 하고 출판사 그린비의 사원이기도 한 그런 손님이 가게에 들렸다. 금요일인가 토요일이었나,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아직 일에 숙련되지 않은 덕에 나는 뭔가 망나니 칼춤추듯 일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는 일들을 몇 가지 끝내고 자리에 서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인사했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그녀는 칵테일 제조에 쓰는 계량컵인 지거를 보고 어딘가 <제기>같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뭐? 음악 소리에 묻혀서,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제기>라는 단어를 처음에는 듣지 못했다. 제기. 제사에 쓰는 그릇말야. 라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뭔가. 제기를 들고 무당 굿하듯 이리저리 펄럭이고 있으니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박수무당같은 머리 꼬라지에 소매 넓은 셔츠는 덤이다. 향 대신 입에 문 담배. 작은 스피커가 토해내는 몇 가지 음울한 음악들. 쭉 둘러앉은 사람들. 어딘가 무당이 된 기분이었다. 대충 만드느라 한글을 못 쓴 메뉴판을 떠올리며, 무당보다는 샤먼인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라고 속으로 읊조렸다.
하긴, 바텐더는 현대적인 샤먼일지도 모른다.
나는 제기에 이상한 액체를 담아 이것저것 섞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먹이고, 그들은 이상한 액체를 마시고 접신하여 방언들을 토해낸다. 몇몇은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기도 하고, 몇몇은 옆 사람에게 시비를 건다. 몇몇은 바닥 대신 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실신한다. 그러한 일련의 의식을 통하는 동안, 그들은 정화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들은 복채 같은 것을 던져주고 떠나간다. 나는 어떤 병도 고칠 수 없지만, 어떤 병을 이고 온 사람에게도 이상한 액체와 섯부른 말들을 던져줄 수는 있다. 정말 사랑한 여자와 잤는데 성병에 걸렸다는 친구라거나,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알콜 중독으로 바꾼 친구라거나 하는 이들에게.
만화 <바텐더>의 초입에, 주인공은 바텐더를 약제사에 비유한다. 글쎄. 충분히 좋은 비유지만 약제사는 역시 어딘가 화학적인 느낌이 난다. 화학자와 장인을 합친 듯한 이미지랄까. 하지만 나는 화학자의 마음가짐도 장인의 손재주도 갖추지 못했는데. 역시 나는 어딘가 선무당같은 쪽이 편하다.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나는 학자인양 살았고 학원에서 훈장질을 하던 시절에 나는 훈장인양 살았다. 바텐더라면 바텐더인양 살려고 노력은 해봐야겠지만, 차라리 나는 샤먼이 되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푸닥거리를 하며 이상한 액체를 만들어 먹이는 그런 트롤 주술사. 아. 백년쯤 전메 만렙을 달았던 내 오크 주술사의 아이디가 정말 인기 없는 리큐르 이름이었지. 하는 기억이 떠올랐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